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풍경_한스 샤로운의 베를린 필하모니 홀

대우건설 사보

1999. 9. 10

도시와 건축이 이 땅 위에 서게 되는 동기가 수 없이 많지만, 건축의 역사를 통하여 그래도 우리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건축은 대개가 문화적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었다. 물론 그러한 건축은 불과 소수이며 이 땅에 서 있는 대다수의 건축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 진다. 예컨대 자본이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인자가 된 요즘에는 경제적 동기에 의한 건축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자본이나 경제적 동기에서 만들어지는 그런 건축 속에서의 삶은 어쩐지 비릿한 냄새가 나기 쉬우며 건강한 건축이 되기 어렵다. 시민의식이 싹트기 전인 옛날에는 지배계층의 권력이 도시와 건축을 만드는 중요한 동기였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도 하는 도시와 건축이 그러한 절대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면 그 건축은 거의 주종의 관계를 설정하고야 마는 공간을 만든다. 결국은 그러한 계급적 공간 속에서 인간의 참다운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게 된다. 가장 나쁜 경우가 잘못된 이념에 의해 만들어지는 건축이다. 아마도 인간을 도구화 시키는 그런 건축의 종말은 거의 항상 탄식과 허무일 것이다.

알버트 스페어( Albert Speer )라는 건축가가 있었다. 히틀러가 총애한 이 사람은 나치제국의 2인자적 지위를 누린 파시즘 건축가였다. 히틀러와 나치제국의 영화를 과장하기 위한 도시와 건축을 짓는 일에 몰두한 그의 건축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파쇼에의 광신이었으며 그런 건축은 극도로 인간을 왜소하게 하고 결국은 인간을 마비시키고 파멸케 하는 힘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히틀러가, 소위 세계의 수도를 갖기를 원하여 1938년에 스페어를 시켜 베를린에 세우기 시작한 ‘게르마니아’가 바로 그런 도시와 건축의 전형이다.
베를린은 서구 도시의 역사 속에 13세기에야 비로서 기록되기 시작하는 젊은 도시이지만 18세기에 프러시아 황제의 계몽주의 정책에 힘입어 유럽예술의 확고한 중심지가 된 문화의 도시였다. 인류 문화에 불멸의 기록을 남긴 괴테가 이 문화의 도시 출신이며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만든 하이든과 베토벤, 모짜르트, 바그너가 그들의 예술혼을 불사른 곳 인 것이다. 그 외에도 수 많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비뚤어진 민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스페어와 히틀러가 베를린의 중요한 가로들을 절단하고 찬란한 문화의 흔적을 지우면서 그 위에 그들의 광신적 신전을 세운다. 물론 그들의 이 허망한 도시는 2차대전의 종언과 함께 결국 전대미문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각고의 노력과 함께 패전의 참상을 딛고 일어선 베를린 시민들이 폐허 위에 제일 먼저 세우기를 원한 것은 무너진 베를린 필하모니 홀 이었다 한다. 그들의 자부심이었으며 그들 도시의 문화적 상징인 베를린 필하모니의 음악이 그들의 회한과 분노를 달래줄 가장 유효한 치유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리라. 그들은 파시즘의 광신도들이 남긴 자국을 꿰매기 위해 바로 그 광신의 도시 ‘게르마니아’의 중심축이 지나갔던 장소인 티어가르텐 지구의 남쪽에 있는 켐퍼광장을 택하여 새로운 베를린 필하모니 홀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이 켐퍼광장은 전후 또 다른 이념 분쟁으로 인해 동과 서로 갈라진 포츠담광장에 이웃하는 곳이었다.
1956년 12명의 건축가들이 초청되어 설계경기를 가진 결과 한스 샤로운( Hans Scharoun / 1893 – 1972 )의 안이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한스 샤로운은 브레멘 출생으로 이미 독일을 대표하여 1927년에 근대건축의 실험적 각축장이었던 스튜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설계한 세계적 건축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1951년에 ‘인간과 공간’ 이라는 주제어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건축개념을 발표하여 세계의 주목을 끌면서 당대의 거장의 반열에 들어선 진보적 건축가였다.

