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양덕성당 그리고 박기홍신부님

생활성서

2022. 3. 01

제가 가톨릭과 처음 만난 것도 건축 때문이었는데 1977년의 일입니다. 그 당시의 저는, 김수근선생이 이끄는 ‘공간’이라는 설계사무소에서 스물다섯살 3년차 직원으로 건축을 맹렬히 수련하고 있던 때입니다. 그해 봄날, 한 외국인 신부님이 오셔서 김선생님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가시더니, 곧 이어 선생께서 저를 불러 마산 양덕성당의 설계를 담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례적이었습니다. 한 프로젝트를 책임지려면 적어도 6,7년차가 되어야 하는데 초짜배기였던 제게 이 일을 맡기신 이유를 아직도 저는 모릅니다. 다만 그 당시 군사독재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건축만이 탈출구로 여기며 미친 듯 몰두하던 저에게 이 성당 일은 운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절실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애써 멀리하던 제가, 바티칸 공의회 기록을 뒤지며 가톨릭의 전례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장구한 교회건축의 역사를 들추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란 무엇일까라는 본질적 명제에 부딪쳤습니다.

교회라는 말은 에클레시아(Ecclesia)라는 헬라어가 그 어원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처음 사용했다고 하지요 ‘밖으로’와 ‘부르다’가 합성된 것으로, 부름을 받은 이들이 다른 곳으로 모여든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무리를 뜻하는 말이며 교회당이 건물입니다. 부름을 받은 무리라는 말에는 속된 곳에서 경건한 영역으로 장소를 바꾸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자꾸 어원을 들추는 게 송구스럽지만, 성전을 뜻하는 라틴어로 파눔(Fanum)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파눔의 바깥을 프로파눔(Profanum)이라고 하며, 이는 속되다는 뜻의 영어인 profane의 어원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부름을 받아 속됨을 멀리하고 경건함을 찾아 모인 공동체이며, 그 프로세스의 표현이 마산성당 설계의 우선과제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당의 원전이 있을까요? 단호히 말씀드리면, 없습니다. 기독교의 기원이신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무리들은 주로 들녘이나 갈릴리 호숫가에 모여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원전이라면 그 야외의 장소겠지요. 또한 초대교회는 박해 받던 시절이라 교회를 위한 공공건물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공인된 후 많은 이들이 모일 장소가 필요하게 되자 큰 공간인 재판소 건물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재판소의 라틴어 명칭이 오늘날 대성당으로 부르는 바실리카입니다. 이 재판소가 초기그리스도교회의 유형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로코코 등 시대별 양식의 변천 속에 교회건축은 늘 당대의 대표적 건축으로 역사에 기록되어왔습니다. 이런 건축사의 의미는 좋은 건축은 그 시대를 성격을 잘 나타낸 결과라는 것이니, 오늘날에 짓는 성당이라면 오늘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결과여야 하겠지요. 지금에 고딕이나 바로크형식으로 짓는다는 것은 반시대적 건축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건축을 시대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1977년도, 그 절망적 군사독재의 시대, 특별히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더구나 양덕성당이 들어서는 곳의 주변에는 공장들이 있어 고향을 떠나 노동에 내몰린 젊은 여성들이 늘 눈에 띄었고 이들을 위해서도 성당은 위로의 공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부르심의 기적과 응답의 은총, 그로써 이뤄지는 종교적 축제의 풍경. 설계하는 내내 제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선 바깥 도로에서 완만한 경사의 길을 이어 성당으로 부름을 받은 이들이 모이는 풍경을 그렸습니다. 본당 내부는 하나의 큰 공간이 아니라 여러 개로 나누고 만만한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는 저 같은 이들도 구석에 숨어 미사를 드릴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중첩되는 지붕의 사이로 빛들이 들어와 벽돌의 벽을 타고 내부를 따뜻이 밝히며 교회를 축복합니다. 은혜의 빛이 그렇지 않을까요?

준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는데,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듯한 한 젊은 여성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후 다시 나왔을 때 밝은 얼굴로 바뀌어 있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든 공간이 이 여성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었을까요? 제게 부과된 사명을 조금이나마 행한 듯하여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이 건축은 완공되자말자 건축계에서는 소위 대박을 쳤습니다. 수많은 건축학도들의 순례지가 되었고,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빠르게 소개되면서 김수근선생의 세계적 명성 취득에 지대한 공을 세웁니다.

이 성당의 건축에는 반드시 말해야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성당의 설계를 의뢰하신 박기홍신부님입니다. 박 몬시뇰. 본명은 요세프 프라처(Josef Platzer). 이 분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70년에 그라츠교구의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셨습니다. 1996년 지병 치료를 위해 그라츠로 돌아갈 때까지 25년 넘는 한국생활에서, 그라츠교구의 도움을 끌어내며 이 성당을 지은 것 외에도, 열악한 환경에 처한 이 땅의 노동자들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습니다. 한국을 그렇게도 사랑하셨는데, 고향에 돌아가서도 “제2의 한국인으로서 그라츠교구에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할 생각이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2004년 72세의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저는 박신부님과 설계 때는 물론 그 후에도 깊은 유대를 맺었습니다. 저의 짓궂고 비틀린 질문에도 유머를 섞어가며 정확하게 답하시는 그의 온화한 모습은, 꼴통이던 저를 그대로 허물어뜨리곤 했습니다. 짐작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20대이던 그 당시, 분노를 가슴에 가득 안고 살았습니다. 독재정권과 기득권의 사회, 그들 편에 선 종교에 대해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에 대해 늘 분노가 있었는데, 박신부님과 소주 먹고 나오는 날은 그렇게도 아름다운 평화가 가득했던 것입니다.

제가 1980년, 518 광주 일로 심리적 절망에 빠지자, 신부님은 제게 비엔나로 유학 갈 것을 강력히 권유하셨고, 학교와 숙소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해 여름 비엔나로 떠난 저는 그곳 수도원에서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불과 2년간의 거주였지만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결혼도 비엔나에서 하고 애도 낳았으며, 특히 건축가는 예술가나 기술자가 아니라 지식인이어야 하며 건축을 통해 세상을 혁명할 수 있다는 것을 거기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마산양덕성당은 저의 삶에서 몹시 소중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지은 지 44년이 되는 지금 이 성당의 모습은 저를 몹시 아프게 합니다. 비가 새어 그렇다고 하지만 벽돌로 된 지붕을 다른 재료도 덮어 씌워, 바닥부터 지붕까지 오로지 하나의 재료로 짓는다는 중요한 설계개념을 배반했을 뿐 아니라 박신부님과 그렇게도 오랫동안 이야기 하며 정했던 제대의 십자가도 바꿔버렸습니다. 서양의 성당이라고 그런 크고 작은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수백년의 세월 속에서도 원형을 잃지 않고 역사에 남아 오늘에 전합니다.

부탁드립니다. 혹시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 다시 원형의 아름다움을 찾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실력도 더 쌓아 있으니 그때 혹시 저의 잘못으로 생겼을 지 모르는 문제들도 이제는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원형을 꼭 복원하고 싶습니다. 그게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그렇게도 헌신하셨던 박신부님에게도 보답하는 일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