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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으로, 인간은 거주한다. 20100525

Poetically, man dwells

지난 2000년부터 나는 중국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도시설계 같은 대규모에서 사합원의 재건축 같은 작은 규모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다양한데, 개중에는 호텔이나 5만 평이나 되는 오피스 복합건물을 이미 베이징의 한 복판에 짓기도 하였다. 그래서 급기야 3년 전에는 베이징에 이로재 중국법인을 설립했으며, 이를 기지로 하여 중국 땅의 전대미문적 변화에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 내가 중국 일을 시작한 계기는 현재 중국의 지도적 건축가인 창융허의 초청이었다. 1994년 오사카의 국제회의에서 만난 우리는 이내 의기투합하였고 그 이후 지속적 교류를 가지던 중, 그의 소개로 현재 중국의 가장 성공적인 디벨로퍼인 소호차이나(Sohochina)의 장신(Zhang Xin)여사가 진행한 長城脚下公司(Commune by the Great Wall)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였다. 아시아 의 각 지역에서 초청된 12명의 건축가 중에서 나에게 맡겨진 건물은 중심시설인 클럽하우스였고, 이는 다른 건축가들이 맡은 빌라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 지형도와 프로그램을 건네 받고 도면으로 대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인식한 후, 나는 2000년 12월1일 현장으로 향했고 건축주인 장신여사도 동행하였다. 다른 건축가들과 사정이 달라 나는 다소 늦게 현장을 답사하는 셈이었다. 현장은 만리장성이 전체 부지의 경계가 된 험준한 산의 계곡 속이었으며, 클럽하우스의 큰 규모를 감안하여 계획대지는, 전체 부지가 시작되는 지역의 비교적 평탄한 지대를 찾아 놓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였지만, 클럽하우스로 지목된 대지는 비탈진 면들과 때때로 울창한 수목들이 가로막아 쉽게 한눈에 파악이 되질 않았다. 두리번거리다가 높이 있는 산에 올라 전체 땅을 관조할 필요가 있어 나는 옆의 가파른 경사를 타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온 건축가가 아무 말도 없이 급한 경사면을 오르는 것을 본 건축주가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하이힐을 신었음에도 그녀는 나를 보호할 요량이었는지 따라 올랐다. 대단한 고행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급기야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나는 이미 클럽하우스가 들어설 땅의 성질에 대해 일목요연한 파악을 끝낸 후였다. 신발이 엉망이 되게 한 나를 다소 원망하듯 쳐다본 것은 순간이었고, 그 정상에서 내려다 보며 조감된 그녀의 세계는, 그녀에게 이제껏 땅 위에서 투시도적으로 본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곧이어 연신 탄성을 지르며 이곳 저곳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100만평이 넘는 땅에 대해 모르던 것을 이해하게 된 듯 하였다. 그 땅의 내밀한 언어를 드디어 듣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산 위에 오른 건축가는 내가 혼자라며 건축가마다 작업을 시작하는 방법이 너무도 다르다고도 했다. ■ 아무튼 나는 건축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 자리에서 몇 가지 스케치를 하였다. 내 오랜 건축이력에서도 드문 경우지만, 이 스케치는 바로 도면화되었고 그대로 지어지게 되었다. ■ 15년 전에 ‘빈자의 미학’이라는 작은 책을 펴내면서 그 속에 바른 건축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요소를 들어 설명한 적이 있다. 합목적성과 장소성 그리고 시대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불변하는 하나가-다소 추가적 설명이 필요하지만- 장소성이라고 할 수 있다. ■ 기능이나 프로그램에 관계된 합목적성이라는 것은 지어진 후에도 정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는 것이다. 예컨대 교회로 지어진 건물이 나중에 디스코텍이나 미술관이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이를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시대성이라는 것은 그 말 자체로서 변화를 염두에 둔 것이니 시대에 따라 지난 시대성은 이미 과거의 것으로 진실일 뿐이며 지금의 시각에서는 또 다른 시대적 진실을 갖추어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장소는 그 곳에 영구히 존재한다. 물론 그 장소 위에 담기는 사건들이 세월에 따라 더욱 많아져 그 인문적 사회적 생태가 달라지겠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부가되어 풍성해진 것이지 그 땅의 요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땅은 근본적으로 불변하는 존재다. ■ 그래서 믿기로, 건축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땅이며 장소다. 기능과 프로그램은 다만 장소적 특성으로 결정된 건축을 견고히 해주는 것이요, 시대성은 그것에 보편적 가치를 부여하며 정당화 시키는 일이다. 