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기억

2008. 3. 05

몇 년 전 문민정부 시절에 중앙총독부였다 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을 광복절 기념식에 맞추어 건물의 머리부분을 동강내고 이를 들어올려 축제를 펼친 일을 기억할 것이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광경을 보며 나는 배타적 국수주의, 문화적 편협성, 반문화적 폭거, 천민문화 등등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야만적 문화에 관한 용어를 내뱉으며 분을 삭였었다. 그 후 경복궁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중앙총독부였으며 해방 후 제헌의회였고 중앙청이었다가 급기야 대한민국 문화의 중추 시설로 바뀐 그 역사를 건축적으로 그 장소에 남기게 되길 소망하였지만, 완공되어 나타난 모조 경복궁은 우리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말았다. ■ 나는 중앙총독부를 영구히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反개발론자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는 개발과 보전이 양립할 수 없는 적으로 이해되고 그로 인해 숫한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지만, 내가 믿기로는 개발과 보전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얼마든지 보존적 개발이 있을 수 있으며 무조건적 보존이 가져오는 방치는 환경을 오히려 파괴하는 일이다. 우리의 분명한 적은, 새 역사 창조라는 허구적 어귀를 앞세워 과거 사실들을 멸실하는 반달리즘이다. ■ 모든 건축은 언젠가는 소멸할 수 밖에 없으며, 새로운 환경에 따라 재개발도 되어야 하고 변화하는 것이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시간에 따라 건축이 바뀌더라도 수 많은 세월 동안 그 장소에 새겨졌던 삶에 대한 기억을 유지시켜 다음 세대에 이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헝가리 태생의 맑스주의 철학자인 게오르규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바른 진보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앞 선 시대의 업적을 흡수하여 이루어 지는 누적적인 일이다. ■ 미술관을 마인강변에 새롭게 세워 현대 문화도시로서 면모를 보인 프랑크푸르트지만 이 도시 역시2차 대전 때 연합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곳이었다. 중세 이후 이 도시의 중심으로 시청사가 있었던 뢰머광장도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 되었으나, 이 곳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제일 먼저 복구하고자 한 프랑크푸르트의 상징적 장소였다. ■ 그들은 맨 처음, 이 광장을 면하는 간선도로변에 현대식 쇼핑센터를 지어 그들의 경제부흥을 알리고자 했으며 이 화려한 새 건축이 자랑스러운 미래를 상징하게 될 줄로 믿었다. 그러나 알루미늄 피막을 가진 상업건축이 로마시대 때부터 있었던 역사적 장소가 가진 기억을 지운 것을 알게 된 그들은 결국 그들의 정체성을 의문하게 되고 이 경박한 건축을 이내 후회하게 된다. ■ 그들은,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뢰머광장 주위에 전쟁 직전까지 있었던 건축물들을 보다 더 역사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하여 그들의 자랑스러운 과거로 돌아가는 계획을 만들었다. 그로써 아마도 전쟁의 폐허를 완전히 없애고 패전의 기억마저도 없앨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다시 후회하였다 한다. 이 뢰머광장에 일어났던 슬픈 과거를 억지로 기억하지 못하도록 새롭게 나타난 옛 모습들은 도시의 역사를 오히려 후퇴시켰을 뿐이었다. 마치 이상한 요술나라를 만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 이 건물들은 박제된 세트였지 건축이 아니었다. 그들 나치시대의 악몽과 패전의 슬픈 과거를 감추려 한 이 세트에서 공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더욱 손가락질 받게 되는 자괴의 감정도 함께 느꼈던 것이다.그러다 1980년, 뢰머광장과 뢰머대성당을 연결하는 중요한 장소에 문화복합시설을 세우기로 하고 이를 현상 공모하여, 베를린 출신의 젊은 건축가 협동 팀의 설계안을 당선시킴으로써 이 뢰머광장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결과부터 이야기 하면, 로마시대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문화역사 도시의 성숙한 시민으로서 그 자긍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 쉬른 미술관이라 불리는 이 건축은 3000평 정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미술전시관과 음악학교와 미술공방 그리고 몇 개의 숙박시설과 소규모 문화상업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이 건축물들을 단순한 하나의 건축물이나 기념적 장치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고 시간과 시간을 이어주는 도시적 유기체로 개념을 설정하였고, 정확한 역사인식과 면밀한 주변 맥락의 분석을 거친 이 새로운 건축은 뢰머광장에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열게 된다대성당에서 시청사에 이른 150m길이의 공간에 옛날 길이 있었던 위치에 다시 길을 만들었으며, 건물이 있었던 부분은 건물로, 광장은 다시 광장으로 안과 바깥을 만들고 그들을 적절히 연결시켰다. 