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란 무엇인가

2005. 2. 21

나는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고 믿는 자이다. 우리가 늘 하던 말로, 부부가 같이 오래 살면 서로 닮는다는 것도 한 공간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까닭에 그들의 삶이 그 건축의 규율을 같이 학습하며 그 공간의 지배를 받아 습관도 바뀌고 결국 얼굴 생김도 닮아간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도하기를 원하는 이가 외딴 곳의 작고 검박한 공간을 찾아 떠나는 것도 그 격리되고 탈속한 공간이 자신의 분심을 억누르고 오욕칠정을 지배하기를 원함이다.
윈스턴 처칠도 1960년 타임지와 회견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 We shape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는 것, 바꿔 말하면, 좋은 건축은 좋은 삶을 만들지만 나쁜 건축은 나쁜 삶을 만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좋고 나쁨이 화려함과 초라함에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화려한 건축 속에서는 삶의 진실이 가려져서 허황되고 거짓스러운 삶이 만들어지기 쉬우며 초라한 건축에서 바르고 올곧은 심성이 길러지기가 더 쉽다.
비록 그 건축의 효능이 우리가 즉각적으로 느끼기 어렵도록 더디지만 건축은 우리의 삶을 확실히 바꾸면서 우리의 인격체를 완성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그래서 건축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건축이란 어떤 것이며 나아가 건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건축은 일본인이 그들의 근대 개화기였던 메이지 시대 때 만든 말이라고 한다. 그 전에 그들은 造家라는 단어를 건축대신에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건물이 아니라 한 집안을 만든다는 造家라는 단어가 建築이라는 물리적 운동만을 뜻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세우고 올린다는 육체노동의 이 建築이라는 뜻으로는 오묘한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건축을 설명하지 못한다.
영어의 architecture가 建築이라는 뜻 보다는 조금 낫다. 으뜸이나 크다는 뜻의 arch와 기술이나 학문이라는 뜻의 tect 라는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이 영어 단어를 직역하면 ‘元學’이나 ‘큰 기술’이 된다. 얼마나 건축이 중요하고 크면 그리 불렀겠는가. 심지어는 기독교의 조물주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가 정관사를 부친 The Architect로 기재될 만큼이니 대단한 직업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단어도 건축의 중요성을 강변하는 데는 적합하드라도 건축을 본질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좋은 단어가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건축이라는 말 대신 참 좋은 단어를 사용했었다. 한자말이긴 하지만 營造가 그것이다. 우리말로는 ‘지어서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다. 집은 세우는 게 아니라 짓는 것이다. 밥을 짓고 농사를 짓고 시를 짓듯이 집은 지어서 만드는 것이다. 짓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생각과 뜻과 마음을 통하여 전혀 다른 결과로 변화시켜 나타내는 것이다. 단순한 물리적 운동의 결과와는 그 방법과 과정이 다르며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르다.
그렇다면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면 집을 짓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바로 삶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즉 사는 방법을 만드는 것이 건축이라는 뜻이다.
건축의 평면도라는 그림은 이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집 안에서 일어남 직한 행위들을 추정하여 그 행위를 담는 공간을 정하고 그 사용자의 수를 예측하여 크기를 결정한 후 기능별로 그 순서를 정해 조직하면 기초적 평면도가 된다. 그 공간들의 관계를 놓고 건축가가 개개 공간의 긴밀도와 의미성을 부여하여 이를 정해진 방법으로 그리면 평면도가 완성되며, 이 평면도 속에서 살게 되는 우리는 싫든 좋든 그 평면 조직의 규율을 학습하며 적응해 나간다. 예컨대 생리작용을 해결하기 위한 공간인 변소도 옛날에는 불결한 곳으로 간주하여 집의 뒷켠에 두고 뒷간이라고 불렀지만 요즘의 주거에서는 평면도의 가운데에 배치되면서 이름도 화장실로 바뀌어 버렸다. 오랜 세월 안방이나 건넌방 문간방 같이 거리를 둔 위치에 따라 불렀던 우리 옛 집들의 공간이 70년대 집장수 집들을 통해 거실이나 식당 침실 등 목적을 갖는 방으로 바뀌면서 기능과 편리를 강조한 끝에 우리의 삶도 급격히 서양화가 되어버린 현대 주거사를 기억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이 평면도는 보는 그림이 아니다. 읽는 그림이다. 그것은, 평면도를 선으로 이루어진 도형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적혀 있는 건축가의 사유를 읽어 내어야 그 평면도에 표기된 삶의 조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가의 그림은 그의 사유를 어떻게 잘 나타내느냐에 그 가치가 있다. 그리는 기술에 소질이 있어 건축을 한다면 오히려 그 소질은 그의 사고의 과정을 방해하고 농도를 흐리게 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건축가의 그림은 그의 사유에 대한 기록이 되어야 하며 그 그림이 전문적 언어로 나타난 게 건축가의 도면이다.
