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위의 집

생활성서

2022. 2. 01

지난 호의 글을 쓰고 생활성서 편집진에게 보내 드렸더니 ‘나와 카톨릭’이라는 시리즈제목으로 제 글을 연재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카톨릭 바깥에 있는 제가 가진 카톨릭에 대한 관점들을 쓰라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우선 이 질문이 떠 올랐습니다. 나에게 카톨릭은 무엇일까?

저는 카톨릭이라는 단어 자체를 좋아합니다. 카톨릭을 천주교와 동의어로 알고 쓰지만 원래의 그 뜻은 보편성입니다. 교회에서는 2세기부터 이 단어를 썼다고 하는데, 기독교의 대표적 기도문인 사도신경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에서 제정되어 11세기 교회대분리(Schism) 이후 서방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기도문으로 지금은 천주교 뿐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사용하고 있지요. 이 기도문의 14행에 카톨릭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라틴어로 된 사도신경에는 이렇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이를 천주교에서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라고 읽고, 개신교에서는 ‘거룩한 공교회’ 라고 읽습니다. 또한, 16세기 영국의 헨리8세가 로마교황으로부터 영국교회의 독립을 선언하며 창설한 교회를 ‘Holy Catholic Church’라 칭했는데 이를 우리는 단어 그대로 ‘성공회(聖公會)’라 번역하여 불렀습니다.

그러니 카톨릭교회라는 것은 사실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모든 교회를 의미하는 단어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기본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겝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러했습니다. 보편적 가치를 강조했으니 누구든지, 어디에 살았든지, 무엇을 했든지, 자신을 버리고 가르침을 좇겠다고만 하면 다 받아 제자로 삼으셨지요. 그래서 예수였으며 그로써 기독교는 세계의 종교로 번창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카톨릭이라는 이런 보편성이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불교나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이 그토록 많은 이유도 불경이나 코란을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로 삼는다는 것이라 그 종교는 그들에게 보편성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카톨릭은 성경을 기초로 하는 구별된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별한 보편성. 사실은 제가 하는 건축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빈자의 미학’이라는 말을 내걸며 건축설계를 해왔습니다. 가난한 자가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이들을 위한 미학이며, 가짐 보다는 쓰임이, 더함 보다는 나눔이, 채움 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변하는 저의 건축방법론입니다. 저에게 이는 건축적 진리여서 이 속에서만 있으면 저의 건축은 자유롭습니다. 이를 책으로도 펴내며 지난 30년간 이 주제를 붙드는 과정에서 동의하고 지지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생겼으니 어느 정도 보편성이 생겼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개인적 주장이 훌륭해도 남들과 공유할 수 없다면 그저 지나가는 외침으로 끝날 뿐이지요. 그래서 특별한 보편성, 카톨릭이란 말이 저에게는 귀하게 들립니다.

제가 카톨릭에 갖는 동경이 또 있는데 바로 신부님과 수녀님 혹은 수도사들의 옷입니다. 사실 저는 제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릴 적에 학교를 마치고 교문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교복을 벗어제쳤고 지금도 현대인의 제복인 양복이나 넥타이를 거의 착용하지 않고 다닙니다. 철없게도 여전히 제 잘난 맛을 좋아하는게지요. 이를 좋은 말로 정체성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사제복이나 수녀복은 오히려 그런 개인의 정체성을 결별하는 결단의 표식 아닐까요? 세상의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한 이들만이 입을 수 있는 옷. 그래서 그 제복은 마치 고통과 인내와 연단의 실들로 직조된 것으로 저에게 보입니다. 그래서 더욱 경외합니다.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자유를 얻어야 하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물질로부터, 육체로부터 그리고 정신으로부터 자유, 이를 얻기 위해 사는 청빈과 동정과 순종의 삶. 그렇기 위해서 세상의 경계 밖으로 단호히 떠납니다. ‘권력과 지성인’이라는 책을 쓴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을 자발적 추방자라고 칭하면서 그들 때문에 내부의 사회가 진보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경계 밖은 얼마나 혹독할까요? 춥고 어둡고 쓸쓸하고 어쩌면 천길낭떠러지 같을 그곳은, 먹고 놀기 좋아해서 늘 일탈을 꿈꾸는 저로서는 감히 꿈꾸지도 못하는 곳입니다. 이따금 지식인인 체하며 슬쩍 사회의 경계 밖으로 발걸음을 디뎠다가도 춥고 배고파서 황급히 다시 돌아오는 접니다. 한심하지요? .

그럼에도 저는 참으로 수도원을 동경합니다. 얼마전에 서양의 수도원을 순례한 내용을 담아 ‘묵상’이라는 제목으로 책까지 내었습니다. 세상의 경계 밖으로 떠나서 세상의 끝인 듯 벼랑 위에 혹은 깊고도 깊은 산속에 간신히 지은 수도원을 마주할 때면, 그게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 속에 건축이 가진 진실들을 그 장소에서 발견하곤 했고, 제 건축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그중 몇몇은 앞으로 소개도 하겠지만, 도대체 변변한 장비 하나 없었을 그때 그곳에서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건축을 지을 수 있었을까요? 그게 다름아닌 절박함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그 폐허의 바닥에 앉아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건축이 기술적 성취나 예술적 안목의 소산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건축은 생명에 관한 일이며 소망의 결정입니다. 간절함이 빛을 부르고 그 빛이 어두움을 뚫고 내부를 밝히며 우리를 존재케 합니다. 그게 건축의 본질이라는 걸 저는 수도원에서 배웠던 것입니다.

아, 수도원 순례 중에 경험한 기쁜 순간 하나만 우선 소개합니다. 프랑스알프스 산맥의 끝에 있는 그랑샤르트레즈 수도원은 봉쇄수도원의 원조로 지금도 외부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곳입니다. 2km 밖에 이 수도원의 전시관이 있어 겨우 거기를 가 볼 뿐인데 거기에 전 세계에 산재한 봉쇄수도원의 분포지도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아시아에는 오직 한국에만 두 군데가 표시되어 있었으니 너무도 기뻐했고 감사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용어 하나가 있습니다. 피정. 원래,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머문 일이 그 시작이라고 들었습니다. 경계 밖에서 사는 일이 두려운 이들에게 일시적이라도 세상 밖에서 묵상의 기회를 주는 일이 피정이겠지요. 알폰소 리구오리 성인은 피정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온전히 들어와, 홀로 머물며, 다른 이 되어 나가라. (intra toti, manete soli, exite alii)” 참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이 떠 오릅니다..

최근에 제가 특별한 일을 맡았는데 바로 왜관수도원 내에 짓는 피정의 집입니다. 이 유서 깊은 수도원에 피정을 위한 건축을 제가 설계한다는 일이 두렵기 짝이 없었지만, 끊임없이 절박함으로 지혜와 명철을 구하며 설계를 마쳤습니다. 내년이면 완공되어 나타날 것으로 압니다.

설계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이 건축에 “경계 위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관수도원 서측의 경계에서 세상과 맞닿는 장소이기 때문 만은 아닙니다. 세상의 경계 안에서 사는 우리가 우리 내면에 흐르는 존엄성이 흐려질 때, 세상의 경계 위에 와서 자신을 버리고 홀로 머문 후 ‘특별한 보편적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다른 이 되어 나가는 기적 같은 일을 이루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이 이 건축 속에서 매일 일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꼭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야 저는 제게 부과된 도구적 사명에 조금 순종하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