그리고 새롭게 구축된 그 길을 따라 가는 동안에, 로마시대의 유적도 만나고 카롤링거 시대의 유적도 만나며, 근대의 비극도 만나고 현대의 시간과 흔적을 실제와 상상 속에서 부딪히는 무한한 시간여행을 하도록 한다. ■ 때로는 긴장하면서 때로는 이완되도록 다양하게 조직된 이 속의 공간을 체험하면서, 내 외부가 자연스레 연결되는 회랑과 길과 복도를 따라가다 중앙 로툰다로 나오게 되면 둥근 홀 속에 혼자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00m가 넘는 길이의 좁고 긴 열주의 모습은 마치 대성당과 뢰머광장 사이에 잠시 끊어졌던 역사의 공백을 강렬하게 접속시키는 듯하며, 그 앞 마당에는 지난 시대들의 유구들이 그냥 부서진 채로 있어 마치 버려진 듯하나 사실은 그 속에 담긴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를 침묵으로 들을 수 있다. 누구나 이 속에서 역사가 적층된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되면서 자연스레 역사의적 전개 과정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 ‘쉬베르트페르게쉔’이라고 이름했던 길은 그 앞에 ‘옛날의’이란 단어를 붙여서 새 길의 이름을 표시하였는데, 한 노인이 손자인 듯한 아이의 손을 잡고 이곳에 다가와 벽에 붙은 그 길 이름판을 가리키며 얘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릴 적 이곳, 이 거리에서 겪었던 얘기를 들려주고 있었을 게다. ■ 루카치(Gyorgy Lukacs 1885-1971)의 미학적 세계관을 다시 인용하면,”발전에 종말이란 있을 수 없고, 인간의식 -자기 인식을 포함하는-의 수준에 따라 인간에 의해 변경될 있고 또한 변경되는 방향 만이 존재할 뿐” 이라고 강조한다. 루카치의 믿음은 “인간활동이 변증법적인 발전을 통하여 수단과 목적의 보다 큰 완전성에로, 따라서 인간 생의 질적 향상에로 전진한다” 는 것인데, 그는 문화에서의 진보에 관해 언급하길 “그것은 백지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요청에 따라 앞선 시대의 업적들을 흡수한다”고 하며 “진보란 누적적이다”라고 결론 맺는다. 좀더 인용하면, 그는 '미적 반영' 의 요소에서 시간과 공간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설명하며 “시간은 인류발전의 공간” 이고 규정하고 공간 예술에서 시간의 가치를 중요시 한다. 또한 그는 예술에 있어서 총체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예술을 주목하는 항목에서 “모든 예술적(리얼리즘적) 반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사회- 역사적 맥락” 임을 얘기한다. 굳이 루카치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어떤 건축을 주목하는 방법이 적어도 문화현상의 범주에서라면, 그 건축 자체의 물적 형상만은 그리 큰 가치가 없을 것이다. 건축 속에 담긴 인간의 삶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며, 그 삶의 기록이 정체된 다면 그것은 죽음이거나, 박제일 뿐이다. ■ 유럽의 중세기 600년을 지배한 합스부르그(Habsburg) 왕조의 궁궐이 있는 비엔나의 중심광장인 미카엘러프라쯔(Michaelerplatz)에서 -여기에는 근대건축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로스하우스가 옛날의 화려한 장식들의 건축과 마주하고 있는데- 그 지하에서 로마시대 때부터 형성된 건축유적이 발굴되어 이에 대한 기념전시관에 대한 현상설계가 있었는데 비엔나의 전통을 지켜오는 건축가 한스 홀라인(Hans Hollein/1931-)의 제안은 그들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로마시대와 중세시대의 건물기초, 벽체의 일부들이 이리저리 엉켜있는 모습을 옥외광장에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다. 기원 전에서부터의 그 흔적의 단층들, 그들이 엉킨 방법- 레이어링(Layering) 등을 노출 시킴으로써 그들 도시 역사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현대를 사는 비엔나시민들에게 보인다. 이것을 보는 그들은 아마도 역사 속에 스스로의 삶을 항상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며, 항상 백지에서 출발하기를 강요 받아온 우리네 삶과는 아마도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밀라노 태생의 건축가 죠르지오 그라씨(Giorgio Grassi/1935-)가 스페인의 사군토(Sagunto)에 있는 로마 야외공연장(The Roman Theatre)을 개축하였다. 그라씨의 건축에는 항상 스스로를 엄격히 통제하는 유형을 적용하면서 비판적 침묵을 구체화 한다고 케네스 프렘턴(Kenneth Frampton)은 이야기 한다. 프램턴은 “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지 않으며, 예외적 방법으로 'degree zero'를 추구해 왔으며, 때때로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기억장치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라고 그라씨가 만든 이 프로젝트를 두고 평하였다. 그라씨는 이 역사적 건축을 복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 건축의 현대적 재 사용을 주장하면서, 이 유적의 어떤 부분은 무시하기로 하고, 어떤 부분은 다시 사용하기도 하면서 그의 방법대로 개축을 하였다. 문화적 컴플렉스를 지니는 이들에게는 다소 비난의 대상이 됨 직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이 고대건축의 유적으로만 있었던 야외공연장을 오랜 역사를 가진 현대건축으로 재 창조한 것이다.역사적 지구, 역사도시가 잘 보전되어 있는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역사지구의 개발에 대해 많은 선언들을 내어 놓았는데 그 중 일부를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건축유산에 관한 유럽헌장

