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 이르는 길

생활성서

2022. 7. 01

오래전에 프랑스의 샤르트르대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13세기 초에 지어진 이 성당은 성모께서 예수님을 낳을 당시 입었다는 옷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건축하는 이들에게는 고딕건축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라 반드시 들러야 할 목록 중의 하납니다. 100미터가 훌쩍 넘는 두개의 탑이 우뚝 솟은 이 건축은 길이도 130m미터일만큼 크기가 어마어마 한데, 이를 이루는 고딕건축 특유의 구조미가 탁월합니다. 특히 샤르트르블루라는 고유한 색채명칭이 있을 정도의 이곳 스테인드글라스는 너무도 황홀한 빛 다발을 내부로 쏟아 내며 방문객을 감동시킵니다. 가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되고도 남는 건축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눈길을 유난히 끄는 게 있었습니다. 이 성당내부 입구바닥에 새겨진 직경 13미터의 둥근 미로의 문양입니다. 옛날에는 이 성당에 들어오는 이들은 반드시 이 미로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문양 속의 길을 무릎으로 기어야 했다고 합니다. 좁은 길이 중앙부로 다다를 즈음에는 다시 외곽으로 그 길은 향하고 결국 미로의 모든 길을 다 기어야 중앙의 원형공간에 이르게 되는데 그 길이가 무려 260미터가 넘습니다. 그러니 그때쯤이면 무릎은 다 헤어져서 피가 나게 마련이지만 그제서야 일어나 제단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런 고행을 하는 이들도 없고 이 미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체 핏빛 얽힌 그 바닥을 무심히 밟고 지나갑니다.

샤르트르성당을 방문한 얼마 후에 티벳의 수도 라싸에 있는 조캉사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7세기에 지은 이 불교사원은 불심이 가득한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티벳의 왕 송첸감포에게 시집가면서 지어달라고 한 건축이라고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주변에 많은 건물이 덧대어졌지만 조캉사원 자체는 하늘에서 내려 붓는 듯한 빛이 어둠을 뚫고 내부를 밝히며 성스럽고 아름다운 풍경을 이룹니다. 이 사원의 앞 광장에 운집한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는 온몸을 바닥에 엎드리며 기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오체투지. 완전한 항복의 몸짓으로 그들의 절대자에게 간구하는 이들입니다.

그 중에 한 사내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팔꿈치와 정강이에 보호대를 댔지만 이미 다 닳았고 너덜너덜한 옷에는 핏자국과 먼지가 뒤범벅이며 얼굴은 오랜 세월 서리와 바람을 맞은 듯 검고 튀튀합니다. 어쩌면 그는 아득한 먼 곳에서부터 한 평생을 오체투지 하며 이 조캉사원으로 찾아온 수도자인 듯했습니다. 그때 깨닫게 된 단어가 있습니다. 수도修道. 글자 그대로 길을 닦는 게 수도인데 그는 온몸을 던져 길을 닦았습니다. 그러니 수도란 그저 어디 한적한 곳에서 편안히 앉아 묵상하며 깨닫는 일이 아니라 몸의 고통을 통해 쟁취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수도자는 세상의 경계 밖으로 자신을 던지는 이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사는 세상의 경계 밖 건축인 수도원은 제 관심을 늘 끕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곳이라면 아마도 그리스 북부 메테오라의 수도원이 빠지지 않을 듯 합니다. 공중에 달려있는 곳이라는 뜻의 메테오라라는 지역은 마치 바위를 수직으로 깎은 듯 기괴한 봉우리들이 집단으로 모여 특별한 풍경을 이루는데 그 봉우리 위에 수도원이 있습니다. 14세기무렵 비잔틴제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패퇴를 거듭하자 위협을 느낀 수도사들은 이 벼랑 위에 수도원을 짓고 세상과 결별했습니다. 로프 줄과 나무사다리를 늘어뜨려서만이 겨우 세상을 잇고, 경우에 따라 그 줄을 거두어 세상을 단절시킵니다. 세상 보다 하늘이 더 가깝다고 느껴지는 이 수도원은 말 그대로 세상의 경계 밖에 있었습니다. 이렇듯 혹독한 지경 속에 자신을 몰아넣고 극한의 삶을 사는 수도자들, 이들 모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 평화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평화를 뜻하는 라틴어 글자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진 게 많습니다. Pace, Pax같은 단어인데 모두 Peace와 같은 뜻이며 이들을 우리는 평화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과연 평화와 Peace는 같은 말일까요? 평화의 라틴어 Pax를 쓴 팍스로마나 혹은 팍스아메리카나는 로마에 의한 평화, 미국에 의한 평화라는 뜻이지요. 즉 그들의 힘으로 이룩된 결과입니다. 그런데, 큰 평화의 바다라는 태평양을 Pacific Ocean이라고 하듯 Peace와 정벌하다는 뜻의 Pacify는 같은 어원입니다. 그러니 Peace는 힘으로 평정해서 얻어지는 강제적 평화라는 것입니다. 팍스로마나가 로마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듯이 힘이 쇠하면 그런 평화는 없어지기 마련인 게 Peace입니다.

