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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이 친구의 콤플렉스야.' 20020311

내가 선생을 처음 대면한 것은 대학 4학년 때인 1974년 가을이었다. 동기생 중 민태규라는 친구의 주선으로 몇 명이 원서동 사옥으로 방문하였다. 그 때 선생은 직원들과 함께 축구시합인가를 하시다 아킬레스 근을 다치셔서 기브스를 한 체 한쪽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계셨는데 그 모습에서 연민은커녕 강한 카리스마를 나는 느끼고 말았다. 바로 그 해 말, 은사이신 김 희춘 교수님의 권유로 선생의 문하에 들어 가게 되었으니 그 권유를 받아 들인 까닭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카리스마에 대한 매력이라고 여긴다.
선생의 카리스마는 나를 포함한 공간의 식구들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의 많은 이들이 같이 느끼고 있는 것이었고 꽤 많은 이들이 그 카리스마에 눌리거나 더러는 부추기며 살아 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오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학창생활을 거칠게 마친 나에게 그 속에서 살아나갈 방법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부닥치고 있던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온갖 모순의 연장선 위에 선생의 카리스마를 올려 놓았을 게다. 치기어린 나는 부단히 그 카리스마를 긁어 대었다. 이를 테면 이랬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적답사를 간다고 하였다.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도 못할 정도로 연일 철야작업을 하던 나는 아침 일찍 버스에 오르고서야 그 당시 막 완공한 현충사가 그 코스의 일부에 끼어 있는 것을 알고 배알이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현충사가 무에냐. 독재자 박정희가 우리를 세뇌하기 위해 이순신을 억지로 끄집어 내어 만든 사이비 종교의 사당 같은 것 아닌가. 버스가 경내에 들어가자 마자 나는 주변 언덕에 올라 팔 베고 누워 있다가 잠들고 말았다. 한참 지난 다음 깨어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어 그냥 모두들 갔을 거라 여기고 혼자 서울 갈 생각으로 어슬렁거리며 정문 쪽으로 나오려니 아뿔싸 버스가 그대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더구나 당시 인솔을 책임 맡으신 권태선 선생은 연신 시계를 보시며 버스 문 앞에 내려 계셨다. 나는 이 일로 몇 달을 가정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훈계를 선생으로부터 회의 때 마다 들어야 했다. 선생이 애지중지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공간사옥 담장에 걸린 무르익은 덩굴이다. 어느날 그 담장이 덩굴의 한 부분이 죽어가는 것을 본 선생이 관리인을 몹시 나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담장이 하나 때문에 사람을 저토록 무시하다니. 이 광경이 나로 하여금 뭔가 적개심을 만들었을 것이다. 결국 며칠 후 어느날 술에 대취 하여서 입구 부분의 담장이 덩굴 큰 부분을 뜯고 말았다. 그 다음 날이다. 흉한 몰골이 된 입구 풍경을 본 동료들과 선배들은 드디어 잘려 나갈 나를 측은히 여기고 있는 가운데 나도 내 행동에 따른 책임을 질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한다.
공간 조직이 중동지역 이란에서 의뢰 받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작업하면서 10명 정도의 아뜨리에 규모에서 100명 단위의 기업규모로 커지고 있을 때, 선생은 구멍가게 같은 경영에서 탈바꿈할 필요를 많은 분들에게서 충고 받으셨다. 여러 움직임이 있고 난 다음 전 직원을 모아서 새로운 경영방침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행정실장 백홍기 감사가 한 직원 당 달성해야 하는 수입금 액수를 발표하는 데 까지 이르렀을 때 나의 분기는 탱천하고 말았다. 선생의 보충설명이 뒤따르고 나서 질문의 시간이 돌아오자 마자 나는 손을 들고 말해 버렸다. ‘ 선생님께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발칙한 발언에 당황하신 선생은 행정실장에게 자세히 다시 설명하라고 이르시고 자리를 뜨시고 말았다. 얼마나 괘씸하셨을까.