1975년10월 유럽의회
“1. 유럽의 건축적 유산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념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도시 속에 있는 작은 건물군과 자연 속이나 인공적 환경에 놓인 특징적 마을도 포함된다.
2. 그 건축적 유산 속에 각인된 과거는 우리들의 균형있고 완전한 삶과 불가분의 환경을 제공한다.
3. 그 건축적 유산은 대체불가능한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지닌 자본이다.
4. 역사적 중심지는 조화로운 사회적 균형을 제공한다.
5. 건축적 유산은 교육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역사지구의 안정과 현대적 역할에 대한 권고

1976년 나이로비 유네스코 총회
“…역사지구는 어디에서나 우리들의 일상적 환경의 일부이지만, 그 환경을 형성한 과거의 현존체로서 사회의 다양성에 부합할 필요가 있는 삶의 배경 속에 변화를 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치를 획득하며 우리를 또 다른 차원에 다다르게 한다. …역사지구는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활동의 가장 분명한 증거들을 세대에 걸쳐 전하는 일인 바, 그들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현대사회와 결합 하는 일은 도시계획과 지역개발에 있어 기본적 요소이다. ….복제와 몰개성의 위험에 직면한 시대에, 이러한 과거시대의 산 증거물은 인간성과 국민성이란 삶의 방식의 표현과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숙명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역사마을의 보전

1987년 워싱턴 ICOMOS 총회
“원칙과 목표

…2. 보존의 수준은 마을이나 도시지역의 역사적 성격과 성격이 표현된물질과 정신적 요소를 포함하며 특별히 다음과 같은 것이다.:

a) 필지와 도로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의 패턴;
b) 건물과 녹지, 오픈스페이스들과의 관계
c) 건축 외형의 모습과 함께, 크기 칫수 양식 시공 재료 색채 장식과 같은 건물의 내 외부 전부
d) 마을이나 도시지역과 인근의 자연적 인공적 환경과의 관계
e) 마을과 도시지역이 시대에 걸쳐 축적한 다양한 기능들…

