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우리들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축가라면 저는 단연코 르 코르뷔제(1887-1965)를 내세웁니다. 19세기말 20세기초, 프랑스의 시민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세계는 정신적 물질적 자유의 분위기에 휩싸였지만 중세의 틀에 갇혀 있던 문화 특히 건축과 도시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며 방황하던 이때를 역사가들은 ‘세기말의 위기(Fin de Siècle)’라 부릅니다. 그 무렵 스위스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의 여행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눈 뜨며 파리에 정착한 코르뷔제는 이전과 전혀 다른 건축으로 세상을 혁명한 건축가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 많은 부분이 그의 독보적 생각에 기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몇가지만 간단히 소개합니다.
첫째는, 건축이 과도한 장식의 옛날 양식만을 답습하던 당시 그는 바닥판과 기둥과 계단만으로 이뤄진 그림으로 건축의 본질을 일깨웠습니다. 혁신적 집이라는 뜻의 ‘돔이노(Dom-Ino)’로 이름한 이 도형이 오늘날 소위 슬라브집의 원조로 모더니즘 건축의 기본형식이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기계산업의 발달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지만 제품의 크기가 들쑥날쑥할 때, 그는 인체를 기준으로 ‘모듈라’라는 표준치수를 발표하여 규격설계 규격생산의 길을 열게 하였습니다. 세째는, 도시인구 폭증으로 고층 주거시설이 필요하자 공동주택의 전범을 만듭니다. 마르세유에 지은 56미터 높이의 337세대 공동주택 ‘유니테다비타시옹’은 단일 건물이지만 그 속에 상업시설과 교육시설, 놀이터 그리고 호텔까지 갖춘 작은 도시로 나타났습니다. 지은 지 70년이 지난 이 공동주택은, 공동주택이 아니라 부동산집합체일 뿐인 우리의 요즘 아파트보다 훨씬 진보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 그가 우리 삶에 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도시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펜데믹보다 훨씬 처참한 질병인 스페인독감이 백년전에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그 당시 세계인구 3분의 1인 5억명이 감염되고 그 중 5천만명이 사망한 이 대재앙이, 폭증한 인구를 감당하지 못한 열악한 중세도시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파악한 그는 여러 건축가들과 협력하며 새로운 도시를 제안합니다. 기능과 효율을 바탕으로 구획된 그의 도시는 오늘날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등의 용도별로 나누는 도시계획의 근간이 되어 우리 사는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이 정도면 20세기를 만든 건축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이러한 신념으로 많은 건축과 도시를 남겼는데, 죽은 지 50년이 지난 2016년, 유네스코는 그의 건축 중 무려 17개를 선정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건축가인 그는 모더니즘 건축의 기술과 개념을 확립해 건축은 물론 도시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밝혔습니다. 한 건축가의 작업으로서는 초유의 일입니다
그 중에서 두 건축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롱샹성당과 라투레트수도원이라는 희대의 걸작입니다. 많은 이들이 형태가 특별한 롱샹성당을 선호하며 대표작이라고 하지만, 그의 궤적을 오래전부터 좇은 저는 라투레트수도원이 20세기 최고의 건축이라고 여깁니다. 프랑스 리옹에서 서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수도원을 저는 30년전에 처음 방문하였습니다. 그때 받은 감동을 제가 쓴 책 ‘묵상’에 기록한 게 있어 여기 옮깁니다.
