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설계도

생활성서

2022. 9. 01

새해가 되면 저는 성경을 한번 통독하곤 합니다. 대략 한 주간을 그렇게 보내지요. 몇 해전 여느 때처럼 처음부터 읽어 내려가다가 한 구절에 꽂히는 바람에 읽기를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역대상 28장19절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을 꿈을 가졌는데 하느님은 많은 전쟁으로 사람을 수없이 죽인 다윗에게 그 성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결국 다윗은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게 하지만 놀랍게도 자신이 마련한 설계도를 건넵니다. 그때에 다윗이 하는 말인데, 한글성경의 종류마다 이 표현이 조금씩 달라 인터넷에서 여러 종류의 성서를 검색하다가, 아무래도 원본에 가까울 히브리어 성서의 구절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영어로 직역한 것이 있어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All this” said David “in writing by (His) hand Yahweh upon me made me understand all the works of these plans.”

건축에 관한 내용인지라 제가 감히 이를 번역하면, “다윗이 말하기를, 야훼의 손이 내게 임하여 이 모든 일의 설계를 그리게 하고, 그 세부 사항들을 모두 이해하게 하셨다.”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실상은 다윗이 설계한 것이며 그 설계는 하느님이 허락한 영감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건축가의 직능에 대한 서술이며 건축주인 하느님과의 관계를 밝힌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늘 말하곤 하지만, 좋은 건축은 좋은 건축가가 만들지만 좋은 건축가는 좋은 건축주가 만듭니다. 좋은 건축을 가지길 원하면 먼저 좋은 건축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좋은 건축주는 어떤 사람일까요? 올해로 건축설계를 반백 년 가까이 하고 있는 제 경험으로는 세상에 세 부류의 건축주가 있습니다. 첫째는 건축가에게 시키는 대로 따를 것을 요구하는 건축주입니다. 이 경우에 건축가는 건축주의 욕망을 실현하는 시녀나 하수인일 뿐이어서 좋은 건축이 만들어질 수 없는 게 분명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건축주가 대단히 많은 게 사실입니다. 두번째 부류는, 건축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건축주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런 건축주의 태도는 건축가를 신뢰하고 그 직능을 존경하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방관자일 수 있으며 그 설계에 참여하지 않는 3자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 건축이 완성되면 냉혹한 평가자로 변하게 됩니다. 세번째는, 설계를 건축가에게 의뢰하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과 요구를 개진하지만 결정은 늘 건축가에게 맡기는 건축주입니다. 설계과정에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심지어 건축현장에도 수시로 찾아와 서로를 확인하려 노력합니다. 바야흐로 그 건축은 애정과 존경 속에 지어지게 되고 건축주는 그 애정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 속에서의 삶 또한 자부심으로 가득하기 마련이지요.

