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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영화가 되는 작은 도시- 명필름 파주사옥 20131009

"영화란 무엇인가"를 쓴 앙드레 바젱은 영화를 기술이 아닌 관념의 세계라고 하였다. 뤼미에르 형제가 기술적 발명은 했지만 그것으로 영화가 시작되진 않았다는 얘기다. 가상이든 실재든 현실의 세계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복제해서 미학적, 심리적 관념과 관계한 후 이를 시간 속에 나열한 것이며, 더러는 몽타주라는 수법을 통해 그 시간 속에 공간마저 추상적으로 조립한 게 영화라고 보면 될까. 아무튼 영화는 우리의 현실에 개입해서 우리 삶의 지평을 넓히고 깊게 하며 우리의 삶과 존재를 풍요롭게 해왔다. 영화제작사라는 집단은 그래서 한 사업체며 이익단체이기 전에 우리 삶을 아웃사이더 입장에서 쳐다볼 수 있는 이들이 모인 곳일 게라는 선입관념이 든 것이다. 그게 이 명필름사옥의 설계를 시작하면서 가졌던 생각이었다.


명필름은, 꽤 오래 전의 '접속'에서 최근의 '건축학개론'까지 많은 문제작과 흥행작을 만들어 선보인 비교적 젊은 영화제작사이다. 얼마간이든, 우리네 척박한 영화환경에서 성공의 스토리를 쓴 영화제작자라고 할 수 있다. 파주에 터를 다시 잡은 그들은 영화제작사 기능의 건물만을 짓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이 땅의 가파른 영화환경을 개선 하고자 영화학교를 만들어 그 기능을 담고자 했으며, 외부인들에게도 개방하는 공연과 집회의 다목적 공간과 전시장을 수용하고자 했고 제법 고급스러운 레스토랑까지 건물에 넣고 싶어 했다. 또한 개인의 주택을 함께 짓는 것은 물론 설립될 영화학교의 학생이나 장기 방문객을 위한 기숙사와 게스트룸까지 포함하고자 했으니, 생산과 소비 그리고 문화와 거주가 있는 이 복합적 기능은 건물적 차원에서 접근할 일이 아니었다. 어떤 작은 도시를 설계해야 하는 일이 본질이었고 그것도 영화라는 상상과 허구(어쩌면 욕망)의 세계를 현실 속에 구축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였다.


파주출판영상도시는 파주출판도시의 성공을 바탕으로 2단계 사업으로 수립된 문화산업공동체이다. 이런 류의 집단적 공동체는 파주출판도시로서 이미 전 세계에 없는 일이었다. 파주출판도시의 출현은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지금도 출판인은 물론 건축과 도시 그리고 문화와 관련된 세계인들의 여전한 관찰과 학습의 대상이며, 이 도시의 지속에 대한 관심은 코디네이터 직책을 수행한 바 있는 나에게 늘 던져지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를 이어 영상이 추가된 문화공동체를 만든다는 일은 더욱 전대미문의 대역사임에 틀림이 없다. 출판도시를 만들 때에도 그랬다. 단일 목적의 집단이 가질 수 있는 배타성이 우려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폐쇄된 단지가 아니라 보편성을 가져야 하는 도시라고 주장했으며 거기에 공동성을 부여하여 열린 사회로 나타나자고 수없이 외친 10년을 넘기면서 내 힘을 소진시켰다. 도시라는 게 완성되는 물체가 아니다. 늘 변화하고 생성하는 도시는 마치 생물체 같아서 거주자의 의지에 의해 선한 도시도 되고 열악한 곳으로도 변한다. 도시의 완성이란 어쩌면 몰락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 게다. '푸루이트 이고 주거단지' 처럼 폭력적 도시상황이 극도로 치달아 결국 지은 지 불과 17년 만에 폭파로 몰락하여 그 도시의 최후를 완성하기도 하고, 폼페이처럼 화산의 폭발로 번영과 영화의 정점에 섰던 도시의 한 생애가 마감하기도 한다. 이미 성공적으로 변화해가는 출판도시에 이어서 지어지는 영상출판도시인만큼 더 진보된 틀을 갖출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지만, 이곳에도 출판도시의 1단계처럼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니 주어진 단지계획이다. 내게는 용납할 수 없는 계획이었으며 특히 시대착오적이며 그 인습적 도로체계는 아무리 건축형식을 바꾼다고 하여도 불구의 형태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출판도시의 코디네이터로 내가 개입한 1998년의 때는 이미 그 불합리한 도로가 착공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1단계 출판도시의 휑한 분위기는 그런 전 시대적 도로체계가 낳은 산물인데, 이제는 시간이 흘러 이를 조정할 수도 있었겠건만 속절없이 1단계처럼 2단계도 진행되었고 이미 코디네이터 일을 놓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명필름 사옥의 건축은 단일 건물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를 가지는 도시적 구성이 더욱 필요하다고 여겼으며 이의 구현이 중요한 목표였다.


