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은 방이 되고 싶어 한다. 길은 인간이 만든 최초의 도시시설이며 지붕 없는 집회소이다./루이스 칸
요즘 서울시를 필두로 각 지방자치단체 마다 도시를 ‘디자인’하려 하는 열풍이 일어나고 있다. 급기야 얼마 전, 새 정부에서 디자인코리아라는 이름으로 국가차원에서 이를 주요정책으로 다룬다고 하니 바야흐로 디자인 시대가 도래했음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디자인 사업’을 반겨야 할 나는 근심부터 앞서며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도무지 불안하다. 그들이 갖는 디자인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턱없이 낮은 수준인 것이 그 이유의 첫 번째이며 그로 두고 벌어지는 이권쟁탈이 이때까지 우리가 겪어야 했던 천민적 행태와 다를 바 없는 게 두 번째 이유이고 본말을 전도하고 벌어지는 절차가 그 다음의 이유여서 나는 앞으로 이 땅에서 전개될 ‘디자인사업’이 또 다른 세련된 반달리즘의 추악한 결과가 될까 두려운 것이다. 아니다. 벌써 그 볼 쌍 사나운 꼴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 사실 한 도시의 선진적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그 도시에 서 있는 건축물의 높이나 모양에 결코 있지 않다. 건축물 자체는 서로 아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므로 그들만의 고유한 규약 아래 존재할 터이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은 그 건축물이 한정하는 외부공간의 형상이 중요해진다. 그러므로 그 외부영역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에 따라 도시공동체의 모습이 정해진다. 먼저 하나의 예를 들면 이러하다. 내가 사는 대학로에 수년 전부터 대학로 문화거리 가꾸기인가 뭔가 하는 이름으로 일단의 조형예술가들까지 동원되어 여태까지 북새통을 이루며 작업하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수 십년 된 멀쩡한 가로수를 뽑아내더니 돌덩이로 가로분리대를 만들고(나중에 알고 보니 오토바이 폭주족의 주행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위에 기하학적 형태의 돌덩이를 조각이라고 얹어 놓아 실소를 자아내게 하였다. 게다가 보행가로의 포장을 죄다 뜯고 울긋불긋한 재료로 유치 찬란한 거리 풍경을 그리며 다시 포장한 후, 도무지 쓰레기일 뿐으로 그 가치를 의심하게 하는 조형물을 그 위에 설치하여 안 그래도 복잡한 거리의 통행까지 더욱 번잡하게 하고 만 것이다. 이 천민적 행태의 결과를 두고 문화거리조성이라고 현수막 내 걸고 환호하며 심지어 폭죽 터트리며 축제까지 하였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다. 대학로지역은 원래 단독주택지로 공급된 곳이라 모든 건물이 거의 상업용도로 바뀐 지금에도 주택을 두르던 담장들이 잔존하여 원활한 공간연결을 저해하고 있다. 더욱이 방송통신대학이나 문예진흥원 같은 큰 시설들이 아직도 사납게 담장을 두르고 있어 개방적 문화지대 조성을 지극히 어렵게 하며 건재하고 있다. 길이란 도시의 핏줄 같아서 자유로운 통행의 보장이 도시의 활력을 보장하는 일임이 명백하여 이들의 개방이 지역공간 활성화에 선결적 과제임이 틀림이 없다. 그런데, 거리를 가꾼다고, 소위 ‘디자인’한다고, 이 담장을 캔버스 삼아 펭키칠로 벽화랍시고 그림을 그려대어 조형벽이란 것을 만들었으니 이 벽체들은 이제 그 서 있을 권위를 공인 받고 말은 꼴이 되었다. 따라서 이제 이들은 영원 불멸토록 대학로의 도시공간 연결을 불가능하도록 기념비처럼 서있게 하였었으니 본말을 전도시킨 이게 공공디자인인가? 그들이 벌이는 디자인운동은 엄밀하게 말해서 도시 그라픽운동, 잘 봐줘서 도시 미화운동이지 디자인이라고 보기가 극히 어렵다. 즉 디자인의 의미를 지극히 협의로 해석해서 립스틱 바르고 분칠하는 것 혹은 본체를 가리는 포장지를 예쁘게 만드는 것으로만 착각하고 있다는 의심이 짙은 것이다. 디자인이라는 행위가 사전적 설명으로, 계획을 그리고 형상을 도출하는 것이라면, 그 계획이 중요하고 형상의 내용이 심각한 과제가 되는 것이지 그림 그리고 도출하는 방법이 우선일 수가 없다. 따라서 무엇을, 왜 그려야 할 것인가가 먼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한 그 디자인은 껍데기일 뿐이다. 특히 공공디자인은 도시란 무엇이며 공공영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함의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 디자인은 그야말로 촌부가 속절없이 뒤집어 쓴 분탕칠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 공공디자인에서 흔히 거론되는 대상이 길거리 풍경이다. 어지러운 간판을 정비하고 가로등과 버스정류장 등을 잘 꾸미고 각종 도로정보체계를 근사한 글꼴로 만들어 달면, 혹은 거리에 조형물 하나 설치하면 공공디자인의 완성이라고 여기는 듯 하다. 정작 그 길의 메커니즘에 대한 검증은 토목이나 도시계획에서 다룰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그 길에 대한 공공공간으로서의 기능과 합목적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더욱 중요함에도 이는 디자인이라고 여기지 않는 까닭에 8차선의 도로는 여전히 8차선인 체로 분칠만 한다는 것이다. 혹시 면밀히 검토하면 그 8차선이 나뉘어져서 보도가 확장되고 자전거 도로가 들어서고 꽃길이 들어서서 선적 성분의 도로가 공간적으로 바뀔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디자인의 범위에 들어 있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 게다. 얼마 전 내가 새건협과 협력해서 수행한 영등포구청 앞 도로의 디자인을 담장하면서 보고서에 기술한 몇 문장이 있어 옮겨 적는다.
