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내가 서울시장이라면

2008. 6. 06

나는 지난 2000년 8월 조선일보에 ‘내가 서울시장이라면’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나는 고가도로를 걷어내고 청계천을 복원할 것을 주장했었다. 그것으로 도심교통에 장애가 없을 것이라고 예언도 했다. 그리곤 얼마 후,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 든 이명박후보는, 나의 주장을 읽은 결과였던 아니던, 청계천의 복원을 주요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나는 그로 인해 그를 열렬히 지지하였고 그는 드디어 당선되었다. 그는 취임하자 마자 공약대로 청계천 복원을 개시하였으니 과연 왕성한 추진력으로 임기 만료 전에 그 대단한 역사를 완료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였다. 완성된 청계천은 내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임기 내에 마치기 위해 서둘렀던 청계천 복원은,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경복궁의 금천을 거쳐 인사동을 지나며 흐르는 물을 받아 한강으로 보내는 물줄기가 아니었다. 한강의 물을 전기의 힘으로 역류시켜 다시 되돌리는 인공하천이었으니 이는 반생태적 구축물이었다. 억지였다. 한국인의 이 무모함에 경탄한 미국의 한 교수는 이를 두고 세계 최대의 어항, 인공수조라고 빈정대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시민들은 그러나 환호하였다. 생태적인 것처럼 눈 앞에 나타난 도심 속 물길의 낭만적 정취에 휩싸인 까닭인 것이다. 준공에 맞추어 일간신문들에서는 이에 대한 특집을 기획하고 나에게도 글을 부탁해 왔다. 모두 찬사를 보낼 때였으며 응당 나의 글도 그런 류일 것이라고 기대했을 그 신문 데스크는 내 글을 게재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 반생태적 결과를 볼썽 사나운 디자인들과 함께 격렬히 성토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전이 된다면? 참상일 것이다. ■ 내가 청계천을 복원하자고 한 것은 청계천이라는 지리적 장소만을 지칭한 게 아니었다. 청계천을 바르게 복원하자면 그 상류지천인 인사동길 밑의 물길을 만나게 해야 하고 따라서 인사천도 복원해야 하며 경복궁 금천을 지나 교보생명 뒤 길 밑의 물길도 뚫어야 하며, 효자동을 지나 정부중앙청사 뒷길 밑을 지나는 물길도 복원해서 이 물길들을 청계천으로 흐르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대학로의 대학천도 복원해야 하니 옛 도성 안의 모든 물길들을 복원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지금 땅 속에 있는 물길들이 깨끗할 리 없으니 이를 정화하려면 주변에 있는 하수관을 죄다 정비해야 하고 도시 인프라 망을 새로 구축해 오수나 폐수의 흐름을 철저히 분리해야 할 것이다. 차량이 다니는 도로는 더 좁아지게 되니 도심 교통은 악화가 될 것이라고 쉽게 예단하겠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 차량은 불편하면 다니지 않게 되는 속성이 있어, 교통은 무책이 상책이니 그냥 놓아 두면 된다. 대신 불법통행 차량은 엄정히 단속하고 대중교통을 더욱 확충하면, 서울의 공기도 결국 맑아져서 자연히 쾌적한 도시환경으로 바뀌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은 내 기대를 배반하였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청계천변의 면모를 일신시키기 위해 고층빌딩 개발을 유도해내며 이를 둘러싼 추문까지 벌어져 몇 사람이 구속까지 되었다.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에게 서울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있었을까? ■ 세계에 천만 명의 인구가 사는 도시가 대략 스무 군데 정도 있지만 산이 있는 도시는 서울이 거의 유일하다. 이는 다른 거대도시들-평지에 서 있는 뉴욕이나 파리 런던, 동양이라도 베이징과 도쿄 등과 근본적으로 도시적 성격을 달리 만드는 요소이다. 