따라서 건축가가 그림에 소질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단지 그는 그의 생각을 글로 쓰듯이 약속된 기호와 선으로 적어 나가면 된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문학적 소질이지 예술적 기예가 결단코 아닌 것이다.
흔히들 건축을 공학으로 분류하거나 예술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이 나는 못 마땅하다. 이는 건축이 가진 작은 속성을 오해한 결과라고 여긴다. 물론 건축에서 기술은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20세기 들어 전개된 기술의 시대에서는 기술에 대한 표현이 건축의 중요한 목표인 적도 있었으며, 눈부신 기술의 개발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개혁된 바가 크기도 하다. 이 기술의 속성은 항상 진보와 발전을 목표로 한다. 문제는 이 진보된 기술의 건축 속에서 우리는 더욱 행복한가 하는 데에 이르면 심사가 복잡해 진다.
고대 이집트시대에 있었던 노동자들을 위한 집합주택이나 초고속통신으로 모든 설비를 조정할 수 있게 된 현대의 원룸 아파트 주거의 평면 구조를 비견하면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는데 놀라움을 표할 것이다. 조선 시대의 선비가 살던 집의 평면을 잘만 모사하게 되면 우리의 현대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하는 놀라운 현대주택을 가지게 될 것임을 결단코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바로 기술의 진보가 우리의 삶을 그 비례 대로 진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때때로 퇴보해 버린 경우도 허다하며, 오늘날 기술의 발전이 몰고 온 가정과 사회의 분쟁과 갈등의 여러 병리현상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기술은 건축과 다른 것이며 다만 우리의 삶의 시스템을 때때로 편리하게 하고 굳건하게 하는 수단의 가치가 있는 하위의 개념이다.
건축예술이란 말은 애초에 없던 말이다. 이를 테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훈더르트 바써라는 미술작가가 아파트를 지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완성된 지 10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관광객까지 모으는 그 건물이 과연 건축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예술적이라고 평가 받는 이 건물은 예술일지는 몰라도 건축으로서의 가치는 별무이다. 이는 이 건물이 그 공동주택의 거주민을 위한 특별한 제안을 하지도 않고 있으며 주택의 내부구조 또한 건축가로서의 새로운 삶의 조직을 만들어 놓고 있지 않다. 다만 옆의 아파트의 주거형식과 차이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외벽을 어지러운 색채와 장식으로 그래픽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그 장식과 색채가 그 속의 삶의 시스템과는 아무 연관을 맺지 못한 체 그 벽면들은 하나의 도시적 스케일의 그림이 되어 칙칙한 비엔나의 거리를 화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건축이 아니다.
건축의 외형은 그 속의 삶의 시스템이 포장된 상태이다. 따라서 좋은 외관이나 모양은 그 시스템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가장 좋다. 건축의 중요성이 오브제로서가 아니라 환경으로서의 의 가치가 더욱 고양되어 가는 오늘날, 건축의 외관은 부차적인 것이며 평면의 조직과 그 공간적 표현에 종속적인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입면을 오히려 건축의 목적으로 잘못 판단하여 건축을 시각적 상징과 기호로서 취급하는 예가 수도 없이 많다. 가관은 건축을 일종의 조형예술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건축 속에 참다운 삶이 만들어지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우려스러운 일은, 기술과 예술에 빗댄 건축에 대한 이러한 그릇된 관점으로 잘못된 건축교육 제도를 만들어 바른 건축가를 기르는 일에 실패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건축대학이 홀로 독립하여 생기기도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드라도 건축은 항상 공과대학이나 예술대학 속에 속해 있는 게 전부였다. 공대의 커리큘럼 속에 건축을 집어 넣는다거나 예술대학 속에 꾸역 꾸역 집어 넣어 공학도로서 혹은 예술인으로서의 자질 향상을 위해 교육하면서 바른 건축가를 배양한다는 것은 망상일 수 밖에 없다.