'선에서 공간으로, 도시의 통로에서 도시의 거실로’
익명성을 전제하여 성립되는 도시는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규약이 필요하다. 그 규약은 도시의 공공영역으로 나타나며, 그 중 도시의 길은 가장 대표적인 공공시설이다. 이 도시의 길이 수 많은 도시민들을 만나고 헤어지게 하며 삶터와 일터를 잇고 도시를 숨쉬게 한다. 그야말로 길은 그 도시공동체의 특성을 가장 명확하게 규정하는 상징이다.
특히 우리에게 길은 단순한 통행의 기능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구불구불하여 그 폭이 일정하지 않았던 우리의 옛길은 애들에게는 때때로 놀이터였으며 때로는 집회장이 되기도 하였고 조금만 넓으면 장터가 되기도 하고 구불어진 곳에는 쉽게 쉼터이기도 했으니 바로 종합된 도시의 공공영역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옛길이 신작로로 곧게 펴지게 되면서 우리의 도시적 생활은 길에서 내몰리고 말았다. 도시의 길은 등급을 가지게 되었고 그 계급에 따라 속도를 제한하였으며 수 많은 붉은 표지판들이 우리를 위협하며 매달리면서 길은 이제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빨리 지나가야 하는 직선으로 변하고 말았다. 더 이상 모험도 없으며 스릴도 없고 가슴 두근거림도 없는 그런 길에서 우리의 귀중한 삶은 질주하는 차량들의 아우성 속에 함몰되고 만 것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직선의 공포스러운 길에서 줄곧 위협당하던 우리들이 더 이상을 참지 못하여 길을 점령하고 차량을 내쫓으며 축제를 연 것이다. 모두들 환호했으니 바로 우리 인간성의 회복이었고 승리였다. 바로 직선의 길을 공간의 길로 바꾼 결과였다.
직선의 길을 먼저 그어 만든 서양의 도시들은 모이기 위해 별도의 광장이 만들어져야 했겠지만 우리의 도시에서는 길 자체가 광장이었고 공공의 마당이었으니, 그 축제의 현장은 우리네 정체성을 확인하는 장소였다.
그러하다. 도시의 길은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소비하는 통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일구는 도시의 거실이어야 하며, 존재하지 않는 선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며 바탕이 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물론 이 프로젝트에서 이 길에 들어선 가로등과 표지판, 택시 정류장 등 모든 시설물들을 죄다 통일된 어휘로 새롭게 만들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가로시설물들이 이 영등포구청 앞 거리를 공간적으로 바꾸기 위한 보조 수단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길의 공간화라는 명제가 집행하는 공무원들에게 생소했던 까닭에 관습적인 저항이 있었고 예산상의 문제로 부분적으로 변경이 있었지만 오랜 설득 끝에 이 거리는 이제 변모를 앞두고 있다. ■ 이탈로 칼비노가 쓴 ‘보이지 않는 도시’라는 소설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쿠빌라이 황제에게 그가 여행한 도시를 설명하는 형식을 빌어 도시란 무엇인가를 감동적으로 기술한 글인데 그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관대하신 쿠빌라이시여, 부질없겠지만 높은 보루에 에워싸인 도시 자이라에 대해 묘사해 보겠습니다. 이 도시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길들의 계단 수가 얼마나 많은지, 주랑의 아치들이 어떤 모양인지, 지붕은 어떤 양철판으로 덮여 있는지 폐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말씀드리는 게 아무것도 말씀드리지 않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도시는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공간의 크기와 과거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시 공간의 크기와 사건들 사이의 관계’- 바로 이 도시공간의 크기가 공공영역의 내용이며 사건들 사이의 관계가 그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공공디자인이라면 우선 도시의 공공영역을 만들고 조직하여 이를 현실 속에 나타내는 것이며, 도시와 그 공공영역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 그렇다면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란 농촌과 다른 공동체이다. 농촌은 혈연을 바탕으로 이루는 공동체여서 서로 누구인지를 잘 안다. 그러나 기회를 찾아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모여드는 도시는 익명성을 전제로 성립되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서로 모르는 이들끼리 순조로운 공동적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인정하는 공동의 규약이 필요하며 그를 문서화한 것이 공공법규며 이를 공간화한 것이 공공영역이다. 즉 거리, 광장, 공원 등으로 이루어지는 공공영역은 우리가 건전한 도시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중요한 공간적 공동규약이라는 것이다. 이 규약이 강압적이면 공공영역도 폭력적 공간이 될 것이고 그 논리가 불확실하면 도시의 공공영역도 파편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파편화되어 접근할 수 없으면 공공영역이 아니다. 공공영역은 서로 연결되어야만 도시민들의 연속적 공공활동을 보장할 수 있으며 이는 바로 도시적 삶을 말한다. 