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덕교회

2006. 6. 17

내가 1989년 공간에서 나와 독립했을 때, 내가 ‘김수근건축’을 잘한다고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을 때, 승효상건축을 말하고 그려야 할 때, 나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느 글에 썼던 대로 마치 밤바다에 내어 던져진 조그만 배의 선원이었다. 그때에 내게 많은 도움을 준 이들이 90년에 형성한 4.3그룹의 멤버들이었다. 열정에 사로잡힌 우리들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밤을 지새우며 건축을 토론하였고 서로에 대한 격려와 질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들을 통해, 그 전에 15년을 김수근건축에 갇혔던 내 자신을 일깨우는 실마리를 찾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나를 형성한, 김수근선생과는 너무도 다른 나의 어린 시절이 그것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전까지 부산에서 지냈지만, 사실 부산이라기 보다 한 교회에서 지냈다고 봐야 더 정확할 정도로 나의 어린 시절은 교회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 교회는 아버지가 직접 설립하고 지은 교회였으며 초등학교, 중학교시절을 보낸 집도 교회와 담벼락을 마주하는 곳이라 부모님의 절대적인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나는 내 성정을 교회 속에서 키웠다. 칼비니즘은 내 정신이었으며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이뇨?’로 시작되는 대소요리문답은 내 삶의 텍스트였다. 그 속에 있으면 몸과 마음이 편했다. 진리가 자유하게 한다는 것을 믿었다.
교회의 마당은 내 놀이터였고 종탑의 다락은 내 공부방이었으며 나는 교회마당 한 켠의 무화과나무와 더불어 자랐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고등학교까지의 내 삶의 모든 형체가 고스란히 베인 듯한 예배당에 엎드려 마지막 기도를 하고 그 교회와 이별했다.
서울로 온 후, 나는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못했다. 어쩌다 갔어도, 떠나 온 교회의 정경이 나를 새로운 교회에 적을 두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교회를 멀리하고 만다. 어쩌면 나는 기독교를 믿은 것보다 그 교회를 더 믿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교회가 구덕교회이다.
구덕교회를 떠난 지 무려 35년이 되는 작년 여름,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부산의 옛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구덕교회를 새로 짓는다는데 아무래도 내가 설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멍하게 전화를 받다가 후닥딱 정신이 들어 자초지총을 알아보니 이미 설계공모가 지역신문을 통해 공고가 된 상태이며, 구덕교회에서는 내가 이미 ‘유명한’ 건축가가 되어있으므로 이런 작은 교회설계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어서, 혹은 구덕교회를 잊었으리라 여겨 연락조차 취하지 않았다는 것 등등을 알게 되었다. 공모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불과 두 달 남짓한 시간과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결국은 당선되었다. 물론이었다. 나는 어떤 조건이라도 이 교회만은 설계하여야 하였다. 내가 서울로 오기 전 그 교회당에서 마지막으로 드린 기도의 내용-어쩌면 신에 대한 어설픈 서원이었지만 나는 이를 잊을 수 없었다.
나는 공간에서 건축수업을 다시 받으면서 김수근선생의 특별한 배려로 3년차 되던 해에 마산성당 설계를 책임 지게 되었다. 선생은 천주교나 기독교에 대한 세부지식이 없어 내가 가진 지식에 상당부분 의지하게 되었는데 그 기회를 빌어 나는 마산성당의 평면내용을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었다.
사실 기독교 교회당의 원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율법적 해석에만 전전긍긍하던 예루살렘 성전의 행태에 실망한 예수는 들판에서 산 위에서 해변에서 민중들을 모아 진정한 율법을 전하였으니 기독교건축의 원형이라면 야외의 장소이다. 더구나 신은 무소부재한 존재라 교회당에 가야만 신을 만난다는 것은 교리에 반하는 관념이다.
