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시장에서 코번트가든까지

중앙일보 '중앙시평'

2017. 7. 29

브레인이라는 통계회사의 2016년 세계도시에 관한 자료에 의하면 15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의 숫자는 전 세계에 2896개라고 했다. 그 많은 도시에서 서울은 어떻게 차별될까? 우선 서울은 최근 다소 인구가 줄었어도 1000만 명이 사는 메가시티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31개 도시가 있다고 유엔의 보고서는 밝힌다. 그 가운데서 산수풍경을 지닌 도시를 가리면 숫자는 절반 이하로 줄며, 서울은 내부에도 산을 가진 으뜸의 풍경도시다. 셋째로 역사를 따지면 1000년을 지속한 도시는 그중에서도 몇 안 되고, 넷째로 한 나라의 수도로서 600년 이상을 지속한 곳이면 거의 서울밖에 남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거대 도시라면 단연코 서울일 수밖에 없다. 대륙의 끝과 바다의 시작에 놓여 있다는 이 매력 있는 지정학적 조건만으로도 서울은 독보적이다. 그런데 실제 그럴까?

요즘에 이날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이틀 전 7월 27일은 우리들 삶의 범위를 몹시 좁힌 휴전기념일이었다. 64년 전에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대한민국은 대륙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섬이 되고 만 것이다. 내 어릴 적 기억을 더듬자면 허리 잘린 한반도의 남쪽만을 그린 지도가 학교 교실에 걸렸고, 우리의 상상은 그 속에 갇히고 말았다. 광대한 영토를 지녔던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는 다이어그램 같은 도형 속에서 알아야 했으며, 세계지도는 오로지 추상이고 관념일 뿐이었다. 한동안 해외로 나가는 일은 꿈같은 일이었다. 1980년대 말까지 여권은 특권과 같은 말이었고, 섬의 제국은 행여 여권을 취득한 이들에게 반드시 소양 교육을 거치게 해 외부로부터 감염을 차단하려 애썼다. 갇힌 공동체는 암울과 공포로 휩싸이게 마련. 외딴섬이 된 국토, 분단과 냉전이 빚은 폐쇄사회에서 관용은 남의 이야기여서 내부 분열과 갈등은 생존에 필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겪는 모든 사회적 갈등이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보편성을 애써 무시해야 나라를 운용할 수 있었던 지난 시대, 한국적 민주주의 같은 웃지 못할 구호가 난무했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외친 게 다 폐쇄공동체의 단말마적 언어였다. 결국은 89년, 여행에 대한 전면 자유화 조치가 생겨난다. 누구나 구청에서도 발급하는 여권을 들고 봇물처럼 섬의 제국을 빠져나가며 세상에 얼마나 많은 다른 가치들이 있는지 알게 됐고,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얻는 정보로 세계는 빠르게 밀착됐다.

그러나 우리의 지리적 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분단과 냉전체제가 만든 섬의 영역에 갇혀 있는 우리가 세계의 현장을 마주하는 방법은 개구리처럼 물을 건너뛰어 튀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고도 어느 누구도 불편해 하지 않으니, 혹시 우리 속에 있었던 대륙인의 유전인자는 이미 퇴화되고, 외딴섬 부족의 성정을 학습 완료한 것이 아닐까? 내가 80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 갔을 때 빈의 기차역 사인보드에 뜬 모스크바, 베를린, 부다페스트 같은 이름을 보고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기차만 타면 갈 수 있는 곳이라니…. 그게 대륙의 도시였다.
올해 정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런던에서 베이징까지 화물열차 개설을 발표하며 1만2000㎞의 거리를 18일 동안 달리는 이 프로젝트를 실크로드의 복원이라고 일컬었다. 곧이어 여건이 마련되면 승객을 실은 열차도 운영할 것이다. 이미 시속 500㎞의 초고속열차가 운행 중이니 그 거리라면 24시간 안에 주파할 수 있으며, 지난 5월 전기차회사인 테슬라가 시험운전에 성공한 하이퍼루프의 고속열차는 시속 1200㎞를 기록한 바 있어 런던에서 베이징까지는 급기야 10시간이면 가게 된다. 베이징에서 서울은 1200㎞에 불과하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거점 도시가 단연코 서울이라면 이 열차는 서울까지 연결돼야 유라시아익스프레스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분단된 땅이니 난제인가? 그렇다 해도 꿈마저 꾸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예컨대 옛 서울역을 문화역284인가 하는 정체성 없는 기능으로 놔둘 게 아니라 유라시아문화관으로 바꿔 성격을 분명히 하면 어떤가? 쇼핑센터의 부속 건물처럼 돼 있는 초라한 서울역을 유라시아대륙철도의 종착역답게 고치고 축소된 서울역 광장도 다시 복원해 유라시아 광장이라고 이름한다면 우리의 퇴화된 대륙적 본능을 긁어 다시 부활시키는 동기가 되지 않을까? 그러면 언젠가 남대문시장에서 아침을 먹고 런던의 코번트가든 시장에서 점심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와 있을 게다. 그런 날은 도둑처럼 온다고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