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의 무덤

중앙일보 '중앙시평'

2018. 2. 24

지난 1년간의 빈 생활을 끝내면서 중앙묘지공원(Zentralfriedhof Wien)을 마지막 여정으로 삼아 이달 초에 방문했다. 빈에는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의 묘역이 시내 곳곳에 70군데나 있는 만큼 일상에서도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서쪽의 히칭 묘역을 지날 때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오토 바그너를 만나고 북측 그린칭에서는 구스타프 말러를 보게 된다. 시내 한복판 합스부르크 왕가 묘역에 빽빽이 배열된 황제들의 관 사이에서 만나는 역사의 무상이나 유서 깊은 성당들의 지하 묘역에서 배우는 삶의 경건들은 대단히 각별하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버려진 주검들을 모은 도나우 강변 무명 묘역(Friedhof der Namenlosen)에 가면 그 풍경마저 거칠어 우리 삶의 허망을 그대로 껴안고 만다. 60만 평으로 가장 큰 묘역인 남동쪽 중앙묘지공원은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즐비하지만 세기의 음악가들이 집단으로 누워 있어 더 유명하다. 베토벤, 슈베르트, 살리에리, 주페, 슈트라우스, 브람스…. 심지어 주검을 찾지 못한 모차르트의 기념비까지 여기 있으니 음악 하는 이들에게는 필수의 순례지며 성지일 게다.

내가 찾아야 하는 곳이 있었다. 내 건축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게 한 아돌프 로스. 20세기 초, 시대 변화를 외면하고 옛 양식의 미망에서 길을 잃은 도시와 건축을 향해 장식은 죄악이라며 외친 건축가였으며 모더니즘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묘역의 담벼락 맨 끝에 주변의 화려한 비석들을 책망하듯 장식 없는 육각의 돌에 붉은 이름으로 단호히 새겨져 있었고, 겨울 묘역의 풍경은 그 침묵으로 더없이 맑았다. 나로서 이보다 더한 마지막 여정은 없었다.

그렇게 느낀 것에는 그 며칠 전 사라예보에 다녀온 탓이 컸다. 젊은 건축가들의 초청을 받아 간 강의장에는 예상외의 열기가 가득했고 그들의 몰두는 강의 내내 이어져 나를 줄곧 긴장시켰다. 왜 이렇게 진지할까? 그 의문은 다음 날 이 도시를 탐방하면서 풀렸다. 사라예보는 19세의 청년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자를 저격해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키고 결국 제국의 시대를 막 내리게 한 역사적 현장이 있는 도시다. 그 현장을 끼고 동서로 흐르는 밀라츠카 강의 남과 북쪽으로 솟은 높은 산들 사이에 형성된 도시여서, 40만 명의 인구인데도 밀도가 높았다. 산지를 배경으로 하는 도시에는 큰 건물이 들어서기가 어렵다. 고만고만한 건물들로 집합된 풍경이 서울과 흡사해 쉽게 친밀감이 든다. 시내에는 종교시설이 눈에 띄게 많았는데 교회와 성당과 모스크, 시나고그까지 서로 다른 성소들이 사이좋게 이웃해 있어 발칸의 예루살렘으로도 불린다고 했다.

내 눈길을 가장 끈 것은 무덤들이었다. 내가 묘역에 관심이 많은 건축가여서 그럴 거라고 여기지 마시라. 이곳 묘역은 너무도 특별했다. 곳곳에 아니 함부로 아무 데나 있었다. 높은 산턱에도 있고, 마을 어귀에, 광장에, 공원에도 팻말도 없이 있다. 심지어는 길가에도 그냥 있고, 교회 마당에도, 버려진 뒤뜰에도 묘지와 묘비가 있었다. 묘지는 여기서 일상의 풍경이어서 그들은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산다. 지난 시절 내전으로 이웃들이 죽는 것을 보아야 했던 탓일까, 강대국의 주변 도시로 살 수밖에 없어서도 그럴 것이다. 절박한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에 수많은 교회와 기도처가 필요하며, 따라서 조그마한 일에도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며 범사에도 진지한 그들이라, 한국에서 온 작은 건축가에게도 그토록 몰두했음이 틀림없었다.
우리의 도시들은 어떨까? 묘역이 없는 도시는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을 게다.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곳이지만 묘지는 혐오시설로 간주하여 집값 떨어질 걱정에 저 멀리 도시 밖으로 쫓아버렸고, 성당마저 지하를 납골당이 아니라 상업시설로 채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며 갈 곳도 없이 산다. 그러니 삶은 가치가 없어 하루에도 마흔 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내 삶이 가치 없으니 남의 삶도 쉽게 멸시하고 적대한 탓에 우리는 늘 각박한 것 아닌가?

내 강의가 끝난 다음, 앞줄에 앉은 중년의 여성이 이렇게 질문하였다. “이 물신의 시대를 우리는 어떤 건축과 삶으로 맞서야 할까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 질문이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그리고 불현듯 아돌프 로스가 떠올랐다. 내 건축을 새롭게 하겠다고 서울을 떠났지만 전혀 그대로였으니 빈에 돌아가 그를 다시 찾아 물어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