이 세번째 부류의 건축주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 건축이 가지는 공공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건축은 한 개인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비록 개인의 돈으로 지은 건축이라고 해도 그 집은 이웃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좋은 건축이라면, 지나가는 이들에게 비가 오면 피할 공간도 내어주고, 길과 길 사이에 위치한 땅은 내부에 작은 길을 만들어 지나가게 하며, 옆집들이 크지 않으면 큰집을 지을 수 있어도 좀 자그맣게 지어 주변과 조화로운 모습을 갖추는 게 공공성에 부합하는 좋은 건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공공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건축주를 만나는 것은 건축가에게는 참으로 큰 축복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4월호 5월호에 연이어 르 코르뷔제라는 위대한 건축가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만든 롱샹성당과 라투레트수도원을 저는 20세기 최고의 건축이라고 했고 사실 그 모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도 선정되기도 했을 만큼 걸작입니다. 그 좋은 건축에는 여지없이 좋은 의뢰인이 있었던 바 바로 쿠트리에 신부였지요. 그러나 78세에 운명하기까지 평생 건축을 한 코르뷔제에게 그런 좋은 건축주만 있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걸작 중에는 사보아 주택이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모더니즘의 선봉에 섰던 그가 세웠던 건축의 5가지 원칙 (그 내용이 많아 여기에서 설명 못해 미안합니다.)이 교과서처럼 나타난 집입니다. 그런데 이 건축의 완공 직후에, 모든 것을 코르뷔제에게 맡긴 건축주인 사보아 부부와 하자 문제로 다투더니 급기야 법정으로까지 싸움이 번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2차대전이 발생하며 재판이 무산되었고 그 사이에 건축주 부부가 세상을 떠나면서 사건은 종결되고 말았는데, 폐허가 될 처지에 놓이게 된 이 집을 프랑스 정부가 매입하여 문화재로 등록합니다. 그리고 이 집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며 현대건축에서 불멸의 지위를 획득하지요. 그러나 그 건축주에게 이 집은 악몽이었을 겝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래전 이 건축을 처음 방문했을 때, 오로지 코르뷔제의 건축선언일 뿐 건축주의 애정 어린 삶이 없는 이 집은 제게 너무도 건조하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2년전에 특별한 설계를 의뢰 받았습니다. 포항 인근의 어떤 작은 마을에 공소를 짓는 일입니다. 은퇴하신 신부님이 맡아서 봉사하는 곳인데 새로운 공소를 짓는 게 마지막 과업이라고 하셨습니다. 몇 사람을 통해 어렵게 연락 받은 저는, 80이 훨씬 넘은 이 노신부님의 소망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건축이지만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낸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이뤄질 아름다운 공동체의 풍경에 서로 설레며 설계를 마쳤습니다. 더구나 이 건축을 무료로 지어 봉헌하겠다는 건실한 건설업체까지 나타나는 감사한 일도 있어 모두가 큰 은혜를 느끼며 착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이 공소를 관할하는 본당성당에서 건축설계 내용을 심의한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렇지요. 그런 공적 절차가 필요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 심의위원회를 주관하는 분은 그 성당의 신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제가 만든 설계안을 가톨릭전례에 나오는 건축규칙들에 반한다며 수정을 요구해왔습니다. 그의 규칙해석이 자구에만 과도하게 연연한 것이라고 판단한 저는, 제 설계가 그 규칙이 의미하는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수정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곧바로 심의부결을 통보 받았습니다. 부당하다고 느꼈지만 그 심의위원회는 별안간 나타난 갑이었고 그 갑의 행사는 저와 노신부님의 간절한 꿈을 무산시키기에 충분한 권력이었습니다. 노신부님을 생각하며 제가 굽힐까도 생각했으나 그러기에는 오랜 시간 어렵게 다져왔던 제 믿음이 도무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당나라의 시인 유종원이 쓴 ‘재인전(梓人傳)’의 재인은 오늘날 건축가에 해당하는 직능인데, 내용을 보면 그 재인의 직능과 태도에 대해 단호히 기술한 대목이 있습니다. “不由我則圮 悠爾而去 不屈吾道 是誠良梓人耳” 만약 권력자가 주장을 내세워 직능을 방해하면, 유유히 떠나야 하며, 자신의 법도를 굽히지 말아야, 진실로 뛰어난 재인이라는 뜻입니다. 공공의 이익에 헌신하는 건축가가 공공건축물을 맡아 설계하고 짓는데 한 관리가 와서 변경을 하라고 하니 그 자리에서 일을 그만 두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무려 1천2백년 전에도 이랬는데…… 이 글로 저는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전의 설계도를 솔로몬에게 건넨 다윗은 곧이어 이렇게 당부합니다. 20절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지시하고 나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당부하였다. ‘야훼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데 쓰일 것을 다 만들기까지 나를 보살피시던 하느님 야훼께서 너를 떠나시지 않으실 것이다. 모른 체하고 내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니 힘을 내고 용기를 내어 일을 해 나가거라. 걱정하지도 말며, 두려워하지도 마라’”

그렇습니다. 아직도 건축의 진리를 깨닫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저는 하느님의 영감을 얻어 설계도를 그린 다윗의 신념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부디 그처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그렇다해도, 그 작은 공소의 노신부님, 굽히지 못한 저를 용서해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