사실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져서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는 도시역사를 기록한 데에는 산이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조선 개국 당시 정도전과 무학대사는 한양을 안으로 둘러싸는 네 개의 산(內四山-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과 바깥에서 둘러싸는 또 다른 네 개의 산(外四山-북한산, 용마산, 관악산, 덕양산)이 어울려 만드는 수려한 풍광을 보고 정도를 결정하였다. 그 산세들 사이로 굽이 흐르는 한강과 그 지천들이 흐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지금 아무리 서울이 조선시대와 다르게 수 많은 건물이 빼곡히 지어져 있어도 지금도 여전한 산세들의 어울림과 물길들로 서울은 단연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도시다. 그렇다. 서울의 랜드마크는 산이 이루는 풍경인 것이다. 랜드마크라는 말은 1960년대 미국 도시계획이론가 케빈 린치(Kevin Lynch)가 도시를 설명하면서 쓴 단어인데, 이는 서양사람들의 도시를 설명하는 말이지 우리의 도시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서양인들은 도시를 만들 때 머리 속에서 그 도시에 대한 개념을 다이어그램으로 먼저 그리고 그 그림을 실제로 건설하기 위해 평지를 찾아 도시를 만든다. 중세에 이상도시라는 이름으로 유럽 곳곳에 세운 도시들이 죄다 그러하고, 고대로 올라 가도 축과 위계를 따지는 기하학적 구성의 도시들 또한 그런 바탕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신도시를 건설할 수 밖에 없는 미국에서는 평평한 땅 위에 도시를 만드는 것이 용이하였으니 그런 도시는 자체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기 위해 랜드마크를 가지는 것이 필수적 과업이었다. 따라서 에펠탑이나 빅밴이나 마천루가 솟게 마련이며 각종 기념탑이 도시를 지배하게 하였으며, 동양에서도 도쿄는 우람한 성채가, 베이징 같은 도시는 어마머마한 스케일로 그 도시의 정체성을 확보하였다. 요즘이라고 다를 게 없다. 각 지자체들이 분별 없이 벤치마킹 하는 두바이, 사막 위에 아무러한 터무니를 가지지 못한 곳이니 기상천외한 인공구조물로 도시의 인상을 창조할 수 밖에 없는 곳이건만 아름다운 산천을 둔 우리의 도시가 이를 목표로 삼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우리의 도시는 엄연히 다르다. 아름다운 산세가 이미 중요한 랜드마크인 서울의 도시 속에 서는 건축물은 그 자연의 랜드마크를 훼손하지 않도록 고만고만하게 지어야 했다. 따라서 작은 것들이 모여서 만드는 집합의 아름다움이 우리 고유의 도시 이미지인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그려진 지도와 현대에 만든 지도를 비교해 보면 고스란히 드러난다. 18세기에 그려진 서울의 지도는 그 자체가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수려한 산들이 그 세력을 드러내며 그려져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길들이 그려져 있으며 양지바른 비탈에 택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그려져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옛 서울의 풍광은 그야말로 그림과 같았을 것이다. 반면에 현대에 그려진 서울의 지도를 보면 얼룩덜룩한 칠로 지역을 용도별로 나누어 그리고 붉은 선으로 이들을 잇는다. 이게 무슨 사람이 사는 삶터인가- 약육강식의 싸움터 아닌가- 그렇게 인식한다면 내가 과민한 것인가? 실제로 이 20세기 지도로 만들어진 서울의 현대적 모습은 각종 랜드마크가 볼쌍 사납게 솟아 올라 진정한 랜드마크인 산세를 훼손하며 부조화하고 자기네들끼리 대립하며 또 부조화하고 스스로를 더 드러내기 위해 온갖 칠을 해대서 스스로도 부조화하고 그래서 악다구니하는 모습으로 변해 서울의 풍경은 급기야 만신창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 도시의 역사는 대략 일 만년이라고 한다. 터키 내륙지역 차탈휘크라는 곳에서 기원 전 7000년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집합주거지가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계획의 역사는 이집트를 기점으로 그리스 로마를 거쳐서 형성된 서양의 도시가 주류를 이룬다. 