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설계도면을 컴퓨터로 그리고 플로터나 레이저프린터로 인쇄하는 과정이 보편화돼 있지만 1990년대 초만 해도 설계는 반투명 종이인 트레싱지에 연필로 그려서 암모니아성 냄새 물씬한 청사진 기계로 인쇄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청사진은 감광지에 빛을 받은 부분이 청색으로 남아 불린 이름인데, 새 삶을 담는 집의 설계도라는 이미지가 더욱 커서 미래에 대한 꿈의 동의어처럼 쓰게 되었으니 이를 행복에 대한 예언서로 여긴 것이다. 그런데 건축이 그런 예언적 작업일까? 나에게 집 설계를 맡기며 행복해질 수 있냐고 묻는 건축주들도 있고, 강의 때는 미래의 삶에 대해 질문도 받지만 그때마다 나는 그들을 실망시킨다. 내가 짓는 집에서 살면 삶이 바꿔지는 건 확실하지만 행복 보장이라는 사기성 짙은 발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건축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예언자처럼 장담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에 대한 고민과 문제를 풀이하고 보다 나은 삶을 모색하는 일에 건축설계의 진정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건축은 시류에 영합하는 일이 아니며 시대의 오류를 질타하며 바른 가치를 일깨우는 일이 역사에 나타난 건축의 임무였다.
초고속 정보화의 시대,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하여 판단하고 해결책을 내놓으며, 블록체인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환경이 사회를 송두리째 흔드는 지금, 시대적 소산인 건축은 어떻게 변할까? 기계 미학이 중심가치가 되었던 20세기, 기계의 속도와 효율을 감당하지 못한 건축공간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서양의 집 서양의 도시를 우리가 온몸으로 받아들인 지난날, 오랫동안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왔던 아름다운 공간들은 비효율과 반기능이라는 누명을 쓰고 우리의 일상에서 사라졌다. 대표적인 게 문방이나 정자 혹은 사당 같은, 사유하고 창조하며 영성을 높이는 공간들이다. 이들 공간에서는 늘 문향이 피어올라 우리 삶의 격조를 한껏 높였지만 시대는 그들의 존재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고 집은 두 가지 종류의 공간으로만 재편되었다. 하나는 화장실이나 욕실, 주방이나 식당 그리고 침실 같은 생체본능적 욕구를 달성하는 공간과, 가족의 단란을 도모하거나 작업이나 연구를 하는 거실이나 서재 같은 생활사회적 공간이다. 나의 스승인 김수근 선생은 이런 목적이 주도하는 공간을 제1공간, 제2공간이라고 분류하고 문방·정자·사당 같은 공간을 제3의 공간이라고 칭하며 한국 전통건축이 가진 아름다운 정신적 가치를 재론하고 부활을 도모했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서양의 계획도시는 원래부터 효율적 관리가 목표였다.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지배했던 중세 이전의 도시들은 단일중심의 계급적 구성으로 지배의 효율을 극대화한 적대적 공동체였으며 자본권력이 득세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의 도시들은 기능의 효율이 전가의 보도였다. 전지전능한 듯한 마스터플랜으로 봇물처럼 탄생한 신도시들은 우리 삶을 함부로 분류하고 재단했으며 차량과 소음으로 뒤덮인 도로는 인간을 배제하며 환경은 오염되었고 도시범죄는 날로 창궐했다. 우리에게 보랏빛 미래를 약속했던 청사진이었지만 그 약속은 늘 어긋났고 아무도 전 시대보다 우리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도시 인구가 세계 인구의 반이 훨씬 넘은 지금 도시 문제는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문제가 되었는데, 드디어 인공지능의 시대가 전개되며 새로운 도시의 청사진이 등장했다. 초지능의 스마트시티. 차량은 자율적으로 운행되고 환경은 자동으로 조절되며 모든 사람이 데이터화되어 서로 연결되고 조직된 사회라고 했다. 그렇다면 모두가 가상현실에 바탕을 둔 환경이니 필시 공동체는 조각나고 모두가 몽유병 환자처럼 자기탐닉에만 몰두하는(모두 스마트폰에 머리 박은 지하철의 풍경을 보시라) 그런 사회일 텐데…. 거기에 사유와 창조, 낭만과 우연 그리고 영적 성숙이 있을까?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도시를 만들 때, 먼저 사직과 종묘를 설치하고 천지신명에게 도시의 명운을 맡긴 우리 선조의 지혜가 전지전능한 인공지능보다 훨씬 신뢰할 만하지 않은가? 작은 마을이라도 서낭당과 산신각을 두어 마을의 안전과 개인의 복을 빈 옛 사회에 나는 더욱 확신이 있다. 무엇보다 도시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실이며 도시 문제의 해답은 청사진에 있는 게 아니라 현장에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스마트시티는 우리 삶을 혁명적으로 바꿀지는 몰라도 더 나은 세상이 아닐 가능성이 짙으며, 늘 그랬듯 그 청사진은 이번에도 환상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