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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시티가 아닌 메타시티, 협력과 공존의 도시 20141009

이태리 중세도시 시에나의 옛 시청사 2층 벽에는 14세기 화가였던 암브로지오 로렌제티가 그린 ‘좋은 정부의 도시’라는 프레스코 그림이 있다. 그림 속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에는 촘촘히 배치된 건물들 사이로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반면에 성벽 밖은 색채도 음울하지만 농토를 일구는 농민들의 표정 또한 어둡다. 도시와 농촌은 행복과 불행의 다른 말인 것처럼 그려져 있는 것이다.
도시는 오랫동안 성벽 속에 형성된 계급적 공동체였다. 요르단강의 서안 예리코에서 발굴된 집단주거지가 만년 전의 역사라고 하지만, 도시로서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오래된 곳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수메르인의 도시인 우르가 대표적이다. 구약성서에 아브라함의 고향으로도 나오는 이 곳에는 성벽도 있고 지구라트나 왕궁, 일반주거지도 확인되었으니 로렌제티가 그린 도시의 먼 원형이라고 해도 된다. 한 지역을 성벽으로 한정하고 그 속에서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는 도시, 이는 성벽이 없어지는 18세기 무렵까지 무려 반만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줄곧 지속된 도시의 개념이었다. 행복지수가 시대별로 커지는 게 아니니 인류역사상 최고의 행복도시도 있었을 게다.
그 중에서도 폼페이는 대단히 충격적이다. 79년에 화산폭발로 화석화된 이 도시를 20년전 처음 답사하고는, 나는 망연자실하였다. 7백년의 역사에 2만명이 거주하던 이 곳은 교역의 중심지였고 휴양과 위락의 도시였으며 문화예술이 늘 꽃피는 놀라운 도시였다. 내가 믿는 이상적 도시의 모든 요소가 이천 년 전의 이 도시에 다 있었다. 빈자와 부자, 낮은 자와 높은 자 등 신분과 계급이 공존했다. 상하수도 등의 기반시설은 완벽했고 시민들은 손쉽게 공공시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완전도시. 어쩌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어 멸망했을까? 도시가 진보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깨달은 것이다.
성벽의 도시는 중세의 유럽에서 황금기를 맞는다. 방방곳곳에 유토피아를 외치며 수도 없는 계획이 세워지고 건설되었다. 난공불락의 성벽을 쌓고 밖에 해자를 두른 이 도시들은 치밀한 가로망으로 위계적 질서를 만들고 가운데는 영주의 궁을 두어 단일 중심을 이룬 폐쇄적 조직이며 그래서 모두가 배타적이다. 이들 도시 이름 끝에 붙는 –polis, -pur, -burg, -bough, -bourg 등이 성벽이거나 닫혀진 공간을 의미하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성내는 성 밖에서 보면 동경의 대상이요 질시 자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성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란 뜻의 부르주아가 착취계급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18세기말엽 프랑스 시민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정신과 물질의 자유를 얻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성벽은 마침내 허물어지고 도시는 기회의 땅이 되어 확장일로에 놓이고 만다. 이성의 우위를 내세운 모더니즘에 바탕을 둔 마스터플랜이라는 도면은 전가의 보도였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를 통계적 수치를 근거로 예언하며 우리 삶을 재단하기 시작했다. 주거와 상업 공업이 지역으로 나뉘고 도로는 서열화되었고 도심과 부도심 같은 계급도 매겨졌다. 그런 도시를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라고 불렀다. 어머니를 뜻하는 meter이니 원래 성장과 팽창을 뜻했다. 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메트로폴리스는 21세기가 시작되던 해에 무려 450개나 되었고, 그 중 25여 도시는 이미 천만 명 인구의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나 메가시티로 팽창하였다. 심지어 지구전체의 단일도시화를 목표하는 에큐메노폴리스라(Ecumenopolis)는 이름도 등장했다. 실제 2050년에는 인류의 75퍼센트가 도시민이 된다고 한다. 그곳에서 우리 삶은 안녕할까?
미래에 대해 많은 비관이 쏟아졌다. 1927년에 나온 미래도시에 관한 공상영화 "메트로폴리스"에서 도시는 지배자와 노동자 계급으로만 나뉜 갈등의 집단으로 그려졌고, 1982년의 영화 "블레이드런너"가 그린 2019년의 로스앤젤러스는 산성비에 젖은 음울한 풍경으로 나타났다. 온실가스, 지구 온난화, 이상기후, 석유자원의 고갈, 원자력의 공포 등등......온갖 지표와 예측도 불안하다. 도시인류는 지속할 수 있을까?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도시, 그 화려한 종착점인 메트로폴리스라는 단어가 아직도 유효한가?

미국의 사회학자 리차드 세네트는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도시를 이렇게 정의했다. “다원적 민주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시노이키모스(synoikimos), 즉 종족, 경제적 이해 혹은 정치적 견해간의 차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집중화 된 권력이 목표가 아니라 서로의 차별성이 발전의 주체이다. 이 비전은 거대하고 집중적인 건물이 표현하는 상징보다는, 뒤범벅된 공동체 속에 여러 언어가 적층된 건축을 선호한다. 다원적 민주주의의 형상은 도시를 표현하는 획일적 이미지를 철저히 부스러뜨린 결과이다."
단일 중심이나 위계질서가 아니라는 것, 획일적 규칙이 아니라 복잡다단하며 가치가 달라야 한다는 것, 그는 무려 2300년 전 그리스 철인이 그렸던 도시가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회라고 하였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프랑수아 아쉐는 아예 새로운 도시개념을 제안했다. 그는 ‘도시의 미래, 메타폴리스’ 라는 책에서 성장과 팽창이 목적인 메트로폴리스가 아니라 지속과 연계의 가치를 지향하는 메타폴리스가 새로운 시대 우리의 도시적 풍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기능이나 효율, 속도나 결과 보다는, 관계나 개념, 느림이나 과정이 훨씬 중요하고 개발이나 미래보다는 재생이나 현재가 더 귀중하다. 동시다발적이며 연대적이고 개인의 자유가 우선인 곳이 그가 제안한 메타폴리스의 풍경이다.

폴리스가 다소 폐쇄성과 연관된 어원에서 비롯된 단어라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라는 뜻에서 ‘메타시티’로 바꾸었다. 메타시티. 이를 우리말로 하면 어떻게 될까? 종래의 도시개념을 띄어 넘으니 ‘초(超)도시’? 아니면 ‘반(反)도시’? ……내게는 ‘성찰적 도시’이다. 워낙 서양도시와 근본부터 다른 우리의 도시들이니, 이제는 지배나 배척을 통한 팽창의 미망에서 벗어나 관계와 공존을 통해 우리 삶을 성찰하며 회복할 때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