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위한 수도원 ‘도니골수도원’

생활성서

2022. 6. 01

작년 여름 KBS에서 ‘100인의 리딩쇼’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으로 지구촌의 기후위기특집을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저도 잠시 출연했지요. 그런데 대본으로 저에게 건네어진 책이 놀랍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의 글로 된 ‘찬미받으소서’라는 책이었습니다. 바로 지난 2015년 5월에,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에 끊임없이 위기를 조장해온 우리들의 죄악에 대한 회개와 새로운 삶의 모색을 촉구하며 반포하신 내용입니다. 생태적 문제를 넘어 역사와 문화, 사회와 지역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우리의 근본을 다시 성찰하게 하는 이 회칙문을 정독하며 위기의 시대에 대한 교황님의 인식과 지혜에 대해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공동의 집’이나 ‘생태적 회개’라는 단어는 아직도 선명히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요즘, 그린디자인, 탄소중립, 재생에너지라는 말이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건축에서는 친환경에 관련된 사항이 건축허가의 법적조건으로 강제할 정도이니, 우리의 환경에 대한 배려는 예전과 비교해서 눈에 띄게 높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친환경건축이라는 말이 참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건축은 사실 근본적으로 반환경적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건축은 본디 자연을 탈취해서 생겨나는 인공물입니다. 초록색을 칠한다고 반환경에서 벗어날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건축은 지구 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땅을 반드시 점거해서 세워집니다. 기초를 박느라 땅을 파헤치는 일은 불가피해서 건축은 출발부터 자연을 훼손합니다. 건축의 재료인 나무나 돌 시멘트 등등은 죄다 자연에서 강제로 빼앗은 것들이지요. 심지어 남의 나라 땅에까지 가서 가져 오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자연파괴의 적극적 주범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번 세워진 건축물은 유지관리를 위해 에너지를 끊임없이 소모하고 불순물을 배출하는 몰염치를 저지르며 기후위기를 부릅니다. 그뿐 아닙니다. 생명이 다한 건축물의 잔해를 처리하는 일은 또한 골치거리입니다. 더 한심한 것은, 멀쩡한 건축물인데도 재개발한다고 축하 플래카드까지 내걸며 부수어서 생긴 폐기물을 지구 곳곳에 가져다 뿌리니, 가히 패악질 수준입니다. 그러니 건축은 태생부터 죽음까지 자연을 일관되게 파괴하며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에 재앙을 끊임없이 부르는 악행인 셈입니다. 조금 미안한지, 재생에너지를 쓰자고 하고 단열기능도 강화시켜 열소비를 줄이자고도 합니다. 근데 그게 모두 우리 자신은 덥지도 춥지도 않는 환경을 끝내 유지하자는 말과 같습니다. 참으로 이기적인 우리에게 자연은 착취해야 할 소모적 자산일 뿐인데, 친환경적 건축이란 말이 그래서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건축설계를 직업으로 해서 먹고 사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자가당착이며 모순이지요. 적지 않은 죄책감도 사실 가지고도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새 집을 짓지 말고 헌 집을 고쳐서 쓰자고 주장하는 글을 쓰기도 하고, 오래전부터 나름대로의 작은 해결책을 찾아 ‘빈자의 미학’이라는 말을 내세우며 나름의 건축을 하고 있습니다. 좀 검박하게 살고 주변과 나누는 삶을 위한 건축이면 덜 해악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으로 책까지 내었습니다. 다소 불편하겠지만 그 불편이 내적 충만을 이루어 오히려 큰 즐거움이 되는 건축방법론입니다. 변하는 계절도 느끼게 하고 바람이 불면 그 흐름도 알게 되고 해 뜨고 지는 일에도 설레고 감사하게 하는 건축, 즉 자연을 적대하며 피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스며들어 더불어 사는 삶을 이루게 하는 건축이라면 그 해악이 덜해지지 않을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도 남는 문제가 있는데, 그 건축이 생명을 다할 때입니다. 어떤 건축이든 끝내는 반드시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수명이 다해서도 무너지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 특히 요즘은 경제적 가치 때문에도 건축은 쉽게 무너집니다. 아무리 튼튼하게 지었다 해도 무너지는 것이 건축의 숙명이지만 건축을 시작할 때 이 진실을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건축의 생명에 대해 놀라운 지혜로 거의 완벽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옛집의 재료는 주로 흙이나 나무이며 이를 서로 이어서 만드는 공법입니다. 규모를 변경할 필요가 있으면 건물을 해체해서 그 부재와 재료를 다시 사용하고 필요하면 새 부재를 덧대어 만듭니다. 이를 거듭 짓는다는 뜻으로 중창이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건축이 오랜 세월 주어진 임무를 다 마치고 무너지게 되면 흔적도 없이 땅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폐사지를 한번 가 보시면 압니다. 그저 초석 몇 개만 남아 있는데 나무와 흙으로 지었던 본채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살아서 주어진 임무를 다 마치고 비워진 땅 위에는 황망함이 가득하지만, 이 폐허의 숙연한 풍경은 참 아름답게까지 느껴집니다. 돌로 지었기 때문에 폐허가 되더라도 돌무더기가 널브러져 살아 있을 때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듯한 서양 집들의 최후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그렇지만 요즈음 짓는 건축은 나무와 흙이 주된 재료가 아니라 견고한 콘크리트와 철재여서 우리 옛집의 최후와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여기에 제 고민이 줄곧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최후를 보내고 있는 한 건축을 만났습니다. 저 먼 나라 아일랜드의 서쪽 바닷가에 면한 작은 마을에 있는 수도원이었습니다. 도니골수도원입니다.