방법과 수단

…보전계획은 어떠한 건물이 보전되어야 하는 가를 결정하여야 하며…특별히 예외적 조건속에서 어떤 부분이 확장될 수 있는 가도 포함하여야 한다…

8. 새로운 기능과 활동은 역사적 마을이나 도시지역의 성격과 경쟁적이어야 한다.….
10.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거나 기존 건물을 개축하려고 할 때, 기존의 공간적 배열을 존중되어야 하며 특별히 그 칫수와 크기의 관계는 중요하다. 주변환경과의 조화 속에서 현대적 요소의 도입은 그러한 형상이 그 지역을 풍부하게 하는데 기여하는 한 금지되어서는 안 된다.….
12. 역사지구에서의 교통은 통제되어야 하며 주차장은 역사적 조직과 환경을 손상해서는 안 된다..
13. 도시계획, 광역계획이 간선도로의 건설을 꾀할 때 역사지구를 관통해서는 안 된다.…”

■ 이들이 수 많은 선언문들을 통하여 강조하는 것은 단 하나의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바로 진정성(authenticity)이다. 역사적 건축물을 보전하던 개축하던, 역사 도시를 보호하던 개조하던 그 건축물이 지녀온, 지녀야 할 진정성의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말 영국의 공예운동을 일으켰던 윌리엄 모리스가 작성한 선언문은 우리에게 그 진정성의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1877년에 밝힌 spab의 선언문에서, “…만약 그것이(역사적 건축)이 현재의 용도에 부적합한 경우, 그 역사유적을 변용하거나 확장하는 것보다는 다른 건물을 짓는 것이 낫다….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우리는 우리에게 씌워진 덫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건축유산을 보호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우리 다음의 세대에게 교훈적으로 또한 존경스럽게 넘겨줄 수 있을 터이다.” 라고 하였다. ■ 죽음의 운명을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것처럼 건축도 결국은 무너져 소멸하게 마련이다. 세운 자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제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었더라도 중력의 법칙에 끝까지 저항할 수 있는 건축은 세상에 없다. 남는 것은, 오로지 기억이다. 건축은 사라져도, 그 건축의 이유에 대한 기억, 그 속에서 산 인물과 그들이 이룬 사건에 대한 기억만이 영원한 것이다. 한 역사의 종말인 폐허에 서면 그 장소가 경건하게 느껴지는 까닭이 그 곳에 기록되었던 삶의 켜들을 묵중하게 느끼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폐허지에 서면 나의 삶을 되새기게 하여 그 곳에 가는 일이 귀하고 소중하다. 흔히들, 우리의 건축은 주 재료가 목재였던 까닭에 서양의 폐허에 비해 그 가치가 없다고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물론 석재로 지어진 서양의 건축은 폐허라 하더라도 원 모습을 부분적으로라도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이어서 과거의 영광을 유추하기 쉽거나 그 자체로도 훌륭한 경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의 폐허는 그저 영역만을 나타내는 초석 몇 개만 남아서 상부구조를 알기란 영 쉽지 않다. 목재와 흙으로 지어졌던 까닭에 완벽히 사라졌기 때문인데, 그러나 그러한 완벽한 폐허에서 오히려 건축의 진실된 숙명을 목도한다. 아직도 악다구니 하듯 몇 개 편린이 잔존한 폐허보다, 가득한 비움의 미학을 마침내 이룬 우리의 폐허는 한 편의 애틋한 서정시이며 맑은 수묵화다. 이 비움이 우리 삶의 진정한 목표 아니던가. ■ 지난 해, 경주에서 황룡사복원을 위한 국제학술대회가 열려 토론자로 참가하였는데 많은 학자들이 초석만 남은 신라시대 최고의 절을 복원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난감하게 하였다. 영화세트처럼 복원된 황룡사가 과거의 영화를 재현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 단선적 생각이며, 우리의 기억을 박제할 뿐이라고 나는 강하게 반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주가 역사문화도시로 거듭나는 일은, 현재의 천박한 도시 풍경을 개선하는 일이지 우리의 기억이 시어처럼 퍼져있는 황룡사 폐허지의 진정성과 경건성을 소멸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 복원은 싸구려 삶이 횡행하는 급조된 도시에서 하는 일이다. John B Jackson은 ‘ 폐허의 필요성the necessity for ruins”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 많은 이들이 인위적인 것을 알면서도 역사적 환경의 재건축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노스탈지어 때문인가, 관광적 본능인가 …….