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

2007. 4. 03

건축가인 나를 알고 있는 이들은 아마도 모두 나의 스승이 김수근선생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부인할 도리가 없다. 무려 15년에 걸쳐 건축가의 올바른 자세를 교육받으며 수 많은 건축적 지식과 지혜를 선생으로부터 받았으니 나는 분명한 그의 제자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내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찌 그분에게만 배웠겠는가.
내가 무능력을 이유로 외면했던 학교 교수님들도 되돌아보면 나에게 시시때때로 중요한 건축의 지혜를 주셨음을 지금에야 깨닫고 있다. 또한 선배들이나 동료들로부터 받은 가르침도 내 건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역할임을 고백치 않을 수 없으니 이분들 모두가 나의 스승인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가 직접 겪었던 분들만 나를 가르친 것이 아니다. 내가 책에서 만난 역사 속의 그 수많은 사람들, 그들로부터 나는 얼마나 깊은 영감과 학식을 전수받았던가. 어쩌면 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부분적으로 짜집어 내 것인 양 떠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단 역사 속의 실제 인물뿐만 아니다. 픽션의 소설과 영화 속에서 만나는 그 숨가쁜 주인공들의 삶과 그들이 절규하는 교훈들은 또 얼마나 나의 삶을 바꾸게 했던가. 그들도 모두 나를 가르친 스승일 것이다.
그것뿐이랴. 내가 매일 만나는 우리 동네 사람들, 혹은 길거리에서 지나칠 뿐인 모르는 이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또 나는 얼마나 가르침을 받는가. 물론 외국여행길에서 만나게 되는 정말 낯선 이들의 풍경에서도 나는 배운다.
사람의 이야기뿐만 아닐 것이다. 아침에 창호지를 투과하며 밀려오는 햇살에서,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서, 문틈을 비집는 바람결에서, 심지어 작은 숲에서도 나는 배우고 배운다.

몇 해 전에, 노벨상 작가인 사라마구가 신문에 인터뷰한 기사를 보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어디에서 배우는가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그가 쓴 글이 그의 스승이라고 했다. 더 이상 김수근선생으로부터 배울 재간이 없는 지금의 나로서는 사라마구의 말처럼 요즘의 내 건축선생은 내가 지은 건축이다. 즉 내가 설계하고 완공한 건축을 보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무슨 말일까. 스스로에게서 배운다는 뜻이다.
그렇다. 나는 이제 내 스스로에게서 배운다. 오직 마음만 새롭게 하면 스스로 변화하여 분별하게 된다고 성서에 써 있는 것처럼(로마서12장2절), 나는 어제와 다른 새로운 하루, 오늘을 시작할 때마다 새롭게 되어 다시 배우는 것이다. 어찌 신기롭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