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거티비즘, 그린벨트 그리고 비무장지대

중앙일보 '중앙시평'

2018. 9. 22

지금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건축가 김중업 선생의 전시가 한창이다. 30년 전 우리 곁을 떠난 그의 전시회를 돌아보며 참으로 큰 건축가였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적 건축가들이 60대 후반에 더욱 왕성한 활동을 한 것을 기억하면 그의 66세 일기는 너무 아쉽다. 게다가 선생보다 2년 먼저 떠난 김수근 선생은 당시 불과 55세였으니 건축가로는 요절 중의 요절이었다. 최고의 한국 현대건축을 선정하면 두 선생이 설계한 ‘공간사옥’과 ‘프랑스대사관’은 지금도 부동의 1, 2위여서, 두 분이 여느 건축가들처럼 오래 사셨다면 우리는 지금 보물 같은 건축들 속에 살고 있을 게다.

50대 초반 김수근 선생의 건축 철학은 한참 무르익는 중이었다. 그래서 더 아쉬운 선생의 담론이 ‘네거티비즘(Negativism)’인데, 부정주의(否定主義)라고도 하는 이 건축이론을 선생은 1980년 세계건축가연맹의 도쿄 회의 기조연설을 통해 주창한 바 있었다. 이는 서양의 전통적 관념에 대한 대안으로 유가와 불가 그리고 도가 사상을 근거로 성립한다고 하였다.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그 일이 가지는 부정적 결과를 먼저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적극적 실천에 비해 유가에서는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서양에서는 기능주의가 우선가치이지만 도교에서는 무위(無爲)와 무용(無用)을 말하며 오히려 반기능(反機能)의 삶을 권한다.

또한 서양의 철학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공리(功利)라 하여 주장하지만 불가는 자비와 금욕을 권하고 남에게 고통 주지 않으려 스스로를 제한한다. 선생은 이를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 하는 생각, 즉 네거티브하게 사는 방식이라 하며, 공간을 사용하기 전에 한계를 먼저 정하고 삼가며 집을 지을 것을 주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선생은 ‘한국학파’의 설립을 꿈꾸며 파주에 그 터전까지 마련했지만 운명의 신은 기다리지 않았고, 김수근 건축사상은 거기서 멈춘다.

사실은 요즘 집값 급등으로 그린벨트가 논쟁의 중심이 되면서 불현듯 이 네거티비즘이 생각난 것인데, 개발제한구역이란 게 개발행위를 하지 말자는 것이니 같은 맥락일 게다. 그린벨트는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서울의 중심부에서 15㎞권을 따라 2㎞에서 10㎞ 사이 지역을 개발행위금지 지역으로 정한 게 시초였다.

물론 그린벨트에 관한 제도가 우리가 처음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도 오래며 특히 도시인구가 폭증한 근대에 이르러 서구의 많은 대도시들이 무분별한 도시팽창을 막고 공유지를 지키기 위해 도입한 제도지만, 현장의 여건도 무시된 우리의 그린벨트는 사유지가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절대 권력에 의한 강제적 조치였어도 지난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질서 속에서도 사유재산권 주장이 힘을 쓰지 못하고 그린벨트가 지속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바로 이 제도가 갖는 공공성의 가치에 대한 지지였으니 그게 바로 토지의 공개념인 게다.

그런데, 그럴까? 실상은, 그 속에는 군사시설을 비롯해서 학교나 유원지 같은 시설은 언제든지 들어서도록 법에 명시해 놓았고 개인의 주택이나 농가 시설들도 죄다 지을 수 있도록 했으며 심지어 근린상가도 허용했다. 대형의 상가나 주택단지만 불허했으니, 경관심의에서 면제되는 작은 시설들이 온통 개발제한구역을 우후죽순 중구난방으로 채웠다.

비행기를 타고 위에서 한번 보시라. 비닐하우스와 시퍼런 양철지붕으로 뒤덮인 도시 주변은 그린벨트가 아니라 ‘조잡 천국의 그레이벨트’여서 서양 도시 주변의 그림 같은 풍경의 진짜 그린벨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네거티비즘? 아니었다. 그 속은 오히려 난개발의 ‘포스티비즘’이다. 그러니 주택 공급의 여론이 높아질 때마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이 난잡한 그린벨트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요즘이 또 그런 때다. 그러지 말고 이참에 전반적으로 확실히 재조정하여 진짜 그린벨트를 만들면 안 될까? 아니라면 그냥 두시라.

또 하나 있다. 요즘 남북관계가 개선되자 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의 땅값이 무지하게 올랐다고 하며 비무장지대 개발계획까지 여기저기서 들썩거린다. 불안하다. 내가 알고 믿기로는 우리 시대에 이 땅을 잘 개발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한 수십 년 그대로 묵혀 우리 후대에 맡기면 어떤가? 그러자면 비무장지대 개발금지법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최근 긴장 완화를 위해 GP(감시초소)를 철수한다는데 병력은 철수해도 이들 시설은 그대로 두는 게 옳다. 그도 현대의 유적이니 보존해야 마땅하며, 자연과 공간만이 아니라 역사의 기록에 대해서도 덧대거나 지우지 않는 것, 그게 진정한 네거티비즘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