또 있다. 매월 첫째 화요일 공간사랑에서 전체회의가 열린다. 70년대 말이었는데 그 당시의 사무실 사정이 어려워지고 있을 때였다. 월급도 곧잘 밀렸고 비대해진 사무실은 본부장이니, 이사니 쓸 데 없는 직책들만 늘어나고 있었다. 전체회의의 분위기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선생의 훈시를 듣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선생께서 마무리 말씀을 하시다가 오버하시고 말았다. 공간에 들어 오려는 사람은 줄 서 있으니 나갈 사람은 언제든지 나가라는 말씀이었다. 나를 답답하게 만든 것은 이 말을 듣고도 아무도 대꾸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발언하기를 기다렸으나 좌중은 침묵이었다, 급기야 참지 못한 나는 입을 열고야 말았다. ‘ 몇 날 며칠을 계속 밤새워 일하는 우리에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기를 아시고 하시는 말입니까.’ 선생께서 즉답을 하셨다. ‘여기가 군대냐. 사기는 무슨 사기냐.’ 나는 말을 이었다. ‘ 군대보다 더 하지요.’
그 사건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그 이후에 선생의 문하를 떠나게 된다. 내가 떠나겠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 선생께서는 강경하게 말리셨다. 이외였다. 선생 답지 않으신 것이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던 나는 1년을 떠나 있다 다시 돌아오고 만다. 맥이 풀린 듯 세월을 허송하는 내 자신에 대해 환멸하고 있기도 했지만 떠나 있는 1년 동안, 떠나 가기를 말리셨던 선생, 정확히 말하면 선생의 카리스마를 끊임 없이 그리워 한 것이 다시 나를 돌아 가게 한 중요한 이유이다. 그렇게 거부하던 선생의 카리스마를 왜 내가 다시 찾고 있었을까.
내가 지방 출장을 갔다가 사무실 인스턴트 카메라를 분실하였을 때다. 공무 중에 일어난 사항이었지만 변상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행정실 박영덕 부장이 공식 회의에서 이를 거론하였다. 선생은 변상 받으라고 지시하셨고 통보를 받은 나는 두 달 월급 치를 가불하여 카메라를 사다 주었다. 이 소식을 들으신 선생은 슬그머니 내 자리로 오셔서 내 주머니에 수표 한 장을 가만히 넣어 주시는 게 아닌가.
이런 일은 비단 나에게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직원들이 경우는 다르지만 선생의 이러한 자상한 배려에 감동 받았을 것이다. 그 큰 카리스마를 가진 선생이 이런 소심함이라니. 그러나 선생은 원래 소심한 분이었음이 틀림이 없다. 어떻게 보면 선생의 카리스마는 소심한 마음을 다중에게 나타내기 싫어 하신 결과일 거라고 여긴다.
그럴 게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러한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건축을 만드셨을 수 있을 것인가. 건축은 원래 대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소심하여 어떻게 보면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어쩔 수 없을 때 그 때가 가장 치열한 작업이 이루어 지는 때이며 그 결과가 예술이다. 더구나 인간의 삶을 만드는 건축인 바에야 소심하고 소심하여야 한다.
한번은 조국정 선생이 이끄신 서울대 건축과 학생들의 건축연구 모임인 ‘토단’에 선생을 모시고 가서 학생들과 대담하던 중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승효상 선배가 선생님을 왕당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그런 카리스마를 가지게 되셨는지요.’ 선생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셨다. ‘그건 이 친구의 콤플렉스야.’

그렇다. 선생에 대한 우리들의 열등의식이었다. 선생이 가지셨던 안목과 신념, 탁월한 미의식, 근사한 삶의 모습, 그 모든 것에 대한 열등감에 우리는 사로잡혀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 없이 선생을 사숙하게 한 근거이며 나로 하여금 수도 없이 많은 밤을 하얗게 세우게 하고 세상과 절연한 듯 내 젊은 날들을 공간 사옥 내에 쏟아 붙게 한 이유일 게다. 이를 넘고자 했었다. 그러나 선생은 가셨으니 내 평생 이 선생에 대한 열등의식을 극복하지 못하는 바 되어 있음을 오늘도 탄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