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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느끼는 책-공간의 안무 20070608

하이데커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거주하는 것이다’ 라고 하며 건축 속에 거주하는 의미를 언급했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은 건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지만 우리의 건축에 대해 지식과 견해는 지극히 초보적이요 피상적일 뿐이다. 아니다. 어쩌면 건축의 진실에 반하는 아주 잘못된 관념을 오히려 가지고 있기도 하다. 건축을 예쁘다거나 희한하게 보인다거나 하는 순 시지각적 관념에서부터 집을 부동산적 가치로만 인정하는 사회적 공론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건축은 건축이 아니다. 소위 선진 외국의 사람들과 건축에 대해 이야기 할 때나 그들이 발행하는 신문 방송들에 곧잘 등장하는 건축에 대한 고담준론의 내용을 대할 때마다, 우리의 척박한 건축환경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과 절망감마저 가지게 된다.
왜 그럴까. 지난 개발시대 이후 우리에게 각인된 우리 사회의 잘못된 목표가 그 첫 번째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 전만해도 우리에게 건축은 시지각적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의 집들은 대부분 마당이라는 비워진 공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방들은 거실이나 식당 화장실 같은 목적을 일컫지 않고 안방 건넌방 문간방 같이 위치를 일컬어 거주자의 의지에 의해 그 공간은 변용되었지만 우리의 경제개발정책은 쓸모 없이 보이는 마당은 덮어서 써야 했고 방들은 분명한 목표수치를 가져야 했다. 그 뿐인가. 느리게 보이는 굽은 길은 바르게 펴야 했으며 가난해 보이는 초가는 슬레이트로 바꿔서 시뻘겋고 시퍼런 ‘뼁끼’로 칠갑해야 했으니 공간은 추방되고 굽은 길을 몸짓대로 걷던 모습은 제식행렬로 숨가쁘게 바꿔 걸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북한이나 외국에서 누가 올라치면 합판 떼기로 높은 담장을 집단으로 두르고 스위스풍인가 하는 풍경을 그 위에 칠 해댔으니, 어느 틈엔가 건축은 그렇게 공간을 채우는 것이며 눈부신 장식이 많아야 완성되는 것으로 세뇌되었지 않았을까.
건축이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더니즘의 시작이었다. 20세기 전까지의 건축은 그리스 로마가 빚은 고전시대의 건축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 전범이었고 텍스트였다. 오죽하면 그 찬란한 고딕과 바로크를 거쳤음에도 또다시 그리스 로마시대를 흠모하며 고전주의시대를 열었겠는가. 그러나 시대에 맞지 않는 그 불편한 사조를 참을 수 없었던 20세기는 인간의 지성을 우위에 두며 건축에서 공간의 중요성을 발견해 낸다. 공간을 축조하기 위해 건축을 했음에도 이 공간은 그 오랜 건축의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건축이 보이지 않는 물체인 공간을 본질적 요건으로 하면서 건축은 철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사유의 목표가 되었다. 사실 플라톤도 건축은 시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철학자체를 그 축조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었듯 건축은 오랫동안 철학의 다른 모습이었으므로 현대철학과 건축이 다시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공간이라는 문제가 우리의 지성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에서 다시 본질이 된 것이다.
우스운 일은, 그 보이지 않는 공간은 이미 우리 선조들의 사유체계에서 깊이 자리 잡은 것이었으며 놀라운 성취를 기록했고 생활 속에 널리 구체화되기 까지 한 현실적 환경이었던 것인데, 앞서 말한 바처럼, 이를 구악으로 간주한 우리의 개발독재세력에 의해 추방되고 멸실 되었으며 금기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네 환경이 지금 난장판이다. 천박한 공간구조로 우리의 삶이 단선화되었고 분탕질한 건물로 우리는 정직하지 못하다.
작금의 세계건축도 이상한 징후를 보인다. 어느 사조도 이 시대의 선도적 이념이 되기 어려운 지금, 정보의 신속한 공유는 투명해진 세계건축지도에서 존재하기 위해 건축은 기괴한 형태와 신기한 표피의 획득에 정신이 없다. 구조는 비틀어지고 휘어지며 그 표면은 쉽게 분리되어 현란한 텍스츄어와 패턴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공간의 진정성을 지키는 일은 이미 학교에서도 조소 받기 시작하는 것이다.
건축이 땅을 점거해서 존재하는 한 그 진정성의 가치를 굳게 신봉하며 내 자리를 지켜온 나는 바야흐로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내 존재의 위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가치에 대한 위기, 공동체에 대한 위기를 말한다.
이 때, 마이젠하이머 교수의 이 책, ‘공간의 안무’는 내게 커다란 위안을 던져주었다.
공간과 안무? 이 두 단어의 병치는 틀림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뜨악할 게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앞서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무엇을 주장하려 하는지 알았고 이 책이 지닐 가치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핵심 단어는 물론 공간과 장소다. 건축서적임에도 형태나 색채나 장식이라는 시각적 단어는 극히 찾아보기 힘들다. 오로지 장소와 길, 경계와 벽체, 침묵 그리고 해체 등이 주제어이며 그 주제어로 이루어진 공간을 우리의 몸이 시간에 따라 넘나든다. 그래서 기억을 만들고 욕망을 만들며 순회하고 배회한다. 그게 공간의 안무라는 것이다.
특히 이 책 중에서 4장에 기록된 ‘무대의 공간(Der szenische Raum)’은 가히 마이젠하이머 교수의 공간에 대한 섬세하고 깊은 관찰과 사유 중에서 백미에 꼽히는데, 그는 건축을 우리의 삶이 유도되도록 만들어진 장치며 가능성을 암시하는 무대라는 것이다.
…. ‘건축된 공간은 움직임의 진행을 암시하고 춤사위는 공간에 대한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공간과 움직임은 서로를 해석한다.’…..’건축과 춤은 “가능성”에 대한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때문에 유토피아적 장면이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건축이 모든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선함과 진실됨과 아름다움을 일구기 위해 해야 할 사명을 확인하며 그의 언설에 감명받았다.
그는 또한 기념비적 건축을 믿는 허황된 이 시대에, 건축의 최후에 대해서도 조용히 권고한다. 건축은 파국을 맞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이는 결국 남는 것은 기억이라는 것이며 이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려 깊고 긍정적인 마이젠하이머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의 미래를 다시 아름답게 낙관하며 책을 맺는다.
‘ 하지만 파국은 거주에 알맞은 땅의 상태, 받침대의 힘과 건축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만들어 내도록 돕는다.’
당의정같이 우리의 입가만 달콤하게 하는 요설이 가득 찬 건축서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이 책은 우리에게 건축의 본질을 일깨우는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건축에 관한 책이 아니라 우리의 기초적 사유와 몸의 행태에 대한 보고서다. 더구나 그 갈피에 마다 적시된 외마디 같은 명구와 흑백의 도판은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른바 이 책은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