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불가능한 정신의 산물,
건축-카사델아구아를 생각하며

2012. 8. 21

외국인들이 일본에서 가장 가 보고 싶어 하는 장소의 첫번째가 나오시마라는 섬이라고 합니다. 한갓 버려진 듯한 조그만 섬이 안도다다오라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 건축가가 미술관과 전시장으로 섬 전체를 예술섬으로 바꾸어 놓아 그 건축을 보기 위해 한 해에도 수십만 명이 찾는 곳입니다. 외국인들이 두 번째로 일본에서 가고 싶어 하는 장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후지산이나 신사 같은 풍경이나 역사적 유산이 아니라 이번에도 현대건축이었습니다. 가나자와에 있는 21세기 미술관이라는 곳인데, 세지마가즈요라는 여성건축가가 미술관의 형식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계한 곳입니다.
건축이 도시를 바꾸고 그 건축 때문에 그 도시가 유지되는 예도 수없이 많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로마는 마치 선조들이 건설한 건축으로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매년 부르며 소득을 일구는 도시입니다. 로마 외에도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들이 죄다 그러합니다.
한편으로는 한 사람의 건축가 때문에 도시가 유지된 곳도 있습니다. 가우디의 바르셀로나가 그런 곳입니다. 안토니오가우디는 천재였지만 살아 생전에는 늘 비운의 험로를 걸어야 했던 건축가입니다. 결국 지금도 건설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건설현장 앞에서 현장에 몰두하며 길을 건너는 중 전차에 치여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정과 고뇌로 바르셀로나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 받은 것입니다.
건축 하나가 도시를 바꾼 예도 있지요. 빌바오라는 곳입니다. 프랑크게리라는 조형적 건축가가 설계한 미술관이 들어서자 마자 이 도시는 운명을 완벽히 바꾸었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건축을 보기 위해 이베리아반도의 북쪽 변방을 찾아가곤 합니다. 건축의 힘이요 예술의 마력입니다.

과연 건축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킬까요? 우선 예술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 1967년 독일 연방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며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성을 표현하며 추구할만한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 따라서 예술은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 대체 불가능한 정신적 의미를 가진다.’
대체 불가능한 정신. 물론 건축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건축은 복제가 불가능하므로 더욱 대체 불가능한 정신입니다.
1975년 10월에 열린 유럽의회에서는 건축유산에 관한 유럽헌장을 제정하고 아래와 같은 핵심으로 강조했습니다.

건축유산에 관한 유럽헌장
1. 유럽의 건축적 유산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념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도시 속에 있는 작은 건물군과 자연 속이나 인공적 환경에 놓인 특징적 마을도 포함된다.
2. 그 건축적 유산 속에 각인된 과거는 우리들의 균형있고 완전한 삶과 불가분의 환경을 제공한다.
3. 그 건축적 유산은 대체불가능한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지닌 자본이다.
4. 역사적 중심지는 조화로운 사회적 균형을 제공한다.
5. 건축적 유산은 교육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건축이 가지고 있는 기억에 관한 기능입니다. 건축은 우리 존재의 안정과 지속을 가장 잘 표현하는 예술이며 따라서 건축은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장치입니다.
오래 전에 건축이 가지는 기억에 관해 쓴 글의 일부를 다시 전재합니다.

