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진보하지 않는다’-이상도시 폼페이

중앙일보 사회

2004. 1. 22

근래에 우리만큼 많은 신도시를 건설한 나라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지난 70년대 서울의 강남을 필두로 바뀌어지기 시작한 우리 땅의 풍경은 그야말로 상전이 벽해가 되었고 천지가 개벽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고 계획되고 있다. 넓은 도로와 높은 아파트들, 표준화 된 놀이터와 근린공원 그리고 난삽한 간판의 상가들…… 판박이 한 듯 어디서나 보이는 이런 신도시들의 모습은 이미 우리 시대가 꿈꾸는 이상도시의 풍경이 된 듯하다. 그런가? 그런 신도시에서 사는 우리 삶이 옛 도시에서의 삶보다 진보된 것이며 이상적인가?
도시가 형성된 시기는 BC 3500년경이라고 한다. 잉여생산물을 처리하기 위한 시장기능이 필요하게 되면서 발달한 도시는 본질적으로 이익 공동체이다. 따라서 그 추구하는 이익과 목표에 따라 흥망성쇠를 끊임없이 이루어 왔지만 도시의 역사에 급격한 팽창을 기록한 것은 18세기에 일어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결과였다. 개인의 자유와 재물의 축적이 가능해지면서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는 슬로건 아래 농촌의 인구는 끊임없이 도시로 집중이 되었고, 이를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도시의 건설이 수도 없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을 꿈꾸는 건축가들은 이상도시 건설을 목표로 수많은 계획을 발표하고 실현하였으며 바야흐로 모든 이들이 낙원 같은 환경에서 살 것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로써 등장한 20세기의 도시는 그전의 어느 때 보다 더 많은 문제와 갈등을 야기하고 만다.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계층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으며 각종 소외와 범죄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심마저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건축가들이 그렸던 보랏빛 미래는 곧잘 잿빛 현실이 되었고 첨단과학으로 만들어진 현대 도시들은 흉기가 되어 우리의 삶을 오히려 위협하곤 한다.
이게 이상도시인가.
이러한 의심을 더 없이 짙게 만드는 곳이 있으니, 폐허로 남은 도시 이탈리아의 폼페이이다. 이 도시가 한창 번성하고 있던 79년, 베수비오 산의 폭발로 일시에 멸망한 후 오랫동안 도시 전체가 화산재 속에 묻혀 있었던 탓에 이 도시의 생활을 지금도 생생히 알 수 있다. 폼페이는 토지가 비옥한 캄파니아 지역에 위치하고 로마에서 남쪽으로 뻗는 아피아 가도에 접한 교통의 요충지였던 까닭에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BC 8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이 거주하였고 이어 북부에서 내려온 에트루리아인들이 고유의 문화를 이루었으며, 로마시대에 접어 들면서 로마인들의 휴양지로서 번성하기 시작하여 상주인구 2만 명이 넘는 대 도시가 되었다.
사방 2km의 영역을 성벽으로 두르고 내부에 포럼이라는 공간을 설정한 후 이를 중심으로 엮어진 격자형이 이 도시의 기본 구조이다. 격자의 구조에서는 모든 부분이 평등한 관계를 갖는다. 이는 민주 사회(데모크라티아)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그리스 도시국가의 형태였으며, 기하학을 집대성한 피타고라스의 제자 히포다무스가 설계한 밀레토스가 처음이었고 알렉산드리아와 프리에네, 페르가몬 그리고 폼페이가 그 뒤를 이어 건설된 격자형의 도시이다. 모두가 민주적 이상도시를 꿈꾼 계획이었으며 더구나 폼페이의 시절은 바야흐로 ‘팍스 로마나’의 시대였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의 하부구조는 그 도시가 기진 문명의 수준을 정한다. 첨단 기술시대인 21세기를 사는 지금에도 각 가정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망을 가지지 못한 도시들이 즐비한데, 이천 년 전인 그 당시 폼페이는 집집마다 수도가 공급되는 도시구조를 이미 가졌다. 뿐만 아니라 마차와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다니게 하는 도로 시스템을 이루고 있었으며, 돌로 포장된 모든 도로 밑의 하수로는 완벽한 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세운 건축의 아름다움과 구조적 건실함은 대단한 것이다. 집집 마다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마당이 있고 아름다운 그림의 벽과 천정, 각종 조각물과 생활용품은 고도의 세련된 솜씨를 보인다. ‘베티의 집’이나 ‘목신의 집’이라고 이름이 붙은 큰 주거에서 발견되는 생활양식의 질적 수준은 가히 놀랍거니와 낮은 계층민이 산 작은 집들에서도 그 수준은 변하지 않고 있다.
