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的으로, 인간은 거주한다.”

지방신문연합

2011. 12. 13

건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내가 믿기로는 그 건축이 서는 땅이다. 이 땅과 관련한 ‘지문’이라는 단어가 요즘 내 건축의 중요한 화두며, 지난 일년 동안 써 온 이 칼럼의 주제어이기도 했다. 지난 글을 통해 나는 서양과 우리의 도시에 대한 차이를 역사적 맥락을 통해 설명했다. 서양인들은 도시를 머리 속에서 구상하고 이를 평지에서 실현한 반면, 우리의 선조들은 땅을 먼저 이해해서 그 생리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으며, 그 맥락을 다치지 않도록 가만가만히 마을의 구조를 얽고 섞는다고 했다. 지맥과 산수, 명당이 그런 말이며 배산임수가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로마군단 캠프가 유럽 중요도시들의 원형이니 이 임시적이고 표준화된 도시는 결국 땅과는 무관한 다이어그램이었으며, 그 관습이 르네상스 시절, 더욱 다이어그램적인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 도시는 반드시 평지에 세워졌다고 했다. 또한 20세기 들어 세워진 수많은 신도시들도 차별적 지역지구제와 계급적 도로망을 그린 평면의 도시여서, 평지의 그 도시들은 정체성을 갖기 위해 랜드마크라는 인공시설물이 반드시 필요하였다고 밝혔다.
우리는 다르다. 산과 계곡과 물길로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 놓은 땅 위에 지어지는 우리의 마을은 이미 공간적이며 입체적이다. 랜드마크는 인공적인 게 아니라 자연의 산세와 물길이 이루는 풍경이었고, 그 속에 자리하는 집이 땅과 밀착되지 않으면 오히려 죄스러운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잠시 기대어 살 뿐이며, 집의 수명이 다하면 주된 재료인 흙과 나무는 그대로 다시 땅으로 귀속되어 자연과 합일되는 이치였으니, 자연을 깔고 뭉개며 세우는 서양의 집과는 그 근본이 다른 것이다.

터무니라는 말이 있다. ‘터-무늬’에서 파생된 이 말은 말 그대로 터에 새겨진 무늬를 뜻한다. 터무니없다는 것이 근거 없다는 말이고 보면, 터에 새겨진 무늬를 몽땅 지우고 백지 위에 다시 짓는 재개발 같은 사업은 터무니없는 사업이요, 그 결과로 얻어져 판에 박은 아파트에 사는 삶은 터무니없는 삶 아닐까. 그래서 도시의 유목민 된 우리의 삶은 떠돈다.
이 터무니를 한자말로 지문(地紋)이라고 고치고, 자연의 무늬 위에 삶의 기록을 덧대어지므로 문양 紋을 글 文으로 바꾼 게 地文이다. 땅은 엄청나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자연이 그 생성과 변화를 기록하였고 더러는 인간이 그 굴곡된 삶을 통하여 사건과 변천을 기록한 역사다. 그래서 땅마다 다 다르며 그 내용도 마치 인간의 손금과 지문처럼 모두 다르다. 뿐만 아니다. 땅은 여전히 우리의 새로운 기록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땅의 생기를 중시했고 풍수와 오행을 논하며 조심스레 집을 지었던 것이다. 기공식을 서양처럼 땅을 부순다(ground breaking)라고 하지 않고 개토(ground opening)한다고 했으니, 본시 땅은 경건하다고 믿은 까닭이었다.
땅을 지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건축의 모든 단서는 결국 땅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새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그 땅을 보지 않고서는 어떤 이미지도 그릴 수 없다. 땅을 가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인 나는 땅을 처음 대하는 순간이 항상 벅차다. 어떤 곳은 이제껏 쌓여진 내밀한 기록을 한꺼번에 풀어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땅은 좀체 그 비밀을 들려주지 않는다. 요행히 땅이 지닌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 그 이야기의 결에 맞추어 지금 필요한 희망적 삶을 덧대어 그리면, 설계가 물 흐르듯 끝나게 된다. 장소가 원하는 내용을 경청하고 그를 시각화하는 일, 이게 건축설계요 도시설계여야 한다.

급기야 서양이 땅의 생리에 눈을 돌렸다. 우리가 서양화가 근대화인줄 착각하고 서양의 미학을 추종하고 있는 사이, 그 미학의 한계에 봉착한 그들은 도시와 건축의 윤리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분열된 공동체의 문제를 심각히 겪은 그들이 이제 그 극복을 위해 거주의 방식을 다시 성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커가 “거주한다는 것은 개인과 세상과의 평화로운 조화”라고 했으며, “거주함을 통해 우리는 존재하며, 그 거주는 건축함으로 장소에 새기는 일”이라고 했다. 장소에 새긴다고 하는 것, 바로 새로운 터무니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 구태한 서양미학의 미망에서 이제라도 벗어나, 새 역사 창조한다며 터무니를 깡그리 지워 우리를 떠돌게 한 비뚤어진 방식을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 금수강산 속에 덧대어 온 아름다운 우리의 터무니를 지키는 일은 우리를 존재시키고 지속하게 하는 방식이며, 우리 삶의 존엄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올 한 해의 칼럼을 마치며 하이데커가 인용한 휠더린의 싯구를 덧붙이고 싶다. 마치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옛 풍경 같아서이다. ‘詩的으로, 인간은 거주한다(Dichterisch wohnet der Mens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