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부동산이 아니다

경향신문 '오피니언'

2015. 10. 08

지난달 말 베이징 디자인위크라는 행사의 개막식에 기조강연을 요청 받아 가게 되었다. 6회를 기록하는 행사지만 그 수준을 몇 해전에 경험한 적이 있어 올해의 행사도 만만히 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기조강연인데도 다른 일을 핑계로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고 내 순서가 닥쳐서야 강연장에 입장하는 오만을 부렸다. 게다가 중국 땅에서 건축설계작업도 15년째 하고 있으니 중국의 건축과 도시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다. 솔직히 말하면 낮춰본 게다. 근데 이 모든 게 오산이었으며 이 행사로 끝내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만다.
예컨대 중국의 건축가 100인을 불러모아 펼쳐놓은 전시회는 모두가 대단한 질적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소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왕슈 만큼 혹은 그보다 더 단단한 내공의 건축들이 즐비했으니 서양의 현대건축을 흉내 내는 단계는 이미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이 행사는 베이징 시내 곳곳으로 확산되어 있는데, 천안문광장 앞 전통적 주거풍경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에서는 옛 건축들을 빌려 전시장을 만들고 그 속에 도시와 건축에 대한 강렬한 제안들을 쏟아내었다. 더러는 중국의 젊은 건축가들끼리, 더러는 외국의 건축가들과 연대하며 만든 환상적 내용이었다. 여기뿐 아니라 예술특구인 798에서도, 공항인근의 시설에서, 각급 학교에서, 또 공공기관 곳곳에서 펼쳐진 건축향연의 기획과 내용이 여태껏 내가 아는 중국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우리의 현대건축보다 훨씬 앞서있는 현장을 본 것이다. 내가 중국에서 건축작업을 시작한 2000년만해도 베이징 시내에는 자동차보다는 우마차와 자전거가 훨씬 많아 마치 우리의 60년대 도시풍경을 보는 듯 했다. 게다가 석탄연료가 내뱉는 매연과 열악한 위생시설이 뿌리는 악취 등은 전형적 미개발 도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바꾸는데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베이징올림픽 때 천지개벽한 도시가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때만 해도 그럴 수 있으려니 여겼다. 정부주도력이 강한 사회이니 기념비적 거대건축으로 한 도시의 풍경을 바꾸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며, 또한 이런 기념비적 건축의 도시가 가지는 생명력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한편으로는 냉소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 판단은 또 오류였다. 중국은 우리와 다른 궤도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건축시장은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는 건설회사가 이끌어왔다. 서울 도시개발 기폭제가 된 강남개발은 정치권력과 건설자본이 그 이익을 공유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정도로 그 유착은 공고하였다. 공사만 아니라 기획도 하고 분양도 같이 하게 된 건설회사는 선분양이라는 특혜적 제도까지 받아 그림만으로도 아파트를 분양하며 이득을 챙겼다. 한번 만든 집의 도면은 파일로 저장하여 다음 번에 똑같이 써도 아무 탈이 없었으니 건축설계를 연구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는 아파트단지를 회사이름으로 썼다. 삼성아파트, 현대아파트, 우성아파트…… 수천 명이 모여 사는 마을의 이름이 건설회사인데도 우리는 이를 항의하기는커녕 선망하기까지 했다. 건설회사 전성시대의 거침돌이던 분양가 제한마저 풀리자 넉넉해진 공사비를 확보하게 된 그들은 닭장 같은 건축공간을 해소하기 보다는 기존 것과 똑 같은 공간에 비싼 재료로 치장하며 레미안, 힐스테이트 등의 요상한 이름으로 바꾸고 더욱 비싼 값으로 선분양하였다. 건축설계? 있으나마나 한 그 절차는 건축허가를 받기 위한 요식행위일 뿐이다. 그래서 요즘, 아예 설계까지 자체적으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법령개정까지 요구하고 있다.

중국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건설시장은 건설회사가 아니라 민간 디벨로퍼가 주도한다. 이들이 정부로부터 땅을 취득하게 되면 우선 건축가부터 찾을 수 밖에 없다. 성공적인 분양을 위해서는 이름 있는 건축가나 아주 좋은 설계가 필요한 것이다. 설계가 끝나면 당연히 건축가와 설계를 홍보해야 한다. 건설과정에서도 우리처럼 종합건설회사가 일반적으로 있는 게 아니어서 분야별로 발주를 하는 까닭에 각 부분을 지휘하고 조정할 수 있는 건축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건축가의 권위가 보장되니 설계 또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 근래 지어진 아파트 단지들을 가 보시라. 이미 우리의 판에 박은 듯한 아파트와 비교되지 않는 양질의 주거풍경을 구축해 놓고 있다. 상업적 이득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특별한 주거단지들도 속속 등장한다. 하나만 예를 들면, 항저우 북서쪽 량져(良渚)라는 곳 250만평의 땅에 최근 지어진 “량져문화촌”은 거의 완전한 공유사회이다. 전체 주민이 함께 식사를 하는 촌민식당, 주민 스스로가 재배하고 만든 농산물과 생활품을 나누는 장터, 공유하는 교통수단 등, 현대사회에서 꿈꾸는 공유의 삶을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여기에 문화와 여가시설, 다양한 주거형태 등…… 중국의 건축과 사회를 얕잡아 본 게 너무도 부끄러웠다.

우리 건축법에 규정된 건축의 정의는 ‘건축이란 건축물을 신축 증축 개축 재축하거나 건축물을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이다. 이렇게 허무한 표현이라니…… 그러나, 건축을 건설과 분리시켜, 국토교통부 같은 곳이 아니라 문화부산하 문화유산부로 소속하게 한 프랑스는 1977년에 제정한 건축법에 건축을 이렇게 정의한다. ‘건축은 문화의 표현이다. 건축적 창조성, 건물의 품격, 주변환경과의 조화, 자연적 도시적 경관 및 건축유산의 존중은 공공적 관심사이다.’ 프랑스에게 건축은 문화지만 우리에게는 부동산이라고 법에도 규정했으니 우리네 건축이 어느 나라엔들 앞서겠는가? 나는 자괴감 가득 안고 베이징에서 돌아올 뿐이었다.
그럼에도, 오늘 서울에서 건축문화제가 개막된다. 이 땅 곳곳에서 건축가들이 악전고투 끝에 이룬 건축들을 문화의 이름으로 펼쳐 시민들을 초청하는 이 행사를 외면하지 마시라. 열악한 관행과 제도 속에서도 건축은 우리를 지속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문화형태라는 말을 믿고 부조리와 유혹을 뿌리치며 허연 밤을 새우곤 하는 우리의 건축가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성과이니, 여기서라도 건축이 부동산이 아니라 문화라는 희망을 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