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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침묵 20110519

'위대한 침묵'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프랑스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그랑 샤르튀레즈 수도원의 일상을 다큐멘터리로 찍은 것인데, 대사가 거의 전무하고 상영시간이 2시간40분이 넘어 성공적 흥행은 애초에 기대 밖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에서 꽤 많은 관객을 모았던 영화였다. 필립그뢰닝이라는 감독이 이 수도원에 촬영을 청원한지 무려 15년 만에 허락을 얻어 6개월을 수도사들과 함께 기거하며 혼자서 찍었다고 했다. 영화의 내용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동트기 전 일어나서 기도를 시작으로 오로지 성경읽기와 쓰기, 묵상, 기도, 세 번의 미사를 드리는 수도사들의 일과를 담백하게 담고 있을 뿐이다. 수도원은 폐쇄되어 외부와 단절되고, 내부도 대화는 단절되어 침묵만이 흐른다.
나는 이 영화의 시사회를 겸한 관객과의 대화에 해설자로 초청 받는 바람에 이 영화를 사전에 보아야 했다. 지겨울 것이라는 영화사 관계자의 걱정스런 전갈이 있었지만, 내게는 그 긴 시간이 순간적으로 흘렀다. 이 수도원을 가본 적이 없었어도, 그 영화를 보는 일은, 도면으로만 상상하던 풍경을 확인하는 일이어서 흥미롭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수도원을 의미하는 영어에는 크로이스터(cloister)와 모나스터리(monastery)라는 두 단어가 있는데, 그 어원은 다소 다르다. 클로이스터는 갇혀있다라는 어원을 가지는 반면, 혼자됨을 어원으로 삼는 모나스터리는 그런 클로이스터 중에서도 스스로를 독방에 가두어 침묵과 은둔의 삶을 원하는 수도원을 뜻한다. 1084년에 설립된 카르투지오 수도회가 최초의 모나스터리이며 그랑 샤르튀레즈가 그런 봉쇄수도원의 본산이다.

나는 사실 수도원 기행을 대단히 즐겨 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혼자든 여럿이든 기회만 되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 나서곤 했다. 세상을 떠나 스스로 침묵하며 단호한 삶을 사는 수도사들의 공간을 순례하는 일은 찌든 일상에 흩트려진 나를 곧잘 다시 추스르도록 자극하는 일이었다. 대개 이런 수도원들은 깊은 산속이나 절벽 같은 고독한 장소에 놓여 있다. 수도사들이 그런 곳을 찾는 까닭이 그 고독한 공간이 자신을 번뇌에서 해방시켜주리라 믿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그런 절체절명의 장소에 절박하게 놓인 수도원은 그 풍경만으로도 애절한 감동을 준다. 예컨대, 탁발수도회를 창시했던 프란체스코가 활동한 아씨시의 화려한 성당과 수도원에서는 아무런 감동을 못 받던 내가, 그가 혼자서 수도하기 위해 찾던 산 속의 초라한 암굴, 에레모 카르체리를 보고 그 적막과 고독의 풍경에 가슴 저리는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이다.
물질과 육체로부터 자유하고 그래서 정신적으로부터도 오히려 자유로운 그들의 맑은 삶이 그런 아름다운 공간과 묵시적 건축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기꺼이 고독으로 몰아넣고 수도하는 그들과 그런 수도원은 그래서 늘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작년에 티베트의 수도원을 방문한 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라싸에서였다. 티베트의 불교사원들이 가지는 독특한 풍경과 공간구조에 감탄을 연발하며 다니다가 7세기에 지은 조캉사원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수도자들을 본 것이다. 몇 가지 볼품 없는 보호대를 댔지만, 온 몸은 이미 상처와 허물로 만신창이인데 연신 몸을 바닥에 던지며 사원으로 다가가는 이들이었다. 어떤 이는 평생 동안 그렇게 고행을 하며 이 사원을 찾는다고도 했고, 어떤 이는 매일 그 곳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몸을 상하게 한다고 했다. 그때 알았다. 수도(修道)라는 것은 말 그대로 길을 닦는 일이었다. 그것도, 온몸을 던져 자기 자신의 육체를 허무는 고통을 수반하며 자기 길을 닦음으로 여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샤르튀레즈 수도사들의 삶도 육체의 고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알프스의 설산에서 부는 찬바람을 얇은 살갗으로 막아야 했고, 하루 한끼 조그만 구멍으로 넣어주는 마른 빵으로 허기를 견뎌야 했으며 온종일을 갇혀 지내며 그들의 육체를 죽여야 했다. 영화의 전편에 흐르는 침묵은 미학이 아니라 숨죽인 사투였고, 그레고리안 찬트라는 게 그들의 절규마저 절제되어 낸 소리였다. 득도는 소위 염화시중의 미소로 이루어지는 게 결코 아니었다.

그 지루한 영화에 파격이 하나 있었다. 아시아인으로 보이던 어느 신입수도사로부터 수도원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겠다는 의사를 전해들은 수도원장이 그 수도사와 이 영화 속 유일한 대화를 나누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말에 그 젊은 수도사는 서울로 간다고 했다. 위대한 침묵의 수도원에 비해 서울은 대치의 극점으로 놓이게 되어 속되고 소란한 세계의 대표로 그려진 것이다. 한국인임이 틀림없어 보인 그 수도사의 환속에 그러나 나는 오히려 안도하며 즐거워했으니, 이 번뇌의 땅에 사는 내가 수도하여 득도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를 뚫고 지나가는 일과 같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