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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20050705

지난 1970년대 유신독재로 우리 사회가 짓눌려 있을 때, 유래 없는 정치체제를 강변하기 위해 박정희정부는 곡학아세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선전 구호로 내세우며 국민들을 세뇌하기 이르렀다. 거리 곳곳 마다 그 구호의 현수막이 걸렸다. 건축계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체제의 정통성을 강변하기 위해 모든 공공 건축물의 설계지침에는 ‘한국적 전통’에 대한 문구가 거의 반드시 명기되어 강제되었다.
옛 건축을 흉내 내어 원형의 콘크리트 기둥 위에, 실제 구조와는 무관하게 전통적 공포 장식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얹히고 콘크리트 서까래와 경사진 콘크리트 슬라브 면 위에 기와를 씌운 후, 소위 계란색으로 펭키 칠한 건물, 아직까지도 망령처럼 가끔 지어지곤 하는 이 날조된 형식이 그때 등장한 건축이다. 어린이회관이며 국기원이며 광주박물관, 기능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세워졌으며 지금의 청와대 건물도 그 잔재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는 이런 건축을 박조건축(朴朝建築)이라 불렀다.
가시적 성과에 혈안이 된 그들의 빈약한 문화의식이 이해하는 한국전통건축은 오로지 말초적 시각대상으로 포착된 형태와 장식에만 있었으니 그 결과는 늘 천박하고 초라했다.
만약에 그들의 전통건축에 대한 주장이 조금이라도 사실이라면, 그런 건축을 수천 년 동안 만들어 온 우리들의 선조가 가진 건축의지는 너무도 편협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며 무가치한 것이어야 한다. 기와지붕의 선과 공포형식과 배흘림 기둥과 창호문살의 장식이 그 건축의 전부임으로……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극기하여 체득한 지혜에 대한 모욕이며 우리 자존의 궤멸이다.
지난 1993년 ‘수졸당(守拙堂)’을 설계했을 때다. 그 당시 가난한 학자였던 유홍준교수가 부모를 모시기 위해 가친의 퇴직금을 빌어서 짓기로 한 이 작은 집에 대한 나의 욕심은, 잃어버린 우리 도시주거의 원형에 대한 탐구였다.
사실 우리의 도시주거는 오랫동안 완고한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모든 방들이 둘러싸고 외부와 내부는 하나였으며 길과는 그 방들이 경계를 이루며 옆 집과 다닥다닥 모여서 견고한 공동체를 이룬다. 길은 그 마을의 거실이며 공회당이고 놀이터여서 공동체의 의식을 돋우는 사회였다.
그러던 동네가, 70년대에 집장수들이 등장시킨 ‘불란서 미니 2층집’이란 형식, 불란서에는 있지도 않는 국적불명의 주거형태가 전국을 휩쓸게 된다. 60년대 말 남진이 불러 유행한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유행가의 꿈을 실현하려 했을까, ‘비둘기집’이라고도 불렸던 이 집은 우리 주거사에 일대 변혁을 만든다. 비대칭의 경사지붕에 테라스 2층과 반 지하층의 이 집은 남은 땅에 잔디를 깔게 하여 건축은 외부와 대립하는 서양건축을 서투르게 모방했으며, 대지경계에는 담장을 치고 그 위에 병조각이나 가시 철망을 휘두르면서 이웃과는 단절되고 동네는 드디어 모여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붙어 살 뿐인 집합체가 되고 만다.
유홍준교수의 집은 전형적인 그런 주거단지에 있었다. 이 단지는 70년대 강남을 개발할 때 맨 처음 건설되었던 곳이었다. 나는 70평 남짓한 땅이지만 세 개의 마당을 그 속에 설정하고 방들로 에워싸게 하였다. 집 앞의 골목길을 대지 내부로 연장시켜 내부공간과 외부공간 간의 결합과 접속을 이루게 하였다. 이는 필연적으로 공간의 풍요로움을 만들기 마련이며 그 스케일은 손에 잡힐 듯 작아서 우리 어릴 적 거주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내부공간만 따지면 디귿자 형식이 되었는데 도시형 한옥의 공간구조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이 수졸당은 지어진 후 많은 건축상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 건축상을 주는 이유들이 하나같이 ‘전통성과 현대성을 잘 조화시킨 주택’이라는 것이었다. 덧붙인 설명에는 드라이비트의 슬라브 집이면서도 전통돌담과 창호지문이 잘 어울린다는 것이니, 그들이 건축을 보는 견해는 여전히 오브제적이며 형태론적이었다. 믿기로는 기와를 씌운 돌담과 창호지 바른 문이 없어도 이 집은 ‘전통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것인데, 이유로는 이 집이 가진 공간구조와 그 스케일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건축의 역사에서 주거건축은 원래 그 발전속도가 대단히 더디다. 다른 일반 건축물들의 뚜렷한 양식적 변화가 시대별로 확연히 일어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고대 이집트시대에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동원된 노동자들을 위한 집합주거나 로마시대의 군인들의 7층 공동주택의 구조를 보면 요즘 지어지는 작은 평형의 아파트와 그 평면양식이 별 다르지 않다는 데 놀라게 될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기본적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까닭이니 주거의 변천은 더딜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주거역사는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변혁을 우리 거의 모두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불란서 미니 2층집’이 그 시발이었다.
