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연말에 있다는 게 절묘하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미사가 원래 뜻이라지만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사랑과 감사를 더해 한 해를 평화롭게 마무리 짓게 하기 때문이다. 올해 내가 거주하는 오스트리아 빈은 11월 중순이면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해 요즘에 이르면 온 도시가 크리스마스 때문에 사는 듯 축제의 풍경으로 가득하다.
2000여 년 전에 태어나 세계 역사를 바꾸고 지금도 인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수. 그는 33년의 생애를 살았지만 공생애라는 마지막 3년 외에는 기록이 도무지 없다.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어릴 적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눈 게 전부인데, 그 당시 서른의 나이면 사회적으로 완성되었을 연륜이며, 영민했다고 하니 직업적으로도 성공했을 게다. 아버지 요셉의 직업은 성경에 목수라고 나와 있어 이를 가업으로 이었을 예수도 목수라고 단정해 왔다. 사실일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했지만 가나안은 대체적으로 토양이 척박해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다. 감람나무로 불리며 성경에 자주 나오는 올리브나무는 목재로는 쓸 만하지 못하며 큰 목재는 레바논에서 수입한다고 성경에도 써 있어, 그 옛날 이스라엘 땅에 목수라는 직업이 있기가 어렵다. 더구나 예수의 고향 나사렛은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할 정도로 무시당하는 시골이었고 더욱이나 척박했을 땅이다. 그곳의 집들은 예나 지금이나 지천에 깔린 석회석이 주된 재료여서 석수라면 모를까 목수는 직업으로 성립되지 않을 게다. 의심이 들 대로 들어 추적해 본 즉, 원래 히브리어로 쓰였던 성경에는 요셉의 직업이 텍톤(Tekton)이었다. 텍톤. 바로 건축가의 영어 단어 Architect에 쓰인 Tect와 같은 어원이다. 텍톤은 기술(technology)과 직물(textile)의 어원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집 짓는 일이니 요즘 직업으로 치면 건축가여서 예수는 건축가라며 농반진반으로 나는 오래전부터 말해 왔다.
건축가라는 전문적 직업은 중세시대 이후에 발생하지만 집 짓는 일은 인류 문명과 더불어 시작된 일이다.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우리의 귀중한 삶을 지속하기 위한 건축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술 이전에 다루어야 할 전제가 있어야 한다. 1200년 전 당나라 시대의 문장가인 유종원이 쓴 『재인전(梓人傳)』에 나오는 재인은 집의 설계도를 그리고 필요한 직공들을 모아 지휘하고 감독하는 이를 지칭하는데, 요즘의 건축가와 직능이 거의 같다. 재인은 정신을 쓰고 마음의 지혜를 사용하는 자며 자기의 법도대로 행하되 공공의 가치를 세우는 자라고 했고, 그 모든 일이 끝나면 자신의 이름만을 남긴다고 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의 본보기로 바른 건축가를 들어 설명한 글이었다.
예수가 건축가라는 상상에 이른 나는, 예수가 광야로 나간 까닭도 상상하고 만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아야 하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아야 하니 나 같은 비루한 건축가는 언감생심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경계 밖으로 추방해 홀로 서서 세상을 직시하는 성찰적 삶을 가져야 바른 건축가가 된다는 걸 알게 된 예수는 더욱 큰 집을 짓기 위해 광야로 나간 게 아닐까 상상한 것이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온 그는 스스로 진리가 되어 이 땅에 사랑의 집, 평화의 도시를 지었으니 그게 (트럼프가 불 지르고 말았지만) 예루살렘의 본 뜻이었다. 모레가 성탄절인데 지난 1년간 우리를 옥죄었던 부정과 불의, 부패와 타락, 분열과 갈등의 우울한 뉴스를 모두 접고, 이날 하루만이라도 사랑과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지내면 안 될까….
사족. 마틴 루서 킹 목사는 평화를 정의가 실현된 세상이라고 했다. 평화의 영어 peace도 pacify(평정하다)와 같은 어원이어서 평화는 불의하고 부정한 상황을 봉합한 게 아니라 이들을 제거한 이후에 이뤄지는 세상인 게다. 한자어 평화는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화(和)가 뜻하는 바는 벼(禾)를 모든 이들(口)에게 골고루 나누는 세상이 참된 평화라는 것이다. 아름답다 평화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