“내가 이 건축을 처음 보았던 1991년 여름, 나는 이 건축을 수도 없이 베끼고 외웠음으로 누구보다 이 건축에 대해 자신이 있었고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이 검은 공간으로 발을 디딘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빠졌다. 내 상상은 관습이었고 지식은 헛된 것이었다. 다른 세계였다. 이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폭 12미터 길이 42미터 높이 12미터? 아니었다. 공간은 무한이었다. 암흑. 그 속을 뚫고 비수처럼 들어 온 빛은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의 조화를 부리며 암흑을 농락했다. 그때마다 벽은 거친 표정을 바꾸며 숨을 쉬었고 바닥은 때에 따라 내려 앉는 빛을 산란시키며 모든 순간을 받았다. 견고했다. 그리고 가운데 올려진 단 위에 놓인 제단은 마치 태고의 고원 위에 놓인 최초의 돌 같이 빛났다. 음성이 들렸다. 나는 빛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수도사들의 장의자 끝에 몸을 기탁하면 드디어 침묵의 세계로 영혼과 육체는 같이 탐닉한다. 오로지 사유 만이 깊게 흐르는데 끝내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오르는 소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수도원은, 한번 가 보시라는 말 외에는 더 이상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요즘도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일반인의 숙박도 허용해서 운이 좋으면 머무실 수도 있으니 꼭 가서 이 놀라운 공간을 경험하실 것을 권합니다.
그런데, 이 건축이 코르뷔제라는 천재적 건축가의 작업이지만 이를 이루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은 이 분을 소개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알랑 쿠트리에(1897-1954) 신부. 1차대전 중에 부상으로 후송 당한 그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 신부의 길을 걷습니다. 워낙 미술에 조예가 깊어 성미술에서 성당건축에 이르기까지 전쟁 후의 새로운 종교미술에 큰 공헌을 하신 분입니다. 코르뷔제의 건축행보를 지켜보던 그는 1950년, 무신론자인 코르뷔제를 굳이 찾아가 롱샹성당 설계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20세기 기계미학을 찬양하며 항상 직각과 직선의 형태로만 설계해왔던 코르뷔제였는데, 전쟁을 통해 기계가 대량인명학살의 도구로 쓰인 것을 보고 대각성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 시기에 설계한 롱샹성당, 놀랍게도 부정형의 사선과 곡선으로 나타난 이 건축은 직선의 성당을 기대한 이들을 여지없이 배반했습니다. 모더니즘의 아버지인 그의 배신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형태와 공간의 이 성당을 보고는 모두가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다음 작업을 모두가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롱샹성당이 지어지고 있을 때, 리옹 근처에 수도원을 짓는다는 소식을 듣게 된 쿠튀리에신부는 수도회 감독에게 이미 허가까지 받은 설계인데도 건축가를 바꿀 것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이 무리한 요구로 뜨거운 논쟁이 일었지만 쿠튀리에신부의 태도는 너무도 강력했으며 수도회가 일을 그냥 진행하기에는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 결국 표결로 코르뷔제에게 설계를 다시 맡기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맡은 코르뷔제에게 쿠튀리에 신부는, 프로방스에 있는 르토로네라는 옛날 수도원을 가보고 참조해 설계할 것을 당부합니다. 어떻게 보면 모욕적 요구였습니다. 코르뷔제는 그 당시 예순 여섯 나이의 세계적 거장이었고 더구나 롱샹의 설계로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는 자기보다 열살 어린 신부의 말에 순종하고 12세기에 지은 르토로네수도원을 찾습니다.
그는 르토로네수도원에서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 로마네스크 건축을 가리켜 진실의 건축이라고 하며 책까지 내고, 라투레트수도원의 설계에서 롱샹성당의 성취를 버리고 맙니다. 오히려 그가 오래전 건축을 시작하며 선언했던 각종 직선의 원칙과 질서들을 다시 끄집어 내며 그 폐허의 수도원 건축이 이루었던 정신에 투항하고 그 건축의 요소와 공간을 받아들였습니다. 완전한 항복. 그렇습니다. 바로 그 지점이, 20세기 최고의 건축 라투레트수도원을 그릴 수 있었던 바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쿠튀리에 신부의 혜안과 의지가 없었다면 이 위대한 창작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니 좋은 건축은 좋은 건축가가 만들지만 좋은 건축가는 좋은 건축주가 만듭니다.
쿠튀리에 신부는 라투레트수도원을 짓기도 전에 선종하셨습니다. 다시 이 수도원을 방문하게 되면 신부님을 기억하며 감사기도를 꼭 올려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