도시의 프로그램은 또 어떤가. 공회당이나 신전 같은 정치적 종교적 시설의 완벽함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민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극장과 체육관 경기장 등의 여가시설이 즐비했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공중목욕탕은 갖가지 기능의 공간들을 내부에 가지고 있어 그곳에서 그들이 즐긴 황홀한 삶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느 한 골목을 돌면 적당히 구석진 곳에 선술집이 있고 서민들이 그 애환을 나누며 술을 마시며 떠들던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는데, 그 선술집 건너에는 매춘부의 집으로 여겨지는 집도 있다. 그 속에는 춘화가 잔뜩 그려져 있었으니 아마도 공창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녁 무렵 왁짝지껄 부산하게 움직이는 이 폼페이 골목의 풍경이 너무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사랑하고 꿈꾸기에 자유로운 도시, 때로는 슬퍼하고 좌절하는 삶을 즐기는 도시, 성과 속,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 적당한 대립과 긴장을 이루고 적절한 처방을 얻는 도시, 그 도시는 산 자를 위한 공간이 된다. 이 폼페이에서는 그 살아있는 도시의 모든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미 폼페이는 ‘자유로운 공기’를 가진 도시였으며 이는 현대의 도시계획가들이 꿈꾸던 이상도시였다.
나로 하여금 이 도시를 더욱 경외롭게 바라보게 한 것은 주거지역 내에 있는 동네 모습이다. 그들이 모여서 사는 동네는 모든 계층이 같이 모여 있었다. 큰 집과 작은 집이 같은 블록 내에 있을 뿐 아니라 귀한 직업을 가진 이와 천한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이웃하여 살았으며 부자와 빈자가 한 곳에 모여 같은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신분의 계층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여 사는 지혜를 알았으므로 서로를 이웃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적 사회를 부르짖지만 갖가지 계층으로 갈라질 대로 갈라져 사는 우리의 현대 도시보다 훨씬 진보한 것이다. 그야말로 이상사회이며 이상도시임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 이 폼페이는 완벽한 도시였다.
완벽한 행복을 즐기던 폼페이 시민들에게 바로 인근에 우뚝 선 베스비오 산은 그들의 도시를 지켜주는 든든한 신의 구체적 형상으로 섬겨졌을 수도 있다. 그렇게 믿었던 그 산은 79년 8월 24일 정오, 대폭발을 하고 만다. 어떤 이는 낮잠을 즐기다가 더러는 목욕을 하다가, 또 어떤 이는 식사 도중에 그대로 그 행복한 삶의 순간이 영원이 되었다. 모든 도시의 순간이 정지하고 만 것이다.
그 조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미 63년에 지진이 있어 그 징조를 보였으나 폼페이 인들은 오히려 일부 파괴된 시가를 신속히 복구하여 더욱 완벽한 도시로 다듬어 어쩌면 더 이상 진보할 방법이 없는 도시로 만들었다. 완벽한 행복에 대한 복수일까. 그러한 그들의 행복에 더해 줄 것이 없던 신은 이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멸망시켰을 게다.
‘문명은 결코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이 폐허의 도시 순례를 마친 후, 동행한 선배 건축가인 민현식 형이 내뱉듯 한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못난 도시들을 생각하면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신도시는 우리 삶에 대한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상도시는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