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주택을 설계하는 일은 다른 건축과는 사뭇 상황이 다르다. 일반적인 건축은 그 건축의 소유가 누구이든지 그 사용자는 결국 다중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설계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인 그 다중의 삶에 대한 문제를 자신 또한 다중의 하나인 건축가가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해답을 구할 수도 있다. 평소에 갈고 닦은 그의 건축 철학이라면 이 때 이를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단독주택은 다른 이가 사는 것을 전제한다. 그 집은 새 집에서의 새 삶에 대한 기대가 이만 저만이 아닌 이들이 살게 되는 집이며, 더러는 남들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되어야 되는 일도 일어나는 은밀한 곳이다. 이런 집을 설계한다는 것은 설계를 맡고 의뢰하는 건축가와 건축주의 관계가 여간 긴밀하지 않으면 애초부터 될 일이 아니다.
진부한 얘기지만, 건축가는 건축주의 삶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담뿍해야 하며, 건축주는 그들의 삶을 의탁할 수 밖에 없는 건축가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단독 주택에서는 어떤 건축에서 보다 절실하다. 따라서 이런 건축주와 건축가가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깊은 인연이나 예정에서 비롯된 해후일 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는 주택을 설계하게 되는 일이 쉽지가 않다. 세간에 제법 회자되어 온 수졸당을 지은 지 5년이 넘도록 새로운 주택을 지을 기회가 좀처럼 없었던 게 이를 증명한다.
건축주
97년 가을 통인 김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어느 아는 분이 시골에 주택을 지으려 하는데 내가 꼭 설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내가 건축주를 가리는 못된 습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이내 한 부인과 통화를 하게 되고 만나기로 약속한다. 중년의 후반에 들어선 듯 보이는 한 부부와 약속 장소인 워커힐 미술관에서 만나서 현장으로 향했다. 차 속에서 대강의 내용을 듣게 되었다. 공직에서 물러나 개인 일을 하는 중년의 신사와 그림을 그리는 부인이 살게 되는 집이며 주말주택이 아니라 일상을 보낼 수 있는 집이 될 것이며, 가능하면 작은 집을 원한다고 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나는 이 부부의 심미안이 상당함을 느끼게 되었고 이는 그 후 여러 차례 만나는 동안 실제 확인하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의 전통적 아름다움에 대한 혜안뿐 아니라 식생에 대한 광범위한 그들의 상식으로 나는 오히려 여러 가지 지식을 얻기도 했고 또 식물도감까지 뒤적여 기억해 놓지 않으면 그들의 상상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대지
대지는 워커힐에서 40분 정도 차를 몰면 도달하는 거리였지만 국도에서 벗어나 굽이쳐 들어가게 된 장소는 마치 깊은 산 속을 연상시킬 만큼 위요 되어 있다. 그 곳엔 이미. 4채의 집이 소위 전형적인 탈도시주택처럼 있었고 우리의 땅은 이 집들을 거쳐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였다.
전체적으로 넓은 부지가 아니어서 주변의 산들이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다이나믹한 풍경을 만들고 있다. 뒤의 북쪽으로는 높지는 않지만 충분히 기댈 수 있는 산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깊이 트인 이 땅에 오르면 멀리 북한강의 자락과 그 주변의 마을들이 실루엣으로 보이는데 맑을 때는 브뤼겔의 그림처럼 보인다.
땅에 관한 여러 설명을 들은 후 나는 이 땅을 이리저리 소요하다가 벌써 집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고 머쓱해 했다. 대개의 경우 현장을 보자마자 건축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는 것은 나에게뿐 아니라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일 게다. 그러나 간혹 뜻하지 않게 그런 행운이 섬광처럼 다가 올 때가 있다. 이 경우 더러는 건축의 치열한 작업과정을 생각해 볼 때 다행한 일이지만 또한 그것 때문에 그 내용을 반신반의하게 된다.-낮게 펼쳐진 집. – 그 때 그렸던 집이다.
