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시를 쓰는 지 아는가?’

좋은세상

2003. 4. 14

아그네츠카 홀란드 라는 폴란드 출신의 여성 감독이 1995년에 만든 영화 ‘토탈 이클립스’ 는 프랑스가 낳은 두 천재 시인 폴 베를렌느와 아서 랭보에 관한 이야기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베를렌느는 19세기 말엽 상징주의 시단의 대표적 인물이며 37살의 나이로 요절한 랭보는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인이다.
열 살 차이가 나는 이 둘은 삼각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에 탐닉하는 동성연애자이지만 시의 세계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라이벌이다. 레오나르도 디 카프리오가 열연한 젊은 랭보는 공격적이며 파괴적이고 열정을 삭일 수 없다. 그 당시 파리의 시단에서 확고한 지위를 누리고 있던 베를렌느를 쉴 사이 없이 몰아 부치다 급기야는 총탄을 맞게까지 된다.
이 두 시인이 나누는 말의 묘미에 반하며 영화에 몰입하던 나는 랭보가 베를렌느와 싸우는 도중 속사포 같이 던지는 말 한 구절을 듣고 칼 끝을 마주한 듯한 섬뜩함을 느끼고 말았다. 랭보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한다.
‘ 당신은 시를 어떻게 쓰는 지 알지만 나는 시를 왜 쓰는 지 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바로 상징주의 시단의 거장이던 베를렌느를 향해, 본질을 잃고 언어를 유희하는 방법에만 의존하는 그런 시는 껍데기만 남아 있다는 것이며, 왜라는 본질에 관한 질문을 안아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신을 만들 수 태도야 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시라는 말 아닌가.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과연 건축에 관해 근본적 질문을 하고 있는가. 타성에만 의지하면서 건축을 그리고 있지 않았는가. 나에게 건축은 무엇인가. 내 스스로에 대한 심문은 끝이 없었다. 랭보는 베를렌느가 아니라 나를 노려보며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축설계라는 일은 끊임없이 다른 사물과 만나는 작업이다. 새로운 설계를 할 때마다 다른 땅과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당연히 새로 짓는 집은 새로워야 함에도 우리의 도시에는 얼마나 낡은 정신으로 짓는 집이 많은가. 가진 재산을 다 동원하여 보다 새롭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건축가가 더욱 새롭고 행복한 꿈을 꾸지 않으면 그 집은 죽은 집이며 그는 그들을 배반한 꼴이 된다. 그럼에도 가끔 건축하는 일이 고단하여 나의 게으름과 비겁함을 내가 용서하고 있을 때, 랭보는 항상 나를 향해 묻는다. ‘당신은 건축을 왜 하는지 압니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이 질문이 가진 힘이 나를 아직 건축의 길에 서 있게 하고 있다는 것 만은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