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뉴욕에 본부를 둔 머셔컨설팅이 예년처럼 2018년도 세계 주요 도시 삶의 질에 관한 순위를 발표하였다. 외국인이 주재하는 것을 상정해서 정치적 경제적 상황, 주거와 공공서비스, 사회와 문화적 환경 등의 기준으로 231개 도시의 등위를 다시 매겼는데, 이번에도 선두는 빈이었고 이는 9년 연속의 기록이었다. 민간 컨설팅업체의 조사가 절대적이지 않다 해도, 내로라하는 도시들을 제치고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그렇게 오랫동안 선정된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머셔가 정한 기준 중 특히 주거환경에서 빈은 압도적이다.
빈의 임대주택 비율은 2016년 기준으로 무려 62%이며 공공임대 비율은 전체의 45%여서 8%라는 OECD 기준을 훨씬 웃돈다. (서울은 7%다) 임대주택이더라도 세입자의 권리는 철저히 법의 보호를 받는다. 예를 들어 세입자가 원하면 자식에게 계속 물려서 사용하게도 할 수 있다고 하니 이 정도면 전용과 임대에 대한 개념구분이 안된다. 시 외곽에 산재한 단독주택들 말고는 빈의 주택 대부분은 시내의 큰 건물에 여러 세대가 같이 거주하는 형태여서, 표식이 없으면 민간인지 공공인지 그 소유를 알기 어렵고 임대와 자가를 구분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크고 작은 세대들이 섞여 있는 데다 젊은이와 노인, 외국인과 이민자도 같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현대사회의 이상적 목표인 소셜믹스는 오래전부터 이루어진 상태다.
빈의 주거상황이 이렇게 선진적인 까닭에는 특별한 역사가 있다. 19세기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폭증한 도시인구를 수용하는 일은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함께 빈에도 긴급한 문제였다. 그러나 일찍이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오래 지속된 탓에 주택건설을 정부가 아니라 시민이 주도하는 일이 잦았으며 심지어는 거주 희망자 스스로가 노동을 제공하여 건설하는 경우도 많았다. 시 정부는 여기에 맞는 제도와 법령을 만들며 시민운동 같은 주택건설을 뒷받침하여 온 것이다. 주민이 참여하여 주거시설을 지으려면 논의가 자연히 활발해지고 그 합의에 따른 주거환경은 공유적일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게 1930년에 완공한 칼맑스호프라는 주거시설이다. 길이가 무려 1.1km나 되는 단일건물의 이 주거는 9평에서 18평 사이 크기 1382세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물 속에 공원을 포함해서 공동세탁장, 공동욕실, 유치원, 도서관 같은 공유시설을 가지고 있어 마치 하나의 마을처럼 구성되어 있다. 88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한 공동체인 이 건축은 빈 사회주택(Soziales Wohnen)의 부흥을 알리는 상징이 된다.
빈의 특징적 주택형식으로 인식되는 Soziales Wohnen을 사회주택이라고 번역하면 사실 오류다. Wohnen은 집의 외형을 뜻하는 주택이 아니라 삶의 모습이나 방법인 거주 혹은 주거라고 해야 맞는 말이며, Society는 어원을 따지면 공동체에 가까운 말이어서 Soziales Wohnen은 사회적 거주방식 혹은 공동체적 삶이라고 해야 보다 정확하다. 서로 모르는 이들이 모여서 어떤 공동체의 모습을 만들 것인가가 핵심적 내용인데, 여기에는 하나의 결론만 있을 수 없다. 같이 모여 살고자 하는 이들의 합의 내용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생기기 마련이어서, 결국 빈에는 대단히 다양한 공동 주거가 만들어져 왔으며 지금도 새로운 거주방식의 공동주택이 계속 건설되고 있다. 예컨대 어떤 곳은 사회통합이 주된 이슈여서 크고 작은 평형들이 골고루 섞여 있기도 하고, 어떤 곳은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망이 커서 작은 부분만 소유하고 많은 시설을 같이 쓴다. 또는 일터와 집이 같이 붙어 있는 직주통합의 공동 주거가 있는가 하면, 지극히 친환경에너지 사용에 꽂힌 곳도 있고, 동별로 도서관 놀이터 사우나 같은 공동시설을 각기 지어 놓고 공중보도로 연결하여 전체를 묶어 공유사회를 확인하는 곳도 있다. 재건축? 그들은 허물고 새로 짓는 게 아니라 덧대고 고쳐서 새롭게 하여 이전의 거주역사를 기억하며 산다. 이 모든 일의 바탕은 공유의 가치이다. 이 공유적 삶의 방식에 따라 수 없이 다양한 거주형태를 만드는 그들은 그런 주거방식을 ‘빈 모델’이라 칭하며 세계 도처에 자랑하고 있다.
우리는?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에 주거정책은 없다. 오로지 주택정책만 있을 뿐인데, 주택물량이 부족했던 시절의 이 낡은 패러다임이 지금도 지배하여 여전히 집은 사고파는 부동산이고 평형대와 분양가로 우리 삶을 재단한다. 우리가 어떻게 거주하는 게 행복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담론은 듣도 보도 못했으며, 우리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건 아직도 건설회사요 분양팀이다. 그들이 억지로 짓는 임대주택은 마치 불가촉주민이 사는 것처럼 담장으로 둘러 구별하며, 공동주택이라면서 공동의 삶은 없고 붙어만 살게 할 뿐이니 사회적 공동체는 와해된 지 오래고 오로지 부동산공동체, 아파트공화국의 유목민 꼴을 하며 우리는 산다. 그러니, 머셔컨설팅의 순위에 따르면 서울의 삶의 질은 올해도 79위다. 부디 주택정책이 아니라 주거정책을 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