이들 도시는 공통적 특성이 있는데 도시의 목표가 효율적 관리와 기능의 극대화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앞서 기술한 중세 르네상스시대에 유럽 전역에 걸쳐 이상도시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도시는 서구 도시의 가장 특징적 개념을 보여준다. 즉, 도시를 둘러싼 자연은 적이 사는 곳이어서 해자를 크게 파고 그 안쪽으로 높은 성벽을 쌓아서 그 위협으로부터 내부를 보호하도록 도시의 영역을 만든다. 그 내부의 조직은 모든 도로가 방사상으로 구성되어 도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봉건영주의 일목요연한 통치하에 놓여 있다. 즉 단일중심의 봉건사회를 의미한다. 이 단일 중심의 사회는 중심과 주변이라는 위계를 명확히 하여 모든 도시적 일상이 축 선상에 놓이게 되고 결국 계급적 사회를 강화시켜 시민을 도구화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서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두 가지 혁명-권력구조를 해체하여 정신을 해방한 프랑스 시민혁명과 물질의 해방을 이룩한 영국 산업혁명으로 19세기 유럽의 도시들은 폭발적 인구의 증가를 이루어 도시구조를 새롭게 확충하거나 신도시를 건설할 수 밖에 없었다. 많은 건축가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의 도시설계안을 제시하였는데,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르 코르뷔제(Le Corbusier)는 ‘빛나는 도시’라는 이름으로 근대도시의 골격을 이루는 계획안을 발표하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고층건축으로 만든 도시공간의 여유와 충분한 녹지확보, 위생적 주거, 자동차와 보행자의 분리 등으로 마스터플랜을 만들면 도시의 삶을 행복하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마스터플랜이라는 도구는 현대도시설계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여겨진다. 급기야 코르뷔제는 유럽이 아닌 인도의 펀잡지역 챤디가르라는 곳에 신도시를 설계하면서 그의 이론을 철저히 적용하여 실현한 바도 있다. 시대적으로도 2차 대전 후 파괴된 여러 도시들이 새롭게 세워져야 했으며, 바야흐로 세계 도처에서 수없이 많은 도시들이 이 마스터플랜을 기초하여 태어나게 되었다. 심지어 오랜 역사를 기록했던 역사도시들도 재개발 마스터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곤 했으니, 그렇다면 과연 그 도시의 삶은 행복하였을까? ■ 도시의 효율적 관리와 기능의 극대화를 목표로 삼는 마스터플랜은 중세에는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실행의 수단이었으나 현대에서는 자본권력 혹은 수치를 동원하는 경제권력이 강력한 추진체로 바뀌었을 뿐 결과는 같은 것이었다. 현대의 마스터플랜에서는 우선 도로를 계급적으로 나눈다. 고속도로, 자동차전용도로, 간선도로, 집적도로, 분산도로 등 도로의 급에 따라 폭과 속도가 제한되고 건물의 높이와 밀도도 구분된다. 도시의 영역은 또한 상업지역 주거지역 공업지역 등 용도별로 구분되고 각기 차별된 용적율 건폐율을 가지면서 등급화한다. 더욱이 도시 전역을 도심과 부도심 변두리로 나누어 계급화 하니, 이런 도시에서 오래 살게 되면 주민들 또한 계급화되어서 변두리에 사는 사람은 중심상업시설에 들어가면 괜히 주눅들 수 밖에 없어 사람들끼리 서로 배척하고 분화되어 바야흐로 계급적 사회가 형성되고 만다. 이런 사회가 가지게 되는 필연적 결과는 분열과 대립, 갈등이다. 우리도 지난 시대 수없이 많은 신도시를 건설해 왔다. 주로 그 마스터플랜의 전능함을 믿은 결과였다. -사실은 조금 다르다. 그래도 서양인들은 도시를 건설할 때 그 도시에 담을 이념과 공동체의 미래를 논의하고 마스터플랜을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권력이 주창하고 자본권력이 부수하여 급속히 만든다. 도시의 목표와 프로그램은 주택 몇 백만호의 달성이 전부이자 마지막이며, 장소와 기억 같은 문화적 단어나 공동체와 풍경 같은 단어들은 전혀 생뚱 맞는 단말마이다. 모든 장소가 다르건만, 똑 같이 축이 그어지고 색깔이 칠해지며 허상적인 통계수치를 들이대며 구분하고 등급을 매기면서 천편일률적 방식으로 만들어진 게 우리의 지난 신도시 만들기였다. 