건축은 땅이 가진 내러티브, 그 물리적 인간적 지형의 소산이다. ■ 요즘 내가 건축을 위해 즐겨 쓰는 단어는 ‘지문’이다. 근래 이 제목으로 이 시대 우리의 도시와 건축에 대해 요 근래 줄곧 강의하던 내용을 추려서 책까지 내었다. 이 책에는 서양의 도시와 우리의 도시에 대한 차이점을 역사적 맥락을 통해 설명하는 내용이 많다. 그 차이는 내가 살펴 본 바로는 대단하였다. 즉 서양인들은 도시를 머리 속에서 구상하고 이를 평면으로 파악한 후 이를 평지에서 실현한 반면, 우리의 선조들은 땅을 먼저 이해해야 하고 그 생리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으며, 그 맥락을 다치지 않도록 가만가만히 마을의 구조를 얽고 섞는다. 지맥과 산수, 명당이 그런 말이며 배산임수가 그런 연유다. ■ 유럽의 중요한 도시들의 원형을 추적하면 로마시대 때 세워졌던 시가지가 공통적 핵심인데 이 로마의 식민도시는 원래 카스트라(Castra)라고 하는 로마군의 주둔 캠프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캠프라는 것이 임시적인 것이고 표준화된 것인 만큼, 이 도시 원형은 결국 현지의 땅과는 무관한 다이어그램의 소산이었다. 나중에 르네상스 시절에 유토피아를 꿈꾸며 건설된 ‘이상도시’들은 더욱 다이어그램적이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지에 세워져야 했다. 20세기 들어 세워진 수많은 신도시들도 차별적 지역지구제와 계급적 도로망을 그린 평면의 도시이고 보면, 서양의 도시적 역사는 본디 땅하고는 무관한 이성적 공동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평면 위에 세운 그들은 각자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 죄다 랜드마크가 필수적인 도시요소였고 시각적 상징이 반드시 필요한 공동체였다. ■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산과 계곡과 물길이 이미 아름다운 형상을 만든 땅 위에 지어지는 우리의 마을은 이미 공간적이며 입체적이다. 랜드마크는 인공적인 게 아니라 자연의 산세와 물길이 이루는 풍경이었고, 그 속에 자리하는 집이 땅과 밀착되지 않으면 오히려 죄스러운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잠시 기대어 사는 방편이며, 집의 수명이 다하면 주된 재료인 흙과 나무는 그대로 다시 땅으로 귀속되어 자연과 이윽고 합일되는 이치였으니, 자연을 깔고 뭉개며 세우는 서양의 집과는 그 근본이 다른 것이다. ■ 터무니라는 말을 그 책에서 설명하였다. ‘터-무늬’에서 파생된 이 말은 말 그대로 터에 새겨진 무늬를 뜻한다. 터무니없다는 것이 근거 없다는 말이고 보면, 터에 새겨진 무늬를 몽땅 지우고 백지 위에 다시 짓는 재개발 같은 사업은 터무니없는 사업이요, 그 결과로 얻어져 판에 박은 아파트에 사는 삶은 터무니없는 삶이지 않은가. 그래서 유목민처럼 오늘날 우리의 삶이 부유하는 것일 게다. ■ 이 터무니를 한자말로 지문地紋이라고 고치고, 다시 문양을 나타내는 단어를 내용을 뜻하는 글 文으로 바꾼 게 地文이다. 사실 땅은 엄청나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자연이 그 생성과 변화를 기록하였고 더러는 인간이 그 굴곡된 삶을 통하여 사건과 변천을 기록한 역사다. 그래서 땅마다 다 다르며 그 내용도 마치 인간의 손금과 지문처럼 죄다 다르다. 뿐만 아니다. 땅은 여전히 우리의 새로운 기록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땅의 생기를 알았고 풍수와 오행을 논하며 조심스레 집을 지었던 것이다. 서양처럼 기공식을 땅을 부순다(ground breaking)라고 하지 않고 개토(ground opening)한다고 했으니, 본시 땅은 경건하다고 믿은 까닭이었다. ■ 나는 땅을 지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건축의 모든 단서는 결국 땅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새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그 땅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설계를 착수하기 위해서는 땅을 가보는 일이 나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며, 그 땅을 처음 대하는 순간은 항상 벅차다. 어떤 곳은 이제껏 쌓은 내밀한 기록을 봇물처럼 풀어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땅은 좀체 그 비밀을 들려주지 않는다. 영감도 소용없고 경험과 지식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닫힌 땅은 건축가에게는 고통이지만 건축가라면 부둥켜 안아야 할 업보다. 요행히 땅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 그 이야기의 결에 맞추어 지금 필요한 희망적 삶을 덧대어 그리게 되면 설계가 물 흐르듯 끝나게 된다. 그래서, 건축가로서의 건축의지라는 게 어쩌면 헛되다고 여기고도 있다. 건축가의 직능이란 게 그 장소가 원하는 내용을 경청하고 그를 시각화하는 일이라는 수잔 랭거의 말에 동의한다. ■ 하이데커는 거주한다는 것은 개인과 세상과의 평화로운 조화라고 했다. 그는 또, 거주함을 통해 우리는 존재하며, 그 거주는 건축함으로 장소에 새기는 일이라고도 했다. 장소에 새기는 것, 바로 또 하나의 지문을 덧대는 일이다. 그게 우리가 존재하고 지속하는 방식이며, 그 터무니를 통해 지속하는 우리 삶의 존엄성을 획득하는 일이 요즘 나를 매료시키고 있는 건축방식이다. ■ 하이데커는 휠더린의 싯구를 인용하며 덧붙인다. ‘시적으로 인간은 거주한다. (Poetically, man dwells.)’ 우리의 지적 감수성을 터트리게 하는 이 말이 가히 근사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