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기억 – 프랑크푸르트 뢰머광장과 쉬른미술관

중앙일보 사회

2004. 6. 11

몇 년 전 문민정부 시절에 중앙총독부였다 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을 광복절 기념식에 맞추어 건물의 머리부분을 동강내고 이를 들어올려 축제를 펼친 일을 기억할 것이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광경을 보며 나는 배타적 국수주의, 문화적 편협성, 반문화적 폭거, 천민문화 등등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야만적 문화에 관한 용어를 내뱉으며 분을 삭였었다. 그 후 경복궁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중앙총독부였으며 해방 후 제헌의회였고 중앙청이었다가 급기야 대한민국 문화의 중추 시설로 바뀐 그 역사를 건축적으로 그 장소에 남기게 되길 소망하였지만, 완공되어 나타난 가짜 경복궁은 우리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말았다.
나는 중앙총독부를 영구히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反개발론자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는 개발과 보전이 양립할 수 없는 적으로 이해되고 그로 인해 숫한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지만, 내가 믿기로는 개발과 보전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얼마든지 보존적 개발이 있을 수 있으며 무조건적 보존이 가져오는 방치는 환경을 오히려 파괴하는 일이다. 우리의 분명한 적은, 새 역사 창조라는 허구적 어귀를 앞세워 과거 사실들을 멸실하는 반달리즘이다.
모든 건축은 언젠가는 소멸할 수 밖에 없으며, 새로운 환경에 따라 재개발도 되어야 하고 변화하는 것이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시간에 따라 건축이 바뀌더라도 수 많은 세월 동안 그 장소에 새겨졌던 삶에 대한 기억을 유지시켜 다음 세대에 이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헝가리 태생의 맑스주의 철학자인 게오르규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바른 진보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앞 선 시대의 업적을 흡수하여 이루어 지는 누적적인 일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뢰머베르그광장과 쉬른미술관이라는 곳이 있다. 1980년대부터 수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마인강변에 새롭게 세워 현대 문화도시로서 면모를 보인 프랑크푸르트지만 이 도시 역시2차 대전 때 연합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곳이었다. 중세 이후 이 도시의 중심으로 시청사가 있었던 뢰머광장도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 되었으나, 이 곳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제일 먼저 복구하고자 한 프랑크푸르트의 상징적 장소였다.
그들은 맨 처음, 이 광장을 면하는 간선도로변에 현대식 쇼핑센터를 지어 그들의 경제부흥을 알리고자 했으며 이 화려한 새 건축이 자랑스러운 미래를 상징하게 될 줄로 믿었다. 그러나 알루미늄 피막을 가진 상업건축이 로마시대 때부터 있었던 역사적 장소가 가진 기억을 지운 것을 알게 된 그들은 결국 그들의 정체성을 의문하게 되고 이 경박한 건축을 이내 후회하게 된다.
그들은,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뢰머광장 주위에 전쟁 직전까지 있었던 건축물들을 보다 더 역사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하여 그들의 자랑스러운 과거로 돌아가는 계획을 만들었다. 그로써 아마도 전쟁의 폐허를 완전히 없애고 패전의 기억마저도 없앨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다시 후회하였다 한다. 이 뢰머광장에 일어났던 슬픈 과거를 억지로 기억하지 못하도록 새롭게 나타난 옛 모습들은 도시의 역사를 오히려 후퇴시켰을 뿐이었다. 마치 이상한 요술나라를 만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 이 건물들은 박제된 세트였지 건축이 아니었다. 그들 나치시대의 악몽과 패전의 슬픈 과거를 감추려 한 이 세트에서 공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더욱 손가락질 받게 되는 자괴의 감정도 함께 느꼈던 것이다.
그러다 1980년, 뢰머광장과 뢰머대성당을 연결하는 중요한 장소에 문화복합시설을 세우기로 하고 이를 현상 공모하여, 베를린 출신의 젊은 건축가 반게르트와 얀센, 숄츠와 슐테스가 이룬 협동 팀의 설계안을 당선시킴으로써 이 뢰머광장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결과부터 이야기 하면, 로마시대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문화역사 도시의 성숙한 시민으로서 그 자긍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쉬른 미술관이라 불리는 이 건축은 3000평 정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미술전시관과 음악학교와 미술공방 그리고 몇 개의 숙박시설과 소규모 문화상업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이 건축물들을 단순한 하나의 건축물이나 기념적 장치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고 시간과 시간을 이어주는 도시적 유기체로 개념을 설정하였고, 정확한 역사인식과 면밀한 주변 맥락의 분석을 거친 이 새로운 건축은 뢰머광장에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열게 된다.
대성당에서 시청사에 이른 150m길이의 공간에 옛날 길이 있었던 위치에 다시 길을 만들었으며, 건물이 있었던 부분은 건물로, 광장은 다시 광장으로 안과 바깥을 만들고 그들을 적절히 연결시켰다. 그리고 새롭게 구축된 그 길을 따라 가는 동안에, 로마시대의 유적도 만나고 카롤링거 시대의 유적도 만나며, 근대의 비극도 만나고 현대의 시간과 흔적을 실제와 상상 속에서 부딪히는 무한한 시간여행을 하도록 한다.
때로는 긴장하면서 때로는 이완되도록 다양하게 조직된 이 속의 공간을 체험하면서, 내 외부가 자연스레 연결되는 회랑과 길과 복도를 따라가다 중앙 로툰다로 나오게 되면 둥근 홀 속에 혼자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00m가 넘는 길이의 좁고 긴 열주의 모습은 마치 대성당과 뢰머광장 사이에 잠시 끊어졌던 역사의 공백을 강렬하게 접속시키는 듯하며, 그 앞 마당에는 지난 시대들의 유구들이 그냥 부서진 채로 있어 마치 버려진 듯하나 사실은 그 속에 담긴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를 침묵으로 들을 수 있다. 누구나 이 속에서 역사가 적층된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되면서 자연스레 역사의적 전개 과정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 ‘쉬베르트페르게쉔’이라고 이름했던 길은 그 앞에 ‘옛날의’이란 단어를 붙여서 새 길의 이름을 표시하였는데, 한 노인이 손자인 듯한 아이의 손을 잡고 이곳에 다가와 벽에 붙은 그 길 이름판을 가리키며 얘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릴 적 이곳, 이 거리에서 겪었던 얘기를 들려주고 있었을 게다.

우리는 어떨까. 자기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재개발지구로 확정되었다고 하여 ‘경축, 재개발 확정’이라는 현수막을 내 걸고 희희낙락하는 우리들. 아무리 건축이 문화가 아니라 부동산으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드라도 과거상실을 축하하는 우리들의 정체는 유목민인가.
김 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나는 마당 깊은 집의 그 깊은 안 마당을 다른 흙으로 돋구어 올리는 것을 목격했다. 내 대구 생활의 첫 일 년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나는 슬픔 가득찬 마음으로 그 묻히는 땅을 보았다…..곧 이층 양옥집이 초라한 내 삶의 족적을 딛듯 그 땅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건축은 강력한 기억장치이며 우리의 정체성은 총체적 문화인 건축을 통하여 확인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건축을 시대의 거울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의 건축 거울을 통해 비쳐지는 서울은 도무지 600년 역사를 가진 古都라고 믿기 힘든 급조된 풍경이다. 아무리 경복궁을 복원하여도 박제일 수 밖에 없는 그런 건축은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악다구니하는 지금의 도시풍경이 천박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 터인 한, 그 기억을 재개발 속에 남긴다면 그것은 진실의 건축이며 귀중한 현대의 유적이 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짓고 너무도 쉽게 허무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