수 천년 동안 우리 집들의 방은 목적을 갖지 않았다. 안방, 건너방, 문간방 등 위치에 따라 방의 이름이 정해졌으며 심지어 변소도 뒤에 있다고 뒷간으로 부를 정도였다. 요를 깔면 침실이 되고 책상을 펴면 공부방이요 식탁을 두면 식당이고 담요를 깔면 화투방이 되었다. 그야말로 공간은 거주자의 의지에 의해 수시로 변용되는 객체인 것이다.
그러나 ‘불란서 미니 2층집’과 함께 등장한 ‘서구화’ 된 새 주택은, 거실이며 침실, 주방과 식당과 화장실 등 정해진 목적의 방으로 구성되어 우리의 행위를 제한 시킨다. 공간을 오히려 주체가 되고 거주인은 객체가 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이 형식은 우리의 공간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니, 눈에 보이지 않은 이 인식의 변화는 혁명이었다. 건축의 본질적 요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의 조직과 성격부여라면 이는 우리 전통건축을 그야말로 혁명시킨 것이다.
‘수백당(守白堂)’이라는 주택을 지난 1999년 짓게 되었을 때, 이러한 목적 없는 방들로 위계를 갖지 않는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설계의 주된 개념이 되었다. 가로 30미터 깊이 15미터의 경계를 설정하고 그 속을 서로 다른 크기를 갖는 12개의 공간으로 분할한 후 5개 공간은 뚜껑이 있는 방이며 나머지 7개 공간은 벽으로 한정은 되어 있으되 뚜껑이 없는 방으로 삼았다. 이들 중 어쩔 수 없이 욕조나 조리대 같은 설비를 구비해야 하는 방이 생길 수 밖에 없어 이들은 욕실이나 부엌으로 쓰이게 되겠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은 모두 동등한 자격을 갖는 방들로 간주했다.
당연히 모든 공간은 인접한 다른 공간들과 더불어 풍요로운 풍경을 만들게 된다. 어떤 곳은 딱히 기능과 목적이 없어 빈 공간으로 남아 있지만, 시시때때로 변하는 주변의 풍경이 머물러 그 공간을 변환시킨다. 그리고 거주자는 이 비움을 즐긴다. 물론 그 모든 공간들은 서로 뒤바꾸어 사용해도 이 집의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
이 수백당을 지은 후, 건축평론 한다는 어떤 이가 이 집을 보고 비난했다고 한다. 공간의 구성이 거주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요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건축의 공간마저 오브제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건축을 만들어진 직후의 상태로 영원히 존속하기를 바라는 것이나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우리네 전통적 건축 형식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건축은 시간과 함께 변화하는 것이며 결국은 소멸하는 한시적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애초의 건축은 그 변화를 담기 위한 하부구조여야 한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내 건축의 절제는 고정되어 변할 수 없는 서양미술의 미니멀리즘과는 그 목적과 뜻이 다르다. 이는 우리 선조들의 건축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지난 2000년 새로운 세기를 맞으며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내건 테마는 ‘Less Aesthetics, More Ethic’이었다. 직역하면 덜 미학적인 것이 더 윤리적이다 라는 이 문구는 나를 적지 않게 놀라게 했다. 서구건축에서 윤리라는 단어를 대두시킨다는 게 내게는 무척 생뚱맞아 보였기 때문이다. 윤리라는 문제가 남과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볼 때, 항상 유아 독존적 가치에 더욱 무게를 두어 온 서구 건축사를 돌이켜 보면 이는 낯선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기여서 새로운 발상이 필요했을까.
참가자 중에 빈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한스 홀라인은 물 위에 판을 놓고 흰 쇄석을 깔고 몇 개의 돌무더기를 놓아 그 주제의 물음에 대한 답을 했다. 물론 이는 그의 창작이 아니었으며 일본 교토의 료안지 마당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내가 지난 1998년과 99년을 런던에 거주하면서 그곳의 건축가들이 비움이나 모호함, 불확정 같은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고 씁쓰레했던 기억이 난다. 료안지 마당은 그러한 단어를 사용할 때 드물지 않게 거론되던 일본의 전통적 공간이며 보는 이에게 고요와 정적을 극도로 고양시킨다.