요즘의 교회건축에서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종교건축과 종교적 건축을 혼돈하고 있는 것이다. 고딕의 정신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고딕의 흉내만 어설프게 내고 있는 사이비 고딕양식, 엉망진창인 건물 위에 뾰쪽탑과 붉은 네온의 십자가를 세워 교회인 양 하는 서글픈 풍경이 우리에게 보편화된 종교건축의 양식처럼 되었다. 이들 교회일수록 굳게 담벼락 치고 대문을 닫은 자세가 결단코 종교적 분위기가 아니건만 종교건축이라고 우기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마산성당의 평면에서 강조한 것은 교회당이 아니다. 교회당보다는 교회를 찾아오는 풍경을 그린 것이다. 집에서 나와 이 성당을 향했을 때, 이미 그 신자는 종교적 행위를 시작한 것이라고 여겼으며, 마산성당의 영역에 들어가면서 연속된 그 행로를 건축화하려 하였다. 길다란 경사로로 표현된 그 행로 속에 느리게 오르는 신자들을 담아 종교적 풍경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부르심의 기적과 응답의 은총’이 찬연히 펼쳐지는 것 아닐까. 종교적 축제라고 이름하였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마산성당은 어릴 적의 구덕교회를 다시 해석한 것이라고 해도 된다. 교회 앞의 다소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 햇살 가득 찬 교회마당을 보는 느낌은 언제나 따스한 것이었고 평화였다. 나는 이 길의 시작점에만 서면 이미 마음은 다른 세상이었다.
종교적 상징성을 강조하는 김수근선생의 지시에 직각의 평면은 불규칙한 도형으로 바뀌었고 조형은 플랫 슬래브에서 중심성을 갖는 경사지붕의 유니크한 모습으로 진전되었으나, 애초의 평면 조직은 변하지 않았다.
이 이후 공간시절에 수행한 경동교회도 그 ‘종교적 축제’를 위해 인접도로에서 길다란 계단의 통로로 사람들을 오르게 했다. 옥상 위의 하늘교회를 설정하면서 이 축제의 행렬이 하늘 속으로 이어지게 하여 축제는 승화하였다. 불행히도 하늘교회는 최근 실내공간으로 바뀌면서 그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독립 후, 지은 돌마루 공소는 이 믿음의 행로를 철저히 드러내는 데 목표를 두었다. 논두렁에서 시작한 느린 경사로는 경내를 지나면서 14처의 옥외 참배길과 이어지고 각도를 틀어 다소 내려가면서 본당 내로 들어가게 하였다. 특히 이 행로에 담기는 믿는 자들의 풍경이 돋보이도록 무채색의 콘크리트를 배경으로 삼았다.
그 이후 설계한 중곡동성당에서도, 익산에 지은 감리교회에서도 그 형태는 다르지만 평면의 내용은 서로 비슷하다. 교회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조우하는 마당과 길, 이어지는 지면과 다른 레벨의 데크 그리고 문을 열면서 전개되는 빛과 침묵…내가 즐겨 쓴 건축어휘지만, 또한 이 어휘들은 수 많은 역사적 걸작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들을 건축의 요소로만 이해하여 그 요소로 집합된 시나리오가 가지는 폐쇄성을 염려하기도 한다. 오해를 풀자면, 적어도 나에게 그 요소들은 한갓 전체구도를 위한 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교회는 굳이 본당의 강대나 제대까지 가야 완성되는 선적인 것이 아니며, 세상을 속세와 성역으로 이분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부분으로도 교회를 완성하고자 했다.
새로운 구덕교회의 땅은 내 아버지가 지었던 내 어린 시절의 집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집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무려 그 집을 떠난 지 40년이 되었는데…그 집과 그 앞의 작은 골목길, 심지어 거친 몰탈 마감 위의 계란색 페인트까지 그대로 있었다. 건축이 가진 기억의 능력은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지난 온갖 추억들이 나를 삼켜버렸다.
나는 그 기억들을 새로운 구덕교회에 담고자 했다. 길과 마당, 무화과나무, 골목의 풍경..비록 추상화 되긴 하겠지만 모든 요소가 설계내용 속에 있다.
이 교회의 완성은 나에게 각별할 것이다.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걸머진 무거운 짐을 벗는 일인지도 혹은 더더욱 무거운 짐을 지게 될 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35년 전 신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