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광장 재론

경향신문 '오피니언'

2021. 4. 21

4년전인 2017년1월, 매주말마다 광화문광장이 촛불로 뜨거워지는 것을 지켜보며 한 일간지에 “광화문광장은 광장일까”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졸문을 다시 들추는 게 부담스럽지만 요즘 새 서울시장의 등장으로 광화문광장이 갈 길을 또 잃고 심지어 하찮은 내 이름까지 항간에 나돌아 재론한다.

광장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사람이 모여 산 흔적으로 가장 오래된 유적이 만년전의 것이니 그때에도 광장 같은 시설이 있었겠지만 건축역사에 광장을 뜻하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가 시작이다. 항구 옆에 있어 배를 통해 들어온 물품을 거래하던 곳이 민중들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장소로 기능이 확대된 게 아고라여서, 그 어원에는 ‘거래하다’, ‘말하다’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즉 아고라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 광장으로 쓰인 것인데, 장소로서 광장을 뜻하는 말은 ‘문밖’이라는 어원을 갖는 로마시대의 포럼이다. 로마인들이 집에서 잠자는 시간 제외하면 모두 여기로 나와 일상을 보낼 정도로 포럼은 도시의 거실이었다. 팍스로마나를 외치며 세계를 정복하던 시절, 로마는 정복지마다 군단 캠프를 설치하여 중심에 포럼을 두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캠프는 도시가 되고 포럼은 그곳의 가장 오래된 광장이 되었다.

카스트라라 부른 그 캠프는 평면의 도형이어서 이를 실현하자면 평지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평지의 도시, 이는 도시를 만드는 개념이 되어 단일중심을 갖는 중세의 이상도시로 이어지고 기능과 효율을 중시한 현대의 마스터플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어 서양도시의 전통으로 자리잡는다. 특별한 지형 지물이 없는 평지에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직선의 도로로 땅을 구획하는 일이 우선이다. 이 도로는 통행이 목적이므로 시민이 모이도록 사각형의 면을 그려 광장을 만들고, 다른 곳과 구별하기 위해 점 같은 랜드마크를 세운다. 이런 점, 선, 면의 구성이 서양 계획도시의 근간으로 늘 평면적이다.

70퍼센트 이상이 산지인 우리 땅에서 도시 만들기는 서양의 평지도시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평지는 논을 경영해야하는 까닭에 마을은 비탈진 곳에 자리잡는다. 집터들이 먼저 정해지고 나면 그 집터 사이의 공간이 길로 쓰이는데, 이 길은 짐 실은 나귀가 다닐 수 있도록 완만한 지형을 따라 이어져서 모두가 부정형이며 좁다 넓다 휘어지기를 반복한다. 철저히 공간적이다. 통행만을 위한 곳도 아니다. 좀 넓게 된 길의 한쪽에는 주민들이 모이게 되며 후미진 길은 아이들이 놀이터가 되고 양지바른 길에서는 아낙들이 모여 같이 노동도 한다. 그래서 길이며 광장이고 놀이터와 일터가 같이 있는 집밖의 입체적 공간, 우리의 전통적 공공영역이었다.

그러니 평지를 전제로 한 서양의 광장이 구릉지 많은 우리들 도시에 생기기 어렵다. 그런데, 서울 역시 산세 뚜렷한 지형이지만 정도전이 북한산과 관악산을 잇는 연결선 위에 경복궁을 두고 광화문 앞의 길을 넓혀 양 옆에 관아를 설치하면서 육조거리라는 광장 같은 길이 나타났다. 한양도성의 중심공간으로 6백년 조선왕조의 축이 된 이곳은 그 자체로 역사적 상징이 되었고, 오늘날 서울만이 아니라 국가의 축으로도 상징성을 가지며 우리 모두에게 깊이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광화문광장에 서있게 되면 마치 역사의 중심에 있는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 길다란 공간은 방향성이 있어 경복궁 너머 북악의 기슭 청와대로 향한다. 높은 곳과 낮은 곳, 밀실과 광장, 전제와 민주, 소위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극적으로 대치하는 장소가 된 이곳은 다른 도시의 어느 광장보다도 특별하다. 어쩌면, 늘 긴장이 팽배하여 혁명의 기운이 움트는 곳, 그래서 여기로 모여 산기슭 높은 권력자를 향해 소리친다.