2단계를 위한 건축지침에서도 차량 위주로 설계된 불합리한 도로체계의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임의로 보행자 위주의 내부적 도로를 설정하고 있었다.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체의 매스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를 이 작은 도시의 주된 광장으로 삼아 어떤 누구도 자유롭게 만나고 헤어지며 머무르게 하였다. 이 광장은 인접해 있는 대지와도 긴밀히 연결되도록 접근로를 만들었으며 휘어지는 도로변에 수목이 있는 공원을 두어 이 작은 도시의 공공영역을 이루게 한다. 두 부분으로 된 매스는 상부의 브리지와 데크로 연결되어 수직적 동선을 통해 이 작은 도시내의 광장과 도로에서 행해지는 행위들을 서로 목격하고 반응할 수 있다. 더구나 광장에 면한 주된 매스의 면을 투명한 유리벽으로 세워 그 속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행위를 외부에 노출시켰으니 풍요로운 삶의 풍경이 일구어 질 것이다. 바람직한 것은 이 투명한 벽체가 스스로 이곳에서 제작되는 영화의 내용을 전달하는 미디어기능을 가지면, 이 현실의 풍경에 가상의 풍경이 더해서 더욱 풍부하고 의미 있는 풍경이 될 것이라 여겨 이에 대한 제안도 한 바 있으니 실현될 것으로 안다. 내부는 더욱 도시적이다. 다양한 기능의 공간들이 배치된 속으로 도로 같은 통로들이 관통하며 곳곳에 작은 공원과 휴게의 공간이 있다. 물론 모두가 외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두가 서로에게 개방되어 있다. 상부에 있는 주거는 개인적 영역이어서 그 프라이버시가 최대한 보장되도록 하였다. 이 경우에도 가족간에 이루어지는 세계 또한 공동체이어서 그 속에서도 여러 층위를 갖는 공간들이 있다. 그러니 이 건축의 공간이 갖는 층위의 다양함은 대단히 크다.


콘크리트 자체가 구조재인 동시에 외부의 마감재가 되었다. 콘크리트는 로마인들이 발명한 재료이니 그 역사가 2천 년이 되었지만 이 만큼 진정성이 있는 물성의 재료가 없다. 만드는 이들의 기술과 성실, 자연이 주는 조건과 시간이 만드는 형성과정 그리고 이 결과에 대한 기다림이 내게는 어쩌면 종교적 의식처럼 늘 보인다. 그런 과정의 결과로서 받는 형상은 그게 좋든 나쁘든 나는 그 상태로서 늘 만족이다. 결과가 나빠도 그 자체로 나를 둘러싼 사회의 조건에 대한 반응이고 증언이며 그대로 나타내게 하면 정직한 건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정직한 건축이 우리를 선하게 한다. 그리고 이 재료는 디테일 처리만 잘하면 흘러가는 시간을 그대로 담아 변하며, 원한다면 거의 영구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영구적이되 시간마다 변하는 건축, 헛된 꿈이어도 늘 꾸어야 하는 건축의 목표가 아닌가. 앙드레 바젱도 영화는 순간적 사진의 객관성을 시간 속에 완성시키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더욱 영화사 건물에 맞는다.


이 건축은 그래서 늘 변하는 풍경으로 존재한다. 견고하게 땅을 딛고 서 있지만 그 건물은 인프라일 뿐이며 그 견고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도시적 풍경이 수시로 이 건물에 더해지며 바꿀 것이다. 그리고 그 풍경이 적층되어 건물마저 바꾸고 시간을 흘리면 이 작은 도시는 비로서 하나의 건축이 된다. 건축은 건축가가 만드는 게 아니다. 거주자가 이루는 풍경이 건축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제3의 카메라에 담겨서 나오는 영화처럼, 현실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그게 진짜 영화며 진실된 건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건축은 작은 도시이며 스스로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