그는 베를린을 다시 문화의 도시로 환원시켜야 할 당위를 주장하고 문화의 포럼을 켐퍼광장에 세울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공산주의의 지배하에 있던 동 베를린에 대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싶어하는 서 베를린 의회를 매료시키는 제안이었다.
그는 그의 당선작 베를린 필하모니 홀을 설명하면서 ‘음악을 가운데 두는 곳’이라는 말로 그의 개념을 요약하였다. 그 전까지의 거의 모든 음악홀이나 공연장은 무대가 맨 앞에 위치하여 객석과 공간적으로 분리되었을 뿐 아니라 연주자나 공연자는 객석을 향하여 일방적으로 음악을 던져주고 객석의 관중은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그런 형태였다는 것이다. 프로세니움이라 불리는 이런 형태의 공간은 그러한 일방향적 의사소통으로 인해 공연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의 유대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즉 한 공간에 동시에 있으면서도 전체적 공동체를 형성하기 어려운 결과를 만든다.
여기서 극장의 원형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서양건축에서 극장의 원형은 물론 그리스의 야외극장이다. 앰피씨어터라 불리는 이 노천극장은 반원형의 무대를 아래에 두고 경사진 언덕에 객석이 동심원을 그리며 배치된 형태이다. 객석에 앉은 관중은 무대의 배우를 볼 뿐 아니라 그 자리에 같이 앉은 관중들을 본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공유’라고 하는 가치를 염두에 둔 건축 개념이다. 모든 이들이 같은 시간에 같이 앉아 같은 음악을 듣고 보는 것을 서로 마주보며 확인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참여해 있다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이며 그러한 민주적 건축이 있는 도시와 사회는 당연히 민주적 사회가 된다. 아테네와 로마의 민주정치는 여기에서 비롯되었음 이라.
오케스트라를 홀의 한 가운데에 위치시킨다는 것은 종래의 극장건축의 설계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중세이후 변질되어온 극장건축의 원형을 되찾는 일일이었다. 건축의 본질에 다시 다가선 샤로운의 안은 좌석과 무대를 경직된 일직선 상에 위치시키는 경직된 방법을 탈피했을 뿐 아니라 공동체적 공간을 재창조한 사건이었으며 그의 공간은 투시도적 관점에 익숙해 있던 모든 공간구조를 일시에 무너뜨리는 전환점이 된다. 이 안이 맨 처음 발표되었을 때 카라얀은 샤로운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내었다 한다.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오케스트라 핏트는 경사진 언덕에 놓인 테라스에 의해 모든 면이 둘러싸여 있다. 이 테라스는 때로는 불과 몇 십 명을 위한 자리 만을 수용하는 곳도 있어 서로 더욱 강한 유대를 느끼게 한다. 물론 마주 보는 테라스들은 그 속에 앉은 이들이 서로를 확인하며 친밀감을 만들어 내도록 가까이에 있다. 그러나 이 친밀감으로 인해 언뜻 작은 크기로 느껴지는 이 홀은 놀랍게도 무려 2,218석의 좌석을 수용하고 있으며 어떤 곳의 좌석도 무대로부터 가시거리 한계인 32미터 이상을 벗어나지 않도록 되어있다.
아름다운 곡선의 테라스들이 친밀하게 조직된 이 연주장의 천정에는 구름처럼 보이는 음향판이 춤추듯 달려 있고 그 사이를 비추는 조명불빛은 마치 밤하늘의 별빛처럼 보인다.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연주장을 빠져 나오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또 하나의 공간이 더욱 새롭게 나타난다. 계단들과 회랑들이 연주홀의 하부인 로비공간으로 흐르면서 아름다운 공간이 오케스트라의 음향처럼 전개되는 것이다. 마치 금방 홀 안에서 감동적으로 들었던 연주가 다시 공간으로 변하여 확인 시키는 듯 하다.
이 벅찬 감동은 내부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도 이어져 흐른다. 이 베를린 필하모니 홀의 외관은 곡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부 만으로 보면 뜬금 없이 보일 수도 있는 이 곡선은 내부의 선율이 그대로 밖으로 흘러 만들어 진 것이다. 외관만을 위한 배려가 전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한스 샤로운이 정작 이루려 한 새로운 성취는 건축의 혁명적 형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이 건축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전 생애에 걸친 연구한, 인간과 공간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이는 바로 건축 속에 ‘공동성( Communality )’의 가치를 굳게 확립하여 갈라져 있던 우리를 변화 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극단적 배타주의인 나치가 남긴 참혹한 기억을 극복하게 하였고 나아가 일그러진 이념에 대한 인류의 승리였다.

내가 지난 겨울 이곳을 찾아 상 뻬떼르부르그 필하모니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첼로협주곡을 듣고 있었을 때, 나는 음악 만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건너편 테라스에 앉은 할머니들이 감동 받는 표정을 보고 있었고 그 옆의 테라스에 옹기종기 모인 연인들의 밀어를 들었고 그 위에 앉은 노인의 사색을 느꼈었다. 실로 첼로의 음을 매개로 하여 모두가 하나가 되는 시간이었으며 모두가 서로의 감동을 나눔으로 그 색채가 더욱 농밀해지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밤이 되고 있었다.

이 베를린 필하모니 홀은 착공 후 3년 만에 완공된다. 이 홀이 완공된 몇 년 후,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그의 모든 건축적 정수를 다 하여 베를린 미술관 신관을 이웃하여 짓게 되면서 이 켐퍼광장은 명실공히 베를린의 중심적 문화지역이 되었고 베를린 시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중요한 문화적 생산기지로 인식되었다. 더욱이 이 광장은 바로 베를린 장벽이 지나가는 포츠담광장에 이웃한 까닭에 민주주의의 체제적 우위를 선전하기에는 제격이었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린 날, 바로 그날 밤, 벤츠와 소니라는 거대 자본은 이 포츠담광장의 개발계획을 발표한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들 자본이 만든 고층의 건물들이 공룡처럼 솟아 그 한 많은 베를린 장벽의 기억을 깡그리 지우고 온갖 현란한 모습으로 유혹하며 소비를 아우성질 하듯 서 있다. 아 굶주린 자본이 만드는 도시가 이 역사적 현장에 서서 이념도 굴복했던 이 문화의 도시를 다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념보다 더욱 교묘한 자본의 장벽이 다시 서 있는 듯 느꼈다면 이는 나의 염세적 습관 때문인가.

바라건대 문화로 세운 도시는 결단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 도시는 우리의 눈 앞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정신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라는 마약이 아무리 우리를 취하게 만들어도 베를린 미술관 신관의 투명한 유리벽에 비치는 이 베를린 필하모니 홀의 황금빛 벽 그리고 그 안의 풍경, 이 아름다운 건축은 이미 우리의 마음 속 깊이에 존재하여 화석처럼 잊혀질 수 없는 풍경이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