평면적으로 그린 마스터플랜을 들이댄 실제의 땅이 산이 있으면 깎고 계곡이 있으면 산 깎은 흙으로 메워서 평평한 땅으로 만드는 게 능사였으며, 불가피하게 경사지가 발견되면 축대 쌓고 다시 부분적으로 평평하게 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으니, 그리고 건축가가 아닌 건설회사가 자체가 보유한 건축설계도로 두부 모판 찍듯 아파트들을 생산해 내었으니 분당이든 일산이든 평촌이든 산본이든 그 속에 들어가면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게 우리의 신도시들이다. ■ 더 큰 문제는, 그런 어설픈 마스터플랜의 비법으로 신도시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랫동안 살았던 옛 도시들마저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바꾼다는 데 있다. 물길들은 도로를 체계화하는 데 제일 먼저 방해되니 덮고 낮은 곳은 통행에 불편하여 고가도로로 만들어 도시를 절단하고 지형으로 구부러진 골목길은 통폐합하여 곧게 펴고 자그만 필지들을 모아 크게 만들어 거대건축물이 들어서게 하고 도시의 효율을 높인다고 장소마다 등급을 갖게 하고, 서양도시 흉내 내느라 중앙광장 중앙로 중앙공원 그것도 모자라 제1중앙, 제2중앙 등으로 엮어서 없던 축선을 그어 대었다. 그래서 역사와 불화하고, 자연과 불화하고, 사람과 불화한 도시로 바꾼 게 지금 서울이라면 너무 독설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600년 역사도시가 역사의 흔적도 찾기 힘들고 오로지 강남과 강북으로 나뉘어서 모든 시민이 투기에 몰린 유목민이 되어 있는가?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울이 가장 아름다운 대도시라고 말하곤 한다. 비록 탐욕스런 인공구조물들이 비열하게 도시 곳곳을 메우고 있어도, 여전히 서울은 아름답다. 그 이유는 바로 아직도 서울의 못난 모습을 관용하는 자연 때문이다. 지금은 개방이 되어 있으니, 북악산 서울 성곽길을 올라가 보시라. 그 북악에서 내려다 보는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수려한 산자락이 겹쳐 펼쳐지고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물빛……특히 비 개인 날 해가 서쪽에 있는 시각의 서울전경은 여전히 찬탄을 부르는 산수화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도시는 없다. 나는 이런 서울의 풍광이 개발업자들과 정치가들의 탐욕에 의해 계속 파괴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만 없어 몇 사람과 의논하여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 강금실씨가 출마를 두고 망설이고 있을 때, 서울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그려 찾아 간 적이 있다. 새로운 인물이어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서울을 만들기에는 적임이라고 여긴 까닭이었다.■ 내가 그렸던 그림은 우선, 서울을 강남 강북이라는 구도, 혹은 거점과 용도지역이라는 마스터플랜의 교조적 구성에 따른 지금의 서울도시계획구상을 철저히 배격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서울은 역사도시이다. 600년 역사도시이면서 올드시티 뉴시티가 구분이 안 되는 도시는 세계에 없다. 따라서 서울을 강남 강북이라는 갈등구조로 나눠 관리할 게 아니라 서울 성곽을 복원시켜 역사도시와 신도시로 나누는 것이 옳다. 복원된 성곽이 도시영역을 역사적 관점에서 구분시키고 나면 성내도시와 환상의 성외도시는 그 관리방향이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즉 도성 내는 개발을 극도로 억제하고 밖은 개발을 촉진하는 것이다. 먼 장래에는 성내는 비움의 도시로 만들어 우리들의 근원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적 풍경이 되면 이는 우리의 아름다운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서울 성곽은 마침 괄목하도록 복원 중이어서 근간에 역사적 도시영역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청계천 주변 고층화 같은 문제나, 더욱이 서울시 자체가 고층의 청사건립을 계획하면서 역사도시 서울 풍경의 고유한 정체성에 스스로 도전하고 있으니, 성곽복원이라는 문제도 그들에겐 필시 관광적 흥행요소이지 역사도시의 비전에 관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또 하나는, 서울의 역사적 축에 관한 문제이다. 서울을 조선의 신수도로 정하면서 정도전은 삼각산과 관악산을 잇는 축선을 설정하여 경복궁의 주축으로 삼았다. 지금도 북악산에 올라 경복궁의 배치축을 보여 시선을 이으면 관악산의 연무대와 연결된다. 