우리에게 폐허가 필요한 이유는 원형복원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며 우리의 기원으로 돌아가도록 또한 이끌기 때문이다…… 역사는 존재하기 위해 중단한다 특히 백제의 도시에는 그 역사가 신라보다 짧은 만큼 그 유적이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유산 중에서도 일부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예컨데, 미륵사지를 발굴해 놓고도 이를 어떻게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더구나 미륵사탑을 복원해 놓고 그 치졸함을 예기치 못한 듯 망연자실하며 일제가 시멘트로 볼쌍 사납게 만든 탑을 해체해놓고 그 처리방법을 찾지 못해 당혹해 하는 게 현실이다. 정림사지 탑이 홀연히 서 있을 때 많은 이들이 백제의 폐허 속에 피어 있는 그 아름다움을 시심 가득히 볼 수 있었건만 신뢰할 수 없는 건축으로 둘러싸인 작금의 이 탑은 오히려 그 시어들을 빼앗아 가버린 것 아닐까. 백제의 고도를 부활하자고 할 때 전제되어야 하는 진실은 그것은 불가능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백제의 고도를 기억할 수 있도록 현재의 무분별한 도시적 상황을 재편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원칙과 순서가 있다. 첫 번째는 백제 고도의 면모를 확인 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내는 일이며 그 증거가 확실하고 분명하면 그 자리에 그 원형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확실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옛 도시를 재현하는 일은 영화 세트를 짓는 일이나 다를 바 없으며, 이는 기만이다. 만약 관광을 목표로 한다면 이는 옛 도시 부여가 아니라 새로운 ‘부여랜드’같은 놀이터일 뿐이다. 두 번째는 원형은 모르지만 그 주초나 유구로 볼 때 건축이 있었던 장소면 그 폐허대로 보존해야 하며, 그 폐허로 유추되는 건축에 대한 가능성을 두고 자료관 등을 만들어 찾는 이들에게 상상의 바탕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할 수 있다. 세 번째, 취락지의 구성은 지난 개발의 광풍이 지나간 곳이 아닌 한 그 변용이 어려운 점을 염두에 두면 전통적 풍모를 갖는 도시구성은 오래된 길과 자연적 형상을 통하여 오히려 손 쉽게 얻을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오랜 건축과 도시는 건물의 모양보다는 공간의 형성이 중요하므로 이 전통적 공간을 구현하는 일이야 말로-건축은 현대적 풍모를 가지더라도-바르게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다. ■ 반만 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여기 이땅, 그리고 지금의 우리. 우리는 너무 우리의 역사적 삶을 부정하는 건축만 이땅에 지금까지 세워 온 것 아닌가. 그래서 자꾸만 우리의 삶은 왜소하고 연속되지 못한 존재로 일그러져 가는 것 아닌가. 루카치의 미학을 다시 빌려보자. 그는 예술의 사회적 사명을 이야기 하면서 “참된 예술은, 인간 삶의 전망을 보다 명료한 초점 거리 안으로 끌어들여, 그가 어디에서 왔고 어느 방향으로 가는 지를 알게 함으로써, 또한 사회 및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그의 내면에 도덕적 자발성을 유발시킴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발전에 보다 폭 넓고 깊이 있는 의식을 갖게끔 할 수 있다” 하고 하며 “예술의 사회적 사명은 예술과 삶에 있어서 '총체적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창조하는 데 기여하는 일” 임을 그는 믿는다. ■ 우리의 도시와 건축은 우리의 삶을 바탕으로 하여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저 높이 저 깊이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궁궐터나 정림사지가 우리의 삶의 일부였으면 마찬가지로 산동네 달동네도 우리의 정겨운 삶임에 틀림이 없으며, 욕지기 나는 천민자본적 건물군도 분명한 20세기말 우리의 삶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존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들의 존재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들은 배척되거나 제거되어야 했던, 그래서 곧잘 이들의 삶을 애써 부인했던 전시대적, 정체적 논리를 극복하고 이들을 우리의 삶 속에 다시 살려내어 그 속의 아름다운 체계를 지혜롭게 재 구축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미래는 그 영속성을 낙관할 수 있을 터이다. 이들을 우리의 유적으로 여기자. 이들, '현대의 유적' 을 일으켜 세우는 것, 이것이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의 또한 중요한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