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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음을 구한 말, ‘낭중지추’ 20071003

나는 1980년에 비엔나 유학 길에 올랐다. 이미 김수근선생의 문하에서 건축을 치열하게 배우고 익히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군부독재가 내 뿜는 광기가 너무도 싫어 유학을 빙자하여 그냥 떠난 것이었다. 김수근선생의 휘하에서 미치도록 건축에만 몰두한 것도 구태여 그 질곡 같은 현실을 외면하려 한 결과의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5월 광주의 비극은 이 땅을 진저리 치게 했고 나를 더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러니 유학생활을 충분히 준비할 턱이 없었다. 비엔나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였으며 아는 사람 하나 없었던, 말 그대로 막무가내였으니, 그냥 탈출한 것이 맞는 말이다. 다행히 마산성당 설계하면서 알게 된 오스트리아 출신의 요셉 프라쳐 신부의 주선으로 우선 비엔나의 한 수도원에서 생활 할 수 있게 된 것이 유일한 실마리였다.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도 있었지만 동시에 낯설고 외로운 생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반 년 후에 돌아와서 결혼식 하겠다고 약조한 아내를 불러들여 비엔나 근교의 오래된 성채 교회에서 단출한 결혼식을 올리고 석 달 넘게 생활한 수도원을 나왔다. 꿈 같은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주변은 항상 이방이어서 확실하지 않는 미래는 그 시한이 점점 다가올 뿐이었다.
학교 생활이 익숙해 질 무렵 아이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아내도 비엔나에서 공부할 준비를 하고 왔지만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아이 출산만 잘 준비하라고 일렀다. 가지고 온 돈은 다 바닥이 났지만 아이 가진 아내를 걱정시킬 수도 없었다. 혼자의 고민이 깊어갔다. 어떻게 해야 하나. 경제적 도움 받을 이 하나 없는 비엔나에서 1년도 채 안된 유학생활을 끝내고 돌아갈 수 밖에 없는 답답한 처지였으니, 더불어 그간에 겪어야 했던 고독과 소외, 왠지 모를 주눅으로 나는 가장 무능력하고 젊은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집으로 편지 하나가 서울에서 배달되었다. 공간시절 같이 지내던 류춘수 형(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건축가)이 보낸 것이었다. 그 편지 글 속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효상이 너는 항상 낭중지추(囊中之錐)였으니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빼어난 삶을 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주머니 속의 송곳….아! 그러했다. 한국에서 나는 항상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삐져 나오듯 내 존재를 드러내었었고 각광도 받았었는데……내 존재를 까맣게 잊게 한 그간의 비엔나 생활을 뒤척였다. 말도 안 되는 비굴한 짓이었다. 나는 불현듯 책상에 앉아 나에 관한 글을 썼다. 그리곤 편지봉투에 넣어 바로 비엔나 유수의 몇 설계사무소에 우편으로 보내게 된다. 그곳 학교의 첫 과정도 채 마치지 못한 내가 감히 넘보지 못할 건축사무소 취직이었지만, 나는 이미 류춘수형의 말대로 다시 송곳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첫 번째 답신을 받는 데 불과 닷새가 걸렸을 뿐이다. 인터뷰 날짜가 정해졌고 나는 ‘송곳’처럼 여러 질문에 응하고 결국 같이 일하자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아내는 보험을 바꿔 안정된 진료를 받게 되었으며 밝은 집으로 이사하고, 학교는 그만 두었지만 더욱 실제적인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비엔나의 낭만적 삶도 보이기 시작했고 와인에 음악회에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살게 되었다. 물론 나는 송곳임을 줄곧 기억하였고 그 사무실에서 나는 점점 더 중요한 존재가 되어갈 무렵, 갓 태어난 아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불과 2년 남짓한 길지 않은 비엔나의 생활이었지만 마치 내 존재감에 대한 실험을 하듯 나는 거기서 살았다. 그리고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이 단어 ‘낭중지추’ 때문이었다. 이는 내 젊은 삶을 지탱해준 잊지 못할 말이었으며 지금에도 좌절스런 현실의 벽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를 곧추세우는 마법의 금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