이 축의 정신적 중요성을 파악한 일제는 광화문을 허물고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경복궁의 축을 따르지 않고 남산에 조선신궁를 설치한 다음 그 신사의 위치와 연결하여 경복궁과 5.6도 틀어진 각을 만들고 만다. 그리고 그 선상에 경성부청사를 지어 그 축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박정희대통령 시절 콘크리트로 광화문을 새로 지으면서 이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체 뒤틀어진 총독부청사 축에 광화문을 배치함으로써 일제가 만든 왜곡된 축을 공인하고 말았으며 그 이후 세종로는 그 뒤틀어진 축을 중심으로 확장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호기가 생겼다.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광화문을 다시 원위치에 갖다 놓고 싶어했다. 나는 그 차원을 넓혀서 서울의 역사적 축을 복원하자고 했다. 즉 현재의 세종로 변에는 중앙청사나 문광부청사, 미대사관 등 앞 마당을 넓게 가지고 있는 공공건물의 공간을 이용해서 차선을 옮기고 원래 육조거리가 있었던 역사축의 공간을 육조마당이라고 하여 복원하면 경복궁의 축과 새로 복원되는 광화문의 축과 일치된 선형광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축선을 따르면 이 육조마당은 세종문화회관 쪽과 접속하게 되고, 자연히 차량통행은 동측편으로 형성된다. 물론 동측면과는 지하 공간을 통해 연결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서울의 역사축에 대한 복원이었고 이는 그 상징성 만 아니라 역사도시의 중추공간을 활성화하는 면에서도 매력적 디자인이라고 여겼다. 심지어 대통령에게 까지 보고되었고 유관기관과 논의해 보라는 지시까지 받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현재 조성되고 있는 광화문광장은 일제가 만든 축선 상에 그대로 놓일 뿐 아니라 구시대의 대칭적 개념에 사로 잡혀 사방 모두 차량의 흐름으로 싸인 섬처럼 조성되고 있으니 역사적 실체의 복원은커녕 광장으로서 기능까지 어렵게 하는 그 속을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그렇지 않고, 바른 축을 복원한다면 주변 물길도 복원되는 기회가 생기며 이 참에, 도성내의 모든 물길을 복원하면 도시공간이 확연히 달라진다. 불구적 청계천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이다. 이 물길이 갖는 생태적 환경을 즐기기 위해서 도성 내 건축은 적극적 규제를 받아야 하고 역사적 유적들이 돋보이게 되며 작은 필지와 골목길을 보존하여 걷기 편하게 만든다. 물론 일제가 끊어 놓았던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와 연결하면 한북정맥을 이어받은 북악산의 숲이 남산까지 연결되고 이어 용산공원을 거쳐 한강으로 연결되면 완벽한 생태적 연결고리를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도성 내에는 종국에는 자전거와 대중교통만 다니는 느리게 보이는 도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게 비움의 도시이며 천 년의 도시가 되는 바탕이라고 믿었다.■성 밖은, 거점들의 도시, 네트워크의 사회를 만든다. 몇 개로 대별된 거점이 아니라 수 없이 많은 거점을 만든다는 것을 제안했다. 즉 기능적으로 구분된 도시가 아니다. 예를 들면 문화 도시를 만든다고 예술의 전당이나 외딴 섬에 오페라하우스 같은 특별구역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이 일상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문화시설들을 동네 곳곳에 설치하고 이를 연계시킨다. 상업시설이나 복지시설, 심지어 종교시설, 교육시설들도 그 한 시설의 라인에 타면 그 네트워크를 통해 끊임없이 연계되는 네트워킹의 도시를 구성한다. 이렇게 되면 굳이 먼 거리를 가지 않아도 일상에서 주변에서 거의 모든 도시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다. ■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내가 유리씨즈 읽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언제든지 어떤 페이지든 먼저 읽어도 전체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도시도 어느 구석에 있든 그 도시의 전체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도시가 좋은 도시이다.” 