건축과 기억

몇 년 전 문민정부 시절에 중앙총독부였다 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을 광복절 기념식에 맞추어 건물의 머리부분을 동강내고 이를 들어올려 축제를 펼친 일을 기억할 것이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광경을 보며 나는 배타적 국수주의, 문화적 편협성, 반문화적 폭거, 천민문화 등등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야만적 문화에 관한 용어를 내뱉으며 분을 삭였었다. 그 후 경복궁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중앙총독부였으며 해방 후 제헌의회였고 중앙청이었다가 급기야 대한민국 문화의 중추 시설로 바뀐 그 역사를 건축적으로 그 장소에 남기게 되길 소망하였지만, 완공되어 나타난 모조 경복궁은 우리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말았다.
나는 중앙총독부를 영구히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反개발론자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는 개발과 보전이 양립할 수 없는 적으로 이해되고 그로 인해 숫한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지만, 내가 믿기로는 개발과 보전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얼마든지 보존적 개발이 있을 수 있으며 무조건적 보존이 가져오는 방치는 환경을 오히려 파괴하는 일이다. 우리의 분명한 적은, 새 역사 창조라는 허구적 어귀를 앞세워 과거 사실들을 멸실하는 반달리즘이다.
모든 건축은 언젠가는 소멸할 수 밖에 없으며, 새로운 환경에 따라 재개발도 되어야 하고 변화하는 것이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시간에 따라 건축이 바뀌더라도 수 많은 세월 동안 그 장소에 새겨졌던 삶에 대한 기억을 유지시켜 다음 세대에 이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헝가리 태생의 맑스주의 철학자인 게오르규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바른 진보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앞 선 시대의 업적을 흡수하여 이루어 지는 누적적인 일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뢰머베르그 광장과 쉬른 미술관이라는 곳이 있다. 1980년대부터 수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마인강변에 새롭게 세워 현대 문화도시로서 면모를 보인 프랑크푸르트지만 이 도시 역시2차 대전 때 연합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곳이었다. 중세 이후 이 도시의 중심으로 시청사가 있었던 뢰머광장도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 되었으나, 이 곳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제일 먼저 복구하고자 한 프랑크푸르트의 상징적 장소였다.
그들은 맨 처음, 이 광장을 면하는 간선도로변에 현대식 쇼핑센터를 지어 그들의 경제부흥을 알리고자 했으며 이 화려한 새 건축이 자랑스러운 미래를 상징하게 될 줄로 믿었다. 그러나 알루미늄 피막을 가진 상업건축이 로마시대 때부터 있었던 역사적 장소가 가진 기억을 지운 것을 알게 된 그들은 결국 그들의 정체성을 의문하게 되고 이 경박한 건축을 이내 후회하게 된다.
그들은,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뢰머광장 주위에 전쟁 직전까지 있었던 건축물들을 보다 더 역사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하여 그들의 자랑스러운 과거로 돌아가는 계획을 만들었다. 그로써 아마도 전쟁의 폐허를 완전히 없애고 패전의 기억마저도 없앨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다시 후회하였다 한다. 이 뢰머광장에 일어났던 슬픈 과거를 억지로 기억하지 못하도록 새롭게 나타난 옛 모습들은 도시의 역사를 오히려 후퇴시켰을 뿐이었다. 마치 이상한 요술나라를 만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 이 건물들은 박제된 세트였지 건축이 아니었다. 그들 나치시대의 악몽과 패전의 슬픈 과거를 감추려 한 이 세트에서 공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더욱 손가락질 받게 되는 자괴의 감정도 함께 느꼈던 것이다.
그러다 1980년, 뢰머광장과 뢰머대성당을 연결하는 중요한 장소에 문화복합시설을 세우기로 하고 이를 현상 공모하여, 베를린 출신의 젊은 건축가 협동 팀의 설계안을 당선시킴으로써 이 뢰머광장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결과부터 이야기 하면, 로마시대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문화역사 도시의 성숙한 시민으로서 그 자긍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쉬른 미술관이라 불리는 이 건축은 3000평 정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미술전시관과 음악학교와 미술공방 그리고 몇 개의 숙박시설과 소규모 문화상업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이 건축물들을 단순한 하나의 건축물이나 기념적 장치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고 시간과 시간을 이어주는 도시적 유기체로 개념을 설정하였고, 정확한 역사인식과 면밀한 주변 맥락의 분석을 거친 이 새로운 건축은 뢰머광장에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열게 된다.
대성당에서 시청사에 이른 150m길이의 공간에 옛날 길이 있었던 위치에 다시 길을 만들었으며, 건물이 있었던 부분은 건물로, 광장은 다시 광장으로 안과 바깥을 만들고 그들을 적절히 연결시켰다. 그리고 새롭게 구축된 그 길을 따라 가는 동안에, 로마시대의 유적도 만나고 카롤링거 시대의 유적도 만나며, 근대의 비극도 만나고 현대의 시간과 흔적을 실제와 상상 속에서 부딪히는 무한한 시간여행을 하도록 한다.
때로는 긴장하면서 때로는 이완되도록 다양하게 조직된 이 속의 공간을 체험하면서, 내 외부가 자연스레 연결되는 회랑과 길과 복도를 따라가다 중앙 로툰다로 나오게 되면 둥근 홀 속에 혼자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00m가 넘는 길이의 좁고 긴 열주의 모습은 마치 대성당과 뢰머광장 사이에 잠시 끊어졌던 역사의 공백을 강렬하게 접속시키는 듯하며, 그 앞 마당에는 지난 시대들의 유구들이 그냥 부서진 채로 있어 마치 버려진 듯하나 사실은 그 속에 담긴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를 침묵으로 들을 수 있다. 누구나 이 속에서 역사가 적층된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되면서 자연스레 역사의적 전개 과정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 ‘쉬베르트페르게쉔’이라고 이름했던 길은 그 앞에 ‘옛날의’이란 단어를 붙여서 새 길의 이름을 표시하였는데, 한 노인이 손자인 듯한 아이의 손을 잡고 이곳에 다가와 벽에 붙은 그 길 이름판을 가리키며 얘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릴 적 이곳, 이 거리에서 겪었던 얘기를 들려주고 있었을 게다.
루카치(Gyorgy Lukacs 1885-1971)의 미학적 세계관을 다시 인용하면,”발전에 종말이란 있을 수 없고, 인간의식 -자기 인식을 포함하는-의 수준에 따라 인간에 의해 변경될 있고 또한 변경되는 방향 만이 존재할 뿐” 이라고 강조한다. 루카치의 믿음은 “인간활동이 변증법적인 발전을 통하여 수단과 목적의 보다 큰 완전성에로, 따라서 인간 생의 질적 향상에로 전진한다” 는 것인데, 그는 문화에서의 진보에 관해 언급하길 “그것은 백지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요청에 따라 앞선 시대의 업적들을 흡수한다”고 하며 “진보란 누적적이다”라고 결론 맺는다.
좀더 인용하면, 그는 ‘미적 반영’ 의 요소에서 시간과 공간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설명하며 “시간은 인류발전의 공간” 이고 규정하고 공간 예술에서 시간의 가치를 중요시 한다. 또한 그는 예술에 있어서 총체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예술을 주목하는 항목에서 “모든 예술적(리얼리즘적) 반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사회- 역사적 맥락” 임을 얘기한다.
굳이 루카치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어떤 건축을 주목하는 방법이 적어도 문화현상의 범주에서라면, 그 건축 자체의 물적 형상만은 그리 큰 가치가 없을 것이다. 건축 속에 담긴 인간의 삶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며, 그 삶의 기록이 정체된 다면 그것은 죽음이거나, 박제일 뿐이다.