나는 이 집의 이름을 守白堂으로 할 것을 어느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제의했다. 이 이름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대구의 외곽에 있는 옛집의 이름인데 유홍준교수가 나에게 소개해 준 것이었다. 백색을 지키는 집, 비움을 지키는 집, 소위 오기에 충만한 선비가 거처하게 되는 집이라는 뜻일 게다.
나는 그 자리에서 건축주의 호가 현초玄樵 임을 알게 되었다. 시골 늙은이라는 뜻이다. 현초 선생이 거하는 수백당.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문방을 만들게 되면 그 방의 이름은 玄樵居일 것이다.
경계와 영역
경계는 건축에서 참으로 민감한 부분이다. 바깥과 만나는 방법인 이 경계는, 바깥에 대한 이웃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거주인의 의사이며 그 표현이 된다.
비탈진 땅을 부지로 조성하느라고 바위로 쌓아 올린 축대가 가장 눈에 거슬리는 요인이었다. 따라서 길다란 담장이 불가피하게 다시 만들어져야 했고 이를 건축화 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더구나 아주 다이나믹한 지형의 중심을 잡도록 집을 펼쳐 수평의 선을 가지는 것이 긴요하다고 판단하였으므로 이 길다란 담장은 그 크기의 한계를 저절로 만들어 준다. 30m의 길이는 여기에서 비롯하였으며 이 길이 자체가 건축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직교하는 다른 벽면이 필요하게 된다. 그 크기는 지형을 고려하여 15m로 정하였다.
따라서 30m길이와 15m깊이의 프레임이 이 집이 가질 수 있는 지형에 대한 최대의 크기로 판단하였다. 물론 이 건축주가 소유한 땅은 그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그 소유의 경계는 주변 지형의 세력으로 영역이 한정되는 시골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건축을 결정하는 모티브가 되기 어렵다.
건축가의 과업을 명확히 하기 위해 영역의 설계(Territorial Design)라는 말을 쓰게 되면 그 건축의 성격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다른 설계작업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이 집에서는 빌딩디자인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현초선생 부부가 사는 영역을 설계했다고 하는 게 정확한 말이 된다.
12개의 방
지하를 포함하여 60평 크기의 이 집은 12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가 덮여있는 실내의 방이 5개가 있으며 위가 뚫려있는 방, 즉 실외의 방이 7개가 있다. 실내든 실외든 이 12개의 방들은 모두 독립되어 있으며, 더러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또 다른 영역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원칙으로는 한 방이 다른 방에게 종속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두가 하나의 다른 세계이다.
하늘로 뚫려있는 방은 대부분 목적이 없다. 물을 담기도 하고 마루나 흙, 혹은 돌로 덮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공백이다. 이 공백이 마당으로 불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더더구나 정원이나 뜰이나 하는 말은 더욱 마땅치 않다. 마찬가지로 실내의 방들도 비단 욕실이나 주방처럼 어떤 곳은 설비가 있을 수 밖에 없어 그 용도 외는 딱히 없으련만 그래도 그 방들 마저 그런 용도만으로 이해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사실 30m15m의 프레임 속의 공간을 나눈 일이 그렇게 용도를 가정하고 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나눠진 방들에 편의상 이름을 붙여야 했을 때도 한참을 주저했었음을 기억한다.
기초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일 때, 현초 선생은 2층에 방을 하나 만드는 것에 대해 물어왔다. 어디까지나 나의 의사를 100% 존중해 온 터라 그렇게 물어 올 때는 그 방이 참으로 절실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물론 내가 안 된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나를 신뢰하였다. 사실 낮아야 한다는 생각은 뒤 땅의 주인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었는데 설계의 마무리 말엽에 뒤 땅마저 구입을 해버린 지라 그 배려는 소용없게 되었다.