즉 그에게는 도시의 전체가 필요한 게 아니며 도시의 부분으로도 전체적 삶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분이 전부에 못지 않고 개체가 전체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우리가 취한다면, 한 곳에 몰려있는 서울숲 같은 중앙공원은 우리의 공간이 아니다. 서양의 현대도시를 비판하는 영국의 도시학자 리챠드 세네트(Richard Sennett)의 언설을 듣자. ” ……다원적 민주주의는 중앙집중화 된 권력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서로의 차별성이 발전의 주체라고 여긴다. ……다원적 민주주의는 또한 특별한 물리적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이 민주주의적 비전은 거대하고 집중적인 건물들이 표현하는 상징보다는, 뒤범벅된 공동체 속에 여러 가지 언어가 적층된 건축을 선호한다. ……궁극적으로 다원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형상은, 전체로서의 도시를 표현하는 이미지를 철저히 부스러뜨리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프랑스 도시학자 프랑수아 아쉐는 메타폴리스(Metapolis)라는 개념을 주장하였다. 근대 도시의 목표였던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즉 기능과 효율, 구분과 위계를 바탕으로 팽창을 바탕으로 한 이 개념은 새로운 시대-정보시대를 맞은 나눔과 소통, 공생이 시대언어가 된 21세기에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하며, 네트워킹으로 이루어지는 메타폴리스, 바꾸어 번역하면 성찰적 도시를 현대도시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 ■ 나는 그들의 말에 동의한다. 그렇듯 서양인들도 그들이 만든 현대도시의 개념을 스스로 바꾸고 있건만, 어찌하여 우리의 서울은 여전히 구태연한, 서양인들도 버린 마스터플랜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가? 더구나 서울은 그들 도시와는 근본적으로 그 궤를 달리하여 태어난 곳이다. 재개발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구악을 좇을 이유가 없다. 장소는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에 기록된 오랜 정주방식이 그 도시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것이다. 장소가 원하는 바대로 건축하고 그로 도시를 이루면 가장 그 땅에 어울리는 풍경이 된다. 내 그림의 내용에 동의하였던 강금실후보는, 폭발적 인기 속에 새롭게 등장한 오세훈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내가 그린 서울의 새로운 풍경은 다시 헛된 꿈이 되고 만 것이다. 요즘 서울시는 디자인에 거의 올인한 듯 하다. 디자인을 직업의 속성으로 삼는 나로서는 반갑기도 하지만, 적지 않게 근심도 갖고 있다. 도시디자인은 분칠하듯 거죽만 만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을 어떤 공간구조로 바꾸어야 할 것인가가 도시 디자인의 첫 번째 과업인 동시에 마지막의 일이다. 도시디자인을 가시적 효과에만 그 가치를 설정한다면 허무한 일일 뿐이다. 없어져야 도시공간의 소통에 도움이 되는 벽체를 미술가들이 칠해서 그 존재의 권위를 인정하는 일은 사실 도시디자인에 역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서울은 누구인가라는 본질적 문제에 답을 구하고 거기에 맞게 도시공간을 조직하는 일이 보다 중요하다. ■ 한편으로 우리 모두 명심하여야 할 게 있다. 도시는 결단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만 태어나고 성장하며 변화하는 생명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변화를 담기 위해서도 비워야 한다. 공공영역을 부질 없는 테마로 채워 황칠할 게 아니라 도시민이 건강한 공동체를 향한 선한 의지를 스스로 실천하며 만들 수 있도록 비워두어야 한다. 비움이 없는 도시는 멸망으로 결국 비우게 된다고 어느 철학자는 경고하였다. 내가 ‘다시’ 서울시장이라면? 서울을 비움이 충만한 도시로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