위험한 곳이라 여겼을까, 독재정부시절에서는 늘 차량으로 메워 사람들의 집합을 어렵게 했다. 그러다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옷을 입은 시민들이 모든 공간을 점령하고 환호하며 축제의 굉음을 올리면서 우리 모두가 이 광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목격하고 만다. 그러다 노무현정부시절, 박정희시대의 콘크리트 광화문이 경복궁의 축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축에 맞춰 잘못 지었다는 것까지 밝혀져서 민족의 중심축을 바로 잡을 필요가 제기되자 차량으로 뒤덮인 육조거리를 일상의 광장으로 바꾸는 계획까지 요구되었고,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요청으로 내 생각을 전달한 게 2005년이었다.

사실 이 공간을 바꾸는 일은 1970년대 내 대학시절부터 국전의 건축부문에 꾸준히 제안되던 프로젝트였다. 대개는 “민족통일의 성전” 같은 거창한 제목이 주류를 이뤘지만 내용의 대부분은 보행위주의 공간에 대한 제안이었으니 이 공간을 광장으로 전환하는 일은 오래된 소망이었다. 2005년의 내 제안을 이명박시장의 서울시는 받지 않았다. 곧이어 등장한 오세훈시장은 그 안을 편측광장이라고 칭하며, 중앙이 좋은지 편측이 좋은지 시민에게 묻겠다고 했다. 정치인 다운 생각이었지만 이는 이미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정황파악이 어려운 일반시민들이 편법의 뉘앙스가 풍기는 편측광장을 당당하게 들리는 중앙광장 보다 선호할 리가 없었다. 뻔한 결과를 알리며 드디어 차도로 둘러싸인 섬 같은 공간이 들어선 것이다. 목숨 걸고 건너야 하는 이 기념비적 광장에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환담을 나누는 그런 행복한 일상이 있을 리가 없다. 완공된 후 경향신문에서 마련한 서울시 담당본부장과의 회동(경향신문 2009년8월26일자)에서 나는 ‘세계최대의 중앙분리대’라고 쏘아 붙였다.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차도를 포함한 전체 영역이 석재로 포장되면서 축제나 행사로 차량통행이 전면 통제되는 날이면 늘 부러웠던 서양의 오래된 광장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사실 유럽의 보행전용도로라는 것이, 오전에는 차량통행을 허용하는 곳이 대부분이며 오후에도 일부 차량은 속도를 한껏 줄여 운행시키기도 한다. 광화문광장도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차량통행과 보행전용을 운용하면 되는 일이어서, 중앙이니 편측이니 하는 논쟁은 이분법적 사고의 소모적 주장일 뿐이다. 이 모두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로운 디자인이 그래서 필요하였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보다 중요한 게 나에게 있었다. 문재인정부가 촛불혁명의 결과로 등장하면서 광화문시대를 열겠다며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다. 광장은 독립된 공간일 수 없다. 북쪽으로 경복궁과 청와대 그리고 북악산으로 연결되며 남쪽으로 태평로와 남대문까지 연결되는 축선상의 공간이 광화문광장이다. 만약에 누구든지 이곳에 가서 경복궁을 지나 청와대 본관을 거쳐 북악산까지 쉽게 오를 수만 있다면, 이는 이 중요한 국가의 축 전체를 국민이 지배한 결과여서, 민중과 권력이 맞붙었던 오랜 대립과 갈등의 구도를 끝내는 일과 같다. 그러면 이들 공간의 연결은 바로 민주주의의 승리를 확인하는 동선이 될 것이라고 오랫동안 그려왔고, 바로 여기에 광화문광장의 재구조화가 갖는 목표를 두어야 했다.

진작 이 일에 관심을 가지며 시민자문단과 위원회를 꾸리고 정말 수도 없이 많은 의견을 수렴한 박원순시장은, 초라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광화문 앞의 작은 마당을 월대까지 복원시키는 역사광장과, 세종문화회관 쪽 차도를 광장으로 편입하여 넓히는 시민광장, 두 개의 광장을 두는 개념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국제설계공모를 진행하여 최종안을 선정하기에 이르렀지만, 청와대가 광화문시대의 이행을 중지하겠다며 공약포기를 발표하면서 나의 오래된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수없이 많은 논의과정을 거쳤는데도 몇몇 단체에서 또 반대의견을 내었고, 급기야 박시장의 돌발적 죽음으로 나는 이 숙제를 털어버리며 오래된 소망을 지우고 말았다.

그런데 다시 서울시의 수장이 된 오시장이 선거유세 중의 한 회견에서, 나와 전혀 관계없이 진행된 지금의 광화문광장 공사를 내 이름까지 소환하며 비난했다. 아마도 그가 만든 광장을 세계최대의 중앙분리대라고 말한 게 그리도 아팠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광장은 다시 그의 탁자 위에 놓여있다.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든 한 가지는 안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