몇 번을 고민한 끝에 그들의 어려운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2층에 다시 실내의 방 하나와 실외의 방 하나가 더하여져서 14개의 방이 된 셈이다. 애초의 생각보다 스케일은 커졌지만 이로써 공간의 풍부함은 배가되었다.
백색
이 집은 흰색의 재료로 되어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요즘 재료 사용에서 제법 자유롭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에서 또 백색을 고집한 이유는 이 백색 위에 많은 그림과 자국이 그려지고 남게 되길 더욱 바랬기 때문이다.
물론 수백당이라고 하는 이미지도 그대로 직역하고 싶어도 했고, 경제성도 간과할 수 없었으며 이 집의 설계 개념의 중요한 키워드인 VOID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기도 하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이 집은 건축이라기 보다는 삶의 형태로 읽혀지길 바랬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물론 그게 큰 의미에서의 건축일 것이라고도 믿는다.
따라서 집의 모양은 이제부터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동헌 ( 桐軒 )
수백당(守白堂)을 지은 지 일년이 되어갈 무렵 집 앞의 한 필지에 일정 면적의 건물을 법적으로 지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지목을 변경할 때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마침 그림을 그리는 수백당 안주인의 작업 공간이 더욱 필요하게 되어서 이를 작업실로 쓰기로 하고 20평의 건축 설계를 다시 의뢰 받게 된다.
수백당의 동편에 위치한 땅은 심하게 경사진 곳이며 더구나 오동나무 네 그루가 필지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무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수백당 주인인 현초(玄樵)선생은 마지 못해 한 그루는 잘라도 된다고 내게 미리 허락을 하였으나 나는 가능하면 자르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때 이 수백당에 부속되는 새로운 한 칸 집의 이름을 동헌(桐軒)이라고 나는 이미 마음 속으로 짓게 된다. 따라서 건물의 배치는 주어진 필지의 경계 내에서 오동나무 네 그루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으로 20평을 채우니 자연스레 평면의 모양이 결정되게 되었다. 오동나무를 피해서 구부러진 평면은 하나의 공간이지만 적당히 내부공간을 구분하게 하고 지세를 따라서 공간이 흐르는 듯한 모습을 만든다. 전체 덩어리도 지세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 수백당의 입구에 서서 보게 되면 이 동헌은 나중에 눈에 띄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보이는 곳은 주로 앞 산의 허리이고 먼 산도 부분만 보일 뿐이었다. 수백당 본채에서 멀리 있는 아래 마을과 아스라한 북한강의 자태를 볼 수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풍경을 가진 것이다. 어쩌면 수백당 본채가 일상적 공간이라면 이 동헌은 비일상적 공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비일상적 공간을 위하여 지극히 계산된 개구부를 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주변의 잡스러운 풍경을 자르게 되었다. 결국 이 집의 안에서 밖을 쳐다보면 적막 강산에 놓인 것처럼 된다.
애초부터 이 동헌의 재료는 수백당의 흰 벽을 연장하지 않기로 하였었다. 이 집마저 흰색의 벽이 되면 안 그래도 크게 보이는 수백당이 원래 규모보다 훨씬 더 과장되게 보일 것이 틀림이 없었다. 또한 이 집은 단시일 내에 지어야 하는 공기와 현장의 사정도 있어서 건식 공법을 택하여야 했으므로 구조와 외벽재료를 철재로 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이는 요즘 코르텐이라는 내후성강판에 대해 매료되어 있는 나의 개인적 취향이 강력히 작용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수백당 본채에서 오후 늦게 동헌을 보면 석양을 받은 코르텐의 표면에 검붉은 색조가 오묘하게 빛날 것을 상상한다. 그것은 신비이다.
이 집이 거의 끝날 무렵 현초선생 부부의 桐軒에 대한 촌평이 나를 몹시 즐겁게 하였다. 이 새로운 집이 이 비탈진 장소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나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이 말을 하였다 하드라도 이 분들은 참으로 내가 듣기를 원하던 말을 골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