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3일, 블룸버그가 발표한 ‘국가별 혁신지수’에서 우리나라가 1위를 차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생산성이나 연구개발, 첨단기술 등을 따지는 모양인데 지난 9년동안 일곱번이나 1위를 차지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우리나라를 “완전한 민주국가”의 그룹으로 발표하였다. 시민의 권리, 선거절차, 정부기능, 정치참여 등을 따져 전세계 167개국을 4개등급으로 분류하고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강조해 온 미국을 2등급인 “결함있는 민주주의”로 매겼다니,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아직도 생생한 우리로서는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나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선진적이라고 하는 증표가 요즘 들어 속속 나타난다. 특히 코로나와 관련해서 소위 선진국들에서 벌어지는 수준 이하의 행태는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 지도가 얼마나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고,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는 K방역은 세계 표준모델로 추진된다고도 하여 우리의 자긍심을 한껏 높인다.
외신에 의하면 경제지수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대단히 좋은 소식이 많다. 블룸버그는, 우리나라의 작년 1인당 국민총소득은 이탈리아를 넘어 처음으로 G7의 수준에 이를 것이라 전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세계 상위권의 경제지수를 기록하여 왔다. 도시별로 따지는 모리재단의 ‘세계도시 경쟁력지수’에 의하면 서울은 근래 6, 7위에 줄곧 랭크되어 있다. 지지리도 못살아 외국으로부터 구호물자를 받은 때가 내 학생시절이었으니 천지개벽도 이만저만 아닌 게다. 문제는, 이렇게 돈을 많이 벌어 ‘삐까뻔쩍’하게 잘사는 우리가 그 가난할 때보다 과연 행복한가이다.
유엔은 매년 3월20일을 행복의 날로 정하고 ‘지속가능발전 해법네트워크(SDSN)’를 통해 ‘세계행복보고서’를 발간하는데 작년의 경우 우리나라는 153개국 중 61위라고 한다. 돈은 잘 버는데 그 번 돈만큼 행복하지는 않다는 게다. 이 기관에서 행복을 따지는 기준 중에 ‘거주선택의 자유’라는 항목이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140위로 매겨졌다. 그냥 최하위인 셈이다. 또 있다. 서울의 경쟁력이 세계 선두권이라 했지만, ‘삶의 질’을 따지는 머셔컨설팅에 따르면 서울은 코로나 이전인 2019년에 77위를 기록했다. 7위의 경제력에 77위라는 삶의 질. 이 부끄러운 불균형을 이루게 한 중요한 판별기준의 하나는 역시 주거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주거문제는 우리의 모든 찬란한 성과를 격하시키는 주범인 셈이다.
주택문제가 사회의 이슈가 된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지난해 하반기 임대차보호법 제정 직후 이 이슈는 더욱 확산되어 우리 모두를 곤혹에 빠뜨렸다. 사실 이 법은 행복지수를 따지는 거주선택의 자유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선진적 장치지만 후속조치가 미흡하여, 가진 자는 가지고 있어서, 없는 이는 없어서 폭발하고 만 것이다. 급기야 이를 공급의 부족으로 여긴 정부는 2025년까지 무려 83만채를 공급하겠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른다. 특별히 공공에서 주도하여 규제나 절차를 간편히 하고 개발에 따른 이익을 공유하겠다는 진보적 내용이어서, 잘만하면 우리나라 주택건설의 역사에 전기가 될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의문스럽다. 공급이 충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그리고 행복지수가 상승할까? 사실 우리나라의 전체주택수는 전체가구수를 넘은 지 오래고, 서울의 경우도 전체가구수에 불과 5%가 부족할 뿐이라 매년 증가하는 주택수를 감안하면 숫자적으로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이 오래된 주택문제는 물량이 아니라 주택 혹은 주거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부당한 공급방식에 보다 근본적 원인이 있다고 나는 짙게 의심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집에 대한 주된 관념은 아무리 봐도 부동산이다. 아파트만 사면 몇 억씩 순식간에 올라가니 이런 불로소득이 없어 영끌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며 모두들 이 부동산 사재기에 혈안이 되었다. 자기가 사는 아파트가 안전성이 위험해서 D등급 받았다고 경축 플래카드를 내거는 민족이 되었고, 집은 가족의 단란을 도모하는 곳이 아니라 시세차익을 남기고 떠나는 재물이 된 지가 오래여서 늘 유목민적 삶을 산다. 그러니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할 삶터에 대한 애착이 도무지 없다.