굳이 건축을 다른 학문의 분류에 넣으려 하면 인문학에 가깝다. 문학적 상상력과 논리력, 역사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사물에 대한 사유의 힘이, 이웃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 속에 작업해야 하는 건축가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도구들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좋은 건축이란 어떻게 지어야 하나. 나는 이를 위한 세 가지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첫번 째는 합목적성에 대한 문제이다. 즉 그 건축이 소기의 목적과 기능을 잘 표현하고 있느냐는 것인데, 학교는 학교 같아야 하고 교회는 교회 같아야 하며 집은 집 같아야 한다. 무덤으로 쓰였던 피라미드를 흉내내어 음식점을 한다든지 민주적 의사결정을 목표하는 의사당이 봉건적 건물 형식이 된다든지 하는 것은 그 건축의 목적을 배반하는 결과이다. 이는 그 건축이 수행하여야 하는 프로그램을 다른 것으로 위장한 것으로 오독을 초래한다. 다시 말하면 좋은 건축이 될 가능성이 높을수록 그 건축이 가진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가 더욱 적확히 표현되어야 한다. 이러한 건축만이 장구한 세월을 지탱한 후 훗날 그 속에 담겼던 생활 자체가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둘 째는 시대와 관련이 있다. 건축은 대단한 기억 장치이다. 건축을 가리켜 시대의 거울이라고 일컫는 만큼 건축을 통하여 우리는 그 건축이 지어졌던 사회의 풍속과 문화를 알 수 있다. 고고학자들이 고 건축지를 발굴하고 환호를 하는 까닭도 그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즉 시대의 문화적 소산이 건축인 것이며 따라서 그 시대에 가장 적합한 공법과 재료와 양식으로 지어야 바른 건축이 된다. 초고속 정보화 시대를 사는 우리가 초가나 기와집을 다시 짓는다든지 하는 것은 옛 건축에 대한 학습이나 전시대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그 집은 어디까지나 선조들의 창작품을 흉내낸 박제이다. 19세기 말 소위 세기말의 위기에 처한 유럽의 건축과 예술의 지식인들이 모여서 그 위기의 시대를 구하고자 세쎄션 운동을 일으킨다. 오토 바그너 같은 당대의 건축가 뿐 아니라 구스타프 크림트, 구스타프 말러 등 그 시대의 문화를 주도한 지식인들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직감하며 구시대와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예술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엔나 시내에 그들의 새로운 작업들을 전시하는 전시관을 세움으로써 그들의 신념을 실천하였다. 요세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설계한 이 세쎄션관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졌다. ‘ Die Zeit Ihre Kunst, Die Kunst Ihre Freiheit /그 시대에 그 예술을, 그 예술에 그 자유를 ‘.
세 번째는 건축과 장소의 관계이다. 건축은 땅 위에 반드시 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점이 건축을 다른 조형예술과 구분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예컨대 조각이나 그림은 작업실에서 제작되어 전시장이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여 설치할 것을 목표하는 것이며 여러 곳을 전전하기도 한다. 물론 조각도 때로는 땅과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때의 조각은 조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건축적인 입장이 된다는 것이다. 건축은 현실의 땅과 항상 불가분의 관계일 수 밖에 없다. 이 사실이 건축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 이 현실의 땅은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땅들과 붙어 특별한 관계를 맺는 까닭으로 땅 마다 모두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땅들은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 있어 온 까닭에 장구한 역사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즉 이러한 공간적 시간적 성격이 한 땅의 특수한 조건을 만들고 그런 지리적 역사적 컨텍스트를 가지게 된 이 땅을 우리는 ‘장소’라고 부른다. 이 장소의 성격을 제대로 반영한 건축이 바른 건축이 됨은 불문 가지이며 이러한 건축의 집합이 한 지역의 전통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미국과 한국의 집은 달라야 하며 서울과 부산의 집은 다른 형식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건축은 집을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집은 하부구조이며 그 집 속에 담기는 우리들의 삶이 그 집과 더불어 건축이 된다. 그러하다. 우리의 삶을 짓는다는 것이, 건축의 보다 분명한 뜻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건축의 목표는 무엇일까. 당연히 우리 인간의 삶의 가치에 대한 확인이다. 우리들의 선함과 진실됨과 아름다움을 날마다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건축이 참 좋은 건축임에 틀림이 없다. 성경의 잠언에 이런 말이 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한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건축은 우리의 삶이 지혜를 통과하면서 지어져 나가는 것이다. 이를 손으로는 결코 세울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