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난 여행에서 배운다

중앙일보 사회

2011. 1. 29

요즘은 건축대학이나 건축학부로 건축교육이 독립된 대학교가 많이 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건축은 공과대학이나 미술대학의 일개 학과로 속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게 우리 사회가 건축을 공학이나 예술의 일부분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이 사회적 인식의 상황은 여전하다. 이는 우리가 다분히 시지각적 대상으로 건축을 본다는 뜻이다. 즉 크다거나 작다거나 모양이 예쁘다거나 하는 이런 수준의 이해로는 건축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건축은 어떻게 보아야 그 본질을 알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하면, 공간의 조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외관이란 내부공간을 감싼 결과일 뿐이어서 부차적인 것이다. 그 공간의 조직이란 우리가 사는 방법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집의 거실과 주방 침실 등을 얼만큼 크게 하고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 사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건축설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공학은 그 공간의 조직이 실현되도록 뒷받침한 기술이며, 미술로 보는 것은 그 공간을 감싼 겉거죽을 조형물로 느낀 결과라, 이 모두가 건축의 일부분적 속성일 따름이지 건축의 본질이 아니다.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은 우리를 만든다.’ 즉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말이다. 예컨대 부부가 오래 살면 닮게 된다는 말도, 그 이유를 따지면, 다른 공간에서 살던 사람이 한 공간에 같이 살게 되면서 그 공간의 규율을 따르고 적응하게 되어 같은 습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사고가 같아지고 급기야는 얼굴까지 닮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얘기가 가능하다. 좋은 집에서 살면 좋은 삶이 되기 마련이고 나쁜 집에서 살면 그 삶은 나빠진다.
건축설계라는 일이 남의 삶을 조직해주는 것인 만큼, 건축가가 좋은 집을 설계하고 짓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집에 사는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가져야 하고, 이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지극한 관심의 토대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바른 건축공부란 우리 삶의 형식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 남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문학과 영화 등을 보고 익혀야 하며, 과거에 어떻게 산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들추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가를 알기 위해 철학을 공부해야 하므로, 건축을 굳이 어떤 장르에 집어 넣으려 하면 인문학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인문학의 공부는 대개 책으로 얻는 지식이어서 추론과 상상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삶의 실체를 그려야 하는 건축가에게 가장 유효한 건축공부 방법이 있으니 바로 여행이다. 여행을 통해 만나게 되는 다른 이들의 삶이 이루는 실체적 풍경은, 그 전부가 건축설계의 구체적 결과요 주어진 문제의 해결책인 것이다. 여행이란 무엇일까? ‘여행의 기술’을 쓴 알랭 드 보통은 그 책에서, 여행은 현실에서 만나는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을 벗어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견해에 적어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의 말이 옳다면, 여행은 도피 수단밖에 되지 않으며 일상을 증오로 몰 뿐이어서 불건전하다.

내가 여행을 통해 얻는 첫 번째 유효함은 진실의 발견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일상의 삶을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축적되는 환상이 있다. 저 멀리 내가 가보지 않은 곳에 사는 이들과 그들의 환경에 대해 읽고 들은 지식으로 생긴 상상인데, 이는 가공이라 거짓이기 쉬우며 그래서 힘이 없다. 특히 건축은 현실의 땅을 디디고 선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통해 현장에 서서 그 건축의 실체를 보면서, 내가 가졌던 환상이 무너지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해 왔다. 바로 진실은 현장에 있고, 그 실체에는 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온 사람의 얼굴은 늘 광채를 띠게 된다.
여행이 우리의 삶에 유효한 두 번째는, 어쩔 수 없이 아웃사이더의 입장이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타자화된 이방인은 싫던 좋던 현실에 비켜서서 그 현실을 끊임없는 비교와 평가를 통해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사유의 세계로 모는 자이다. 자기 스스로를 제도권 밖으로 추방하여 경계 속의 현실을 목도하고 때론 비판하며 성찰하는 자, 이를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이라고 했다. 그 결과로, 여행은 우리로 하여금 종파주의와 그릇된 편견과 헛된 애국심에서 자유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자주하는 사람은 가진 것 별 없어도 더없이 풍요롭게 보인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는 시간에 나는 이베리아의 평원을 지나는 여행길에 있을 것이다. 환상과 실체 사이에 있는 간극의 크기를 또 절감하게 될 게며, 이방인 된 즐거움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