그러나 이 공간은 어떤 것도 움직여질 수 없으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치 투명한 얼음덩이가 가득 찬 것처럼 동결되어 있다. 확정된 공간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공간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 선조들이 만든 우리네 마당은 사뭇 다르다. 비어있는 이 공간은 시시때때로 채워진다. 때로는 축제의 공간으로 때로는 제의공간으로 더러는 놀이터가 되고 노동현장이 되기도 하는 이 공간의 변모는 엄청나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일들이 끝나면 그 마당은 비움의 상태로 남는다. 그 비움은 모든 기억을 가졌지만 또 다른 기억을 담도록 느슨하다. 그 위에 관조자의 사유가 내린다.
이 비움은. ‘서구화’가 지난 시대 우리의 최고 가치가 된 이래 우리가 추방하여야 할 공적 1호였으나 정작 지금의 서구인들에게는 최고의 가치가 된 듯하다. 그들이 현대건축의 키워드로 사용하는 그 ‘불확정적 비움’의 실체를 목격하려면 그들은 우리의 옛 건축 속 마당을 배우면 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도시를 만드는 방법도 그들과 우리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우선 도로를 만들고 그 도로변에 집을 짓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니 도로는 직선이고 같은 폭이 될 수 밖에 없어 사람은 도로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움직여야 한다. 머무르기 원하면 광장을 가야 한다. 도로는 직선이며 광장은 면이라는 개념이 도시를 기능적으로 만들고 집중화하며 계급화한다.
이에 비하면 우리가 만드는 마을의 구성은 다분히 영역적이다. 우리 선조들은 우선 영역을 설정하고 그 속에 집을 둔다. 다른 영역과 만나는 부분은 공적 영역이 되어 길도 되고 놀이터도 되며 광장도 된다. 선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면과 면 면과 공간이 만나는 까닭에 도시의 공간은 변화가 무쌍하다. 딱히 센트랄 파크나 센트랄 플라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관공서 근처가 엄하긴 해도 도심과 부도심, 변두리 등 같은 계급적 등위로 나뉘지 않아 대체로 평등하다. 그러니 부분이 전체보다 못지 않다.
특히 서울 같은 천만 명이 사는 대도시들을 비교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파리나 런던, 뉴욕 심지어 같은 동양이라고 해도 베이징이나 도쿄 같은 도시는 평지 위에 만든 대도시이다. 이들은 도시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 인공건조물을 동원할 수 밖에 없다. 마천루를 세우고 기념탑을 올리며 넓은 광장을 조성해야 도시의 아이덴티티가 생긴다. 그러나 서울은 본디 자연의 산세를 보고 결정된 계획도시여서 이미 서울의 이미지는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인공건조물을 만들어 정체성을 조성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건축물은 이미 설정된 도시이미지인 산세를 거스르지 않도록 고만고만하게 지으면 된다. 그런 고만 고만한 작은 단위들이 집합한 형식이 서울의 건축방법이며 그게 모여 서울의 도시성격을 명확히 구현한다.
물론 규모가 커야 하는 건물도 있게 되기 마련이다. 특히 집단화되고 산업규모가 커진 현대의 건물은 옛 건물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그러나 그 큰 규모의 건축을 지을 때도 나타나는 스케일은 조정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2000년에 완공한 ‘웰콤시티’의 건축이 그러한 배려의 결과이다.
원래의 작은 필지 6개를 통합하여 짓게 된 웰콤시티의 규모였지만 주변의 크기-건축용어로 기존의 urban fabric을 감안하여 네 부분으로 나뉘게끔 내부를 지워 비운다. 이 비워진 부분은 거주인들의 휴게처나 회의장 등으로도 쓰일 수 있겠지만 딱히 기능이 정해져 있지 않다. 앞의 도시와 뒤편의 작은 집들을 매개하는 소통의 공간이어서 이를 도시의 비움 urban void 이라고 불렀다.
이 건축은 표현이 단순하여 오히려 강한 표정을 갖고 있지만 그 비워진 공간 속은 주변의 풍경으로 채워지고 변하면서 긴밀한 연결을 만들며, 그 스케일을 위에서 내려보면 주변과 잘 세팅이 되어있다. 나는 이 또한 우리의 전통공간 전통건축의 연장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개척자 우현 고유섭 선생(1903-1944)은 1940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조선미술문화의 몇낱 성격’이란 논문에서 전통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기셨다.
“ ‘전통’이란 결코 이러한 ‘손에서’ ‘손으로의’ 손쉽게 넘어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피로써’ ‘피를 씻는’ 악전고투를 치러 ‘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요소’화 되거나 시각화 되어 쉽게 주고 받는 게 아니라는 것, 물질이나 가시적 사물이 아니라, 볼 수 없지만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것 즉 우리의 유전인자여서 우리를 다른 이와 결국 다르게 하는 것, 이를 전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통은 우리에게 숙명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