일본인 건축학자 고야마히사오는 건축과 그 건축이 가지는 기억을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건축은 항상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그 의미를 형태로 만들고 그 건축에 의해 더욱 그 장소의 의미는 확대되고 다음의 건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어 마을과 도시가 생겨난다….도시는 기억의 적층이다….도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대를 넘어 사회와 문화의 연속성을 지탱하는 것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건축가였던 미국의 프랭크로이드라이트는 건축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여러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은 건물들의 집합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바로는 건축은 삶이며, 혹은 적어도 삶을 형성하는 기반이다. 따라서, 건축은 우리들의 지난 날의 삶에 대한 가장 진실된 기록이 되며, 오늘날과 훗날들에도 그렇게 남을 것이다. 그래서 건축은 위대한 영혼이다. 그렇다. 건축은 모든 세대를 통하고 시대를 걸쳐서, 인간의 본성과 그 변하는 환경을 따라 진전되고 존속되며 창조하는, 위대한 살아있는 창조적 영혼이다. 진정으로 그런 것이 건축이다.”

카사델아구아. 우리는 이 건축을 파괴할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리카르도 레고레타. 이 아름다운 건축을 우리에게 선물한 사람입니다. 이 건축을 제주의 땅에 세우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도 외로운 건축가의 길을 고집하며 걸었습니다. 그의 건축은 세태에 영합하지 않으며 인기의 유혹에서 자유로왔습니다. 이 올곧은 건축가적 삶을 지킨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불과 몇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며 동시에 소명입니다. 저는 그 소명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전제하는 지 압니다. 그런 건축가가 지은 건축은 그 사람에 의해서 운명 지어진 위대한 창조물이며 그에 의해서만 그 운명이 결정되어집니다. 불행히도 카사델아구아를 창조하고 그 운명을 움켜진 그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아무도 그의 권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건축은 이제 역사에 맡겨져야 합니다. 이를 거스르는 것은 로마의 문화를 짓이겨 파괴했던 반달족의 반문화적 행위로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그 반달리스트의 대열에 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