제가 지난 2015년, 문학 속에 나오는 아일랜드의 장소들을 답사하며 하루를 묵기 위해 도니골이라는 작은 마을에 들렀을 때 숙소에서 이 마을에 관한 책을 보면서 이 수도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폐허로 있지만 과거에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이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1474년 이곳 영주였던 오도넬이 어머니의 간곡한 청으로, 에스케강이 바다와 만나는 하구에 창설한 이 수도원은 이곳 영주가 1601년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와의 9년 전쟁에서 패하며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1740년 마지막 수도사가 떠나고 수도원은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이 폐허의 수도원이 마을의 공동묘지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에는 수도원 주변에 슬금슬금 생긴 묘지가 점점 내부로 들어왔습니다. 중정으로 쓰던 곳 구석을 시작으로 이내 전체에 가득 차고, 식당의 폐허에도 회중석에도 심지어 제단 부근에도 묘지가 들어 섰습니다. 수도원건축의 주된 재료인 석재들 중에 크고 좋은 돌은 이미 다른 건물을 짓느라 옮겨가 수도원 전체 형상을 금방 알아보기 힘들지만, 남아 있는 돌들이 이루는 구획은 분명하게 옛 수도원의 영역들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장소별로 모여 있는 묘석들은 마치 죽은 자들이 여전히 미사를 드리는 듯, 혹은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듯, 또는 묵상하는 듯한 풍경을 이룹니다. 아 여전히 이 수도원은 살아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수도원이라고 여겼습니다. 수명이 다 하여 폐허가 되어서도, 어쩌면 더욱 성실하게 수도원으로서의 고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었으니 제 마음 속에서 찬미받으소서라는 음절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미받으소서’에 나오는 글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교황님께서 대규모개발사업으로 역사적 현장을 부수며 문화생태를 파괴하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5. —- 문화의 소멸은 식물종이나 동물종의 소멸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 146.—이러한 의미에서 토착공동체와 그들의 문화전통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사실 그들에게 땅은 상품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곳에 묻힌 조상들의 선물로, 그들의 정체성과 가치를 함양하고자 관계를 맺어야 하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그들이 자기 땅에 머무를 때 그 땅을 가장 잘 돌봅니다.—–“

너무도 쉽게 집을 허물며 소위 새 역사 창조에 올인하는 듯 정주하지 못해 늘 뜨내기 삶을 사는 우리, 현대의 한국인들은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 아닐까요? 저는 이 말씀으로 제 건축을 다시 시작하는 힘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