한자말 평화는 다릅니다. 平和의 평에 대한 상형문자 어원은 수면 위에 크고 작은 수초가 떠 있는 모습입니다. 즉 고만고만한 크기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있는 상태인데, 만약 그 중의 하나가 세력을 얻어 커지면 깨어지는 임시적 평화여서 이도 불안합니다. 늘 타협해야 하는 민주적 평화인 까닭에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게 되어 조건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에 의한 평화는 그런 세상의 평화와는 확연히 다르지요. 신의 절대적 힘과 권위로 이뤄지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이를 얻기 위해 세상의 성취와 관계와 관념을 버리고 절대자에게 완전히 항복하여 얻는 참평화. 바로 세상의 경계 밖으로 떠난 수도자들이 도달하는 최종 목적지 아닐까요? 여전한 탐욕으로 번뇌하는 저 같은 이들은 꿈도 못 꿉니다.

 

근래 제가 새롭게 맡은 일 하나가 남양성모성지에 짓게 될 ‘순교자의 언덕’입니다.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 신부님의 헌신적 노력으로 많은 순례객을 부르는 이 성지는, 조선조 말기 병인박해에서 많은 이들이 여기서 순교한 곳입니다. 최근에는 마리오 보타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성당이 완공되어 세계적으로도 더욱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영예롭게도 저는 순교자를 기념할 장소를 설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 설계를 마치면서 이렇게 설명문을 달았습니다.

“순교란 무엇일까요? 이 단어는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서 18장36절에 나오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불멸의 존재가 되셨습니다. 신앙인의 목표가 이런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 즉 Imitatio Christi이어서, 사도들은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도들의 삶 Vita Apostolica는 또한 중요한 신앙의 모범이 되어 역사 속에서 순교의 성사를 택한 수많은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목숨을 버리지는 못하지만, 세상의 삶을 떠나 성직이나 수도자의 길을 떠나는 이들도 순교적 행위라고 여깁니다.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육체의 유혹에서 비켜있으며 정신의 난잡함을 멀리 하는 이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평화일겝니다. 세상의 삶을 참회하고 순종의 길을 걸은 다음 얻는 평화, 이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완전한 항복에서 비롯됩니다. 이 행위가 나를 부인하고 스스로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며 바로 온전한 신앙의 형태 아닐까요?

순교의 한자 殉敎에서 殉이 가진 원래의 뜻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교는 믿음을 따라서 죽되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어서 평화하는 게 아니라 살아서 평화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을 것입니다. 살아서 순교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더욱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순교자의 언덕에 오르는 일은 우리에게 살아서 순교하는 지혜를 깨닫게 하는 풍경이라고 여깁니다.

이 프로젝트는 이름 모르는 옛 순교자들을 기념하기도 하지만, 이 장소에 우리의 이름을 새기며 순교하고 다시 태어나기로 결단하는 우리들 스스로를 기념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아름답고 경건하며 새로움에 가득 찬 풍경, 참회하고 순종하여 평화에 이르는 길을 여기에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