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 콤플렉스

동아일보

2002. 11. 22

세계의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서울만큼 아름다운 도시를 찾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천만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들의 자연 경관만을 따지자면 서울은 단연 선두이다. 평원 위에 세워진 도쿄나 베이징, 파리나 런던과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도시는 필경 높고 웅장한 건축물을 통해 도시의 인상을 결정짓지만 서울은 이미 자연적 풍광이 도시경관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즉 경사진 땅에 산세를 거스르지 않는 고만고만한 건축물이 모여서 만드는 집합의 아름다움이 우리 도시에 맞는 풍경이 된다.
서울을 찾는 외국의 건축가들이 더욱 서울에서 감동하는 것은 잘 정비된 고궁이나 재개발된 지역의 정돈된 모습이 아니라 서울의 일상이라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남대문시장의 어지러운 광경이나 동대문시장의 밤 풍경, 달동네의 부서진 모습, 아귀다툼하듯 서있는 길거리의 싸인 보드와 전광판들, 산비탈의 집들,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북촌의 골목길들이 이들에게는 매력적 장소이며 감동의 건축이다. 아마도 과거 유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다이내믹한 활기가, 우리가 도시의 치부라고 여기는 구석진 부분에서 실감되는 까닭이다. 그럴 것이다. 나 자신도 그네들의 도시에 가서 감동 받는 것이 영웅적 기념물이나 잘 가꾼 궁전들에서가 아니라 뒷골목의 흐트러진 풍경이나 오래된 민가의 삶의 모습에서 귀한 건축의 지혜를 발견하곤 했었고 그로 그 도시의 인상을 오랫동안 가질 수 있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도시의 인상은 이러한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이 더욱 중요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소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은 규율적이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는 도시 풍경이어서 언젠가는 다시 정비하고 재개발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개발독재시대의 잔재에 따르면 우리의 도시적 목표는 반듯한 길 거리와 잘 정비된 가로 풍경이며 가지런한 아파트 덩이와 상투적인 조경에 대한 성취일 뿐이다. 그래서 신도시들은 거의가 똑 같은 풍경을 하고 있으며 오랜 역사를 가진 옛 도시들 마저 이런 구태의연한 교과서에 맞추어 재개발 해 대는 것이다.

다행스럽게 서울의 강북은 오랫동안 이런 개발의 광풍에서 벗어 난 까닭에 아직까지 우리 고유의 도시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많다. 강남보다는 산길도 많고 물길도 많으며 길도 반듯한 길이 드물어 아기자기한 골목길 풍경을 만든다. 게다가 아직 필지의 규모들도 대부분 작아서 그 위에 선 작은 집들이 모여서 만드는 집합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친근하다. 그래서 나는 이 강북에 일터를 잡은 지 사반세기가 넘는 지금에도 떠나질 못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괜히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새 시장이 부임한 이후로 강북에다가 봇물처럼 개발, 재개발의 단어를 쏟아 내며 다시 또 개발의 광풍을 예고하고 있어 그러하다. 청계천을 복원하고 낙후된 지역을 정비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 목표가 과거의 낭만적 풍경의 부활이나 상투적 신도시의 재생이 목표라면 그 개발은 옳지 않다. 더구나 개발이익을 따져 우리의 삶터를 부동산가치로 환산하며 주민을 설득하는 천민자본주의적 개발은 거의 죄악에 가깝다. 돈에 눈이 멀어 우리가 잃어버려야 하는 기억의 양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비록 누추하였더라도 그곳에서 수 십 년간 있었던 삶은 가치 있는 것이며 그 또한 기억되어야 할 귀중한 역사인 것이다. 아니다. 무엇보다도 과연 그런 외형적 개발과 우리의 행복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먼저 논하는 것이 옳다. 어쩌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를 몇 년간을 지속적으로 토론하고 시민적 담론 만을 쌓아도 우리의 문화적 수치는 한층 높아질 것이며 그것이 더욱 성숙된 개발일 것이다.

우리는 지난 날 새로운 역사 창출 운운하며 우리가 소중히 가꾸어 왔던 삶터를 순식간에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하는 반문화적 사례를 무수히 경험하여 왔다. 그것은 메시아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反역사였다. 이제는 떨쳐버림직도 하건만 아직 더 많은 기억을 잃어버려야 그런 열등의식에 벗어 날 수 있을 것 같아 답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