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도시

중앙일보

2001. 8. 25

베를린의 포츠담 광장 지역은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유럽의 중심으로도 불릴 만큼 베를린의 문화적 중심지였다. 전쟁으로 처참한 폐허가 된 이곳에 베를린 장벽까지 지나가게 되면서 이 장소는 20세기의 이념 대립의 중요한 상징이 된다. 그러다 지난 1989년 11월 9일, 근 반세기의 냉전 속에서 온갖 비극적 현대사를 기록하던 이 장벽이 무너졌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었으므로 온 세계가 충격과 환호로 뒤엉킨 날이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놀랍게도 다임러 벤츠와 쏘니는 연합하여, 이 폐허의 도시를 재개발하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필시 저 거대 재벌은 이 역사적인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한 것이다. 그 이후 그들의 말대로 이 재개발을 위해 국제설계경기가 비상한 관심 속에 진행되었고 논란 끝에 상업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안이 채택되어 실현된다.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후 호화 빌딩들로 채워진 현란한 도시가 나타난 것이다. 자본주의의 승리였으며 명멸하는 네온사인이 과거의 비극을 씻는 그런 새로운 도시라고 믿었을 게다.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에 맞추어 이 도시가 완공되고 있을 때, 런던에서 발간된 건축신문에 이 도시를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 글의 제목은 ‘자본이 붕괴시킨 역사의 도시’ 이다. 즉, 장구한 세월동안 쌓여 온 역사의 흔적을 깡그리 없애고 천박하게 화장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건축 지성의 학살이라고 까지 그랬었다.

그 포츠담 광장 앞에 켐퍼 광장이란 곳이 있다. 이곳은 패전국 독일이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라인강의 기적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60년대 초, 제일 먼저 재개발한 곳이다. 그들은 베를린 장벽이 이웃 한 이곳에, 나치를 피해 미국에 건너 갔던 불세출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로 하여금 국립현대미술관을 짓게 하고 이어 베를린 필하모니 홀과 국립도서관들을 세웠다. 즉 문화의 도시를 건설하여 베를린 시민의 자괴감을 위로하였으며, 그들의 자긍심을 곧추 세워 동독의 공산체제에 대한 자유국가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랬었다. 문화로 다시 세운 이 켐퍼 광장 지역은 비록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현대건축의 아주 중요한 교과서로 남아 있다.

베를린의 도시 이야기를 좀 더 하면 나치시대의 도시계획을 빼 놓을 수 없다. 배타적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제3제국을 꿈 꾸는 히틀러에게는 알베르트 스페어라는 건축가가 곁에 있었다. 이들은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으로 베를린을 개조하기로 한다. 이들이 그린 도시계획안을 보면 로마제국의 장엄한 건축을 흉내내어 기념비적인 규모의 신전 같은 건물을 가운데 두고 강한 직선의 축으로 모든 이들에게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 그런 도시였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나 인간의 존엄성은 추방되고 지독한 편견과 맹신과 광기 만이 가득 찬, 비뚤어진 이념이 만든 도시의 전형인 것이다. 다행스럽게 이 도시는 실패하고 말았다.

도시는 이렇듯 여러 가지 동기와 목적에 의해 만들어 지지만, 그 바탕은 그 사회의 컨센서스이다. 무서운 것은 탐욕이나 편견에 의한 컨센서스의 조작이다.
우리의 이 땅에 세워진 도시를 보자. 그간 웬만큼 신도시들을 만들어 왔음에도 우리의 신도시들은 그 성격이 대개 비슷하여 서로 분간하기 어렵다. 바로 이 신도시들을 만든 논리가 정치와 자본에 의해 주도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신도시 뿐 아니다. 기존도시를 재개발하는 방식도 문화나, 우리의 삶의 질이 아니라 불순한 정치적 의도와 자본의 추잡한 욕망이 그 원동력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보다 더한 우울이 있다. 나는 요즘 우리의 사회가 이념으로 나뉘어져 갈수록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 자못 불안하다. 솔직히 말하면 이들 모두 패배하기를 원한다. 만약에 이들 중 한 편이 승리하여 그 편견이 주도하는 사회가 된 후 그들에 의해 우리의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 진다면, 그 도시는 필시 우리의 보편적 가치를 위협하는 배타적 이념의 도시가 될 것 아닌가. 그런 광기의 도시에서 우리의 삶이 더욱 왜곡될 것은 불문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