아파트는 동네가 아니라 오로지 이익결사체가 되었으며, 임대아파트에 사는 이들을 불가촉천민처럼 취급하여 소셜믹스니 사회통합이란 말은 먼 나라 일이다. 사회공동체가 아니라 부동산공동체가 된 주택단지는 지금에도 전국 방방곳곳에 똑 같은 모습으로 들어차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아서 건축가인 나도 구별 못한다. 단지내에서는 아무리 넓어도 교통법규도 적용이 안되고 일반시민의 차량통행을 불허하며 고립을 오히려 자랑하는 도시의 섬, 그래서 아파트공화국이란 명칭도 얻었다.
또한 공급방식이 절대적으로 공급자 위주의 선분양제여서 사용자는 물건을 보지도 못하고 사게 한다. 그래도 잘 팔리니 고민할 일이 없는 아파트설계는 개선될 리가 없다. 그래서 마감재료만 바꿔 분양가만 올린 이 아파트단지는 겉모습만 번쩍일 뿐 4,50년전이나 지금이나 사는 모습이 똑 같다. 공동의 삶? 옆집에서 누가 죽어도 모르는 곳이라 공동주택이 아니라 그저 붙어만 사는 집합주택일 따름이다.
그런데 83만호를 이렇듯 공급하고 나면 어떤 몰골일까? 더구나 용적율을 몇배나 올린다고 하니 밀집 밀폐는 뻔한 일이라 코로나시대마저 역행하는데…… 불문가지다.
삶의 질에 대한 머셔컨설팅의 조사에서 10년째 1위의 자리를 지키는 비엔나는 자가보유율이 30%(서울은 48%)를 겨우 넘을 뿐이지만 주거의 안정성은 아마도 세계 최고일 게다. 임차인은 원하면 그 임대주택을 자식에게 넘겨줄 수도 있어, 자가나 임차에 대한 관념없이 편안히 거주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주거정책을 ‘비엔나 모델’이라고 칭하며 자랑하는데 그 정책을 표현하는 단어가 ‘Soziales Wohnen’이다. 이를 우리는 사회주택이라고 번역하지만 이는 오역이다. 바르게 번역하면 사회적 거주라고 해야 한다. 어떤 사회를 이루며 어떻게 모여 살 것인가라는 뜻이어서 공동주거를 기획하고 건설할 때 거주자들의 의사가 늘 우선시 되며 그 타당성이 확인되면 시정부는 전폭적 지원으로 공동주거를 짓게 한다. 물량 우선인 ‘주택정책’이 아니라 거주자의 삶의 방식에 기반하는 ‘주거정책’을 그들은 무려 백년전부터 지속해 왔다는 것이니, 그 까닭에 그들이 짓는 공동주택들은 공간구조나 형식이 모두가 다 달라 늘 연구의 대상이 되어 ‘비엔나 모델’이라는 자부심 가득한 이름을 쓰고 있다.
왜 우리는 이런 정책을 쓰지 못하고 주거문제를 여전히 부동산정책으로만 취급할까? 몰라서? 토건 투기세력이 여전히 막강해서? 단임정부라 장기정책을 펴지 못해서? 그러나 우리도 이제 부동산의 주택정책이 아니라 삶에 대한 주거정책을 펴야 하는 것은 더구나 코로나시대에 필수적이며, 사람이 먼저인 이 정부라면 더욱 그래야 하지 않을까?
백년전 스페인독감의 참상이 비효율적 비위생적 도시환경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한 건축가 르코르뷔제는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말로 새로운 건축을 통한 혁명적 도시개조가 불가피함을 역설한 바 있었다. 그의 말을 빌어 이 글의 제목을 단다. ‘주거냐 혁명이냐’. 우리의 정책기조가 여전히 과거지향이라면, 실로 혁명이 필요한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집이 가진 고유의 아름다운 정서를 회복할 길이 없고 결국 우리의 행복지수는 올라가지 못할 게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흐(1884-1962)는 ‘공간의 시학’이란 책에서 집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기술했다.
“우리들이 태어난 집은 단순한 건물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꿈들의 집합체/ 옛날 그 집의 구석진 곳들 모두 하나하나가 몽상의 장소였으며/ 우리들은 거기서 특별한 몽상의 습관을 익혔다/ 우리들이 홀로 있었던 집, 방, 공간은/ 끝없는 몽상, 오직 시를 작품으로 끝내고 완성시킬 수 있을/ 그러한 몽상의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