이 공공영역은 그 도시가 어떠한 가치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그 구성의 방법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즉 봉건적 가치를 지배하는 봉건시대에서는 공공영역은 주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위계적 질서를 가지게 되며, 이념에 경도된 도시에서는 지배적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서 또한 공공영역은 봉사하게 된다. 히틀러와 슈페어가 나치즘의 영광을 위해 인민을 도구화한 게르마니아 계획이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다시 이야기 하면, 우리가 어떠한 가치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져야 할 공공영역의 얼개가 달라지며 이로써 우리의 도시적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당연히도 좋은 공공영역을 가지면 그 도시는 좋은 사회를 만들 것이다. 선진도시라는 곳의 공공영역의 조직을 그린 지도를 보면 도시 전역에 골고루 퍼져 힘차게 박동하는 핏줄과 그 흐름 같아서 가 보지 않아도 얼마나 그 도시적 삶이 건강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도시의 공공영역을 그리면 어떤 모습이 될까. 혹 서로 떨어져 바다에 떠 있는 군도처럼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되거나 지극히 편향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가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는 이유가 우리가 가진 잘못된 공공영역 때문 아닐까? 의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이 공공영역들은 대체로 비어있게 마련이다. 마치 도시의 서로 다른 무대와 같다. 즉 비어있지만 등장하는 인물들로 인해 다양한 도시풍경이 생겨나게 하기 위한 바탕적 공간이며 배경이라는 것이다. 설혹 어떤 사건이 없어 채워지지 않고 있다 하여도 그 공간이 갖는 잠재성으로 인해 도시민은 풍성한 도시적 삶의 상상을 하게 되며 그 기억을 적층하면서 꿈과 미래를 키운다. 이 비움의 공간이 더욱 풍성한 도시의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삶을 유도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지나가고 스치며 모이고 헤어지며 머무르고 즐기며 나누고 잇는 도시적 삶을 이끄는,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한 암시적인 도시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서로 모르는 수없이 많은 이들이 만드는 삶을 쉴 새 없이 쌓고 허물며 그 기억을 적층하는 곳, 이게 도시의 비움 urban void이며 도시적 삶의 인프라 스트락츄어인 것이며 이를 만드는 게 공공디자인의 본질적 형상이다. 때로는 아른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가로등과 벤치에서, 때로는 은근히 기울어진 광장에서, 때로는 불현듯 넓혀진 도로 한 귀퉁이에서 특별한 도시적 삶이 생성될 수 있다. 다시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 한 페이지를 소개한다.
‘도시와 기억 2
오랜 시간 말을 타고 황무지를 달린 사람은 도시를 갈망합니다. 그는 마침내 저택마다 조개껍질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장식된 나선형계단이 있고, 완벽한 망원경과 바이올린이 제작되고, 이방인이 두 여인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면 언제나 세 번째 여인을 만나게 되고, 닭싸움이 늘 노름꾼들의 유혈 낭자한 싸움으로 변질되고 마는 도시, 이시도라에 도착합니다. 도시를 갈망했을 때 그는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생각했습니다……광장에서 노인들이 빙 둘러앉아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구경합니다. 그는 노인들 옆에 나란히 앉습니다. 욕망은 이미 추억이 되었습니다.’
■ 공공디자인이라는 것, 도시의 공공영역을 계획하고 꾸미는 것은 우리의 도시적 삶을 새롭게 구성하고 과거의 기억에 덧대는 일이다. 따라서 분칠하거나 장식하는 일은 최후의 절차이며 사실 이는 아니 하여도 그만이고 때로는 하지 않을수록 좋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도시공동체를 원하는 가에 있다. 도시를 면밀히 관찰하고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며 도시를 재조직하는 일, 우리의 일상이 항상 새로우며 창조적으로 보이도록 도시 속에 새로움을 발견케 하는 일, 그래서 우리의 기억을 다듬어 일상의 도시적 장치 속에 제공하는 일, 이런 일들이 공공디자인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이는 지극히 전문적인 일이며, 대중의 감각적 욕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신념과 선각적 예지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여론의 향배에 따라 도시의 얼개를 결정하는 일, 더구나 자본의 이해에 따라 도시구조가 바뀌고 이를 호도하기 위해 단장 분칠하는 일은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 미래를 꿈꾸는 예술가가 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예쁜 삶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을 지어야 할 건축가가 할 일은 더더구나 아닌 것이다. ‘뺑키쟁이’들이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