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조건축

중앙일보 시론

2005. 2. 17

건축하는 이들 사이에서 통하는 ‘박통변소’라는 건축단어를 아시는지. 이 건축은 시골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데, 마을 어귀나 주택의 바깥에 소변기와 푸세식 대변기 하나씩을 가지고 계란색으로 칠해진 블록조의 간단한 구조물을 말한다. 60년대 말부터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전국 어디에서나 세워졌던 변소이다. 이 박통변소와 함께 개발시대의 시작이었던 새마을사업은 우리의 산하 풍경을 그야말로 천지개벽하였다. 고즈넉히 아름다운 우리 산하를 닮아 어디가 인공이고 어디가 자연인지 구분 지을 수 없던 농촌마을의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던’ 초가지붕들을 시뻘겋고 시퍼런 함석지붕으로 뒤덮어 천하의 난장으로 바꾸었고 ‘옛 이야기 지줄대던’ 굽은 길들은 콘크리트 포장의 차렷자세로 뻗게하여 수 천년 농촌의 역사풍경은 ‘참하 꿈에도 잊히고’ 말았다..
건축적으로만 보아도, 우리나라 역사를 혁명적으로 바꾼 사람이 박정희대통령일 게다. 정말 그랬다. 그는 우리 건축공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개발시대 이전에는 모든 집들의 방들은 안방이며 건넌방 문간방이었고 심지어 변소도 뒤에 있다고 뒷간으로 부를 정도로 그 위치에 따라 이름하였는데, 그래서 어느 방에서든지 요를 깔면 침실이고 식탁을 놓으면 식당이며 책을 펴면 공부방이 되고 담요를 펼치면 화투방이 되는 집들이, 문화주택인가 불란서미니2층집인가 하는 형식의 집으로 바뀌면서 방들은 모조리 거실 침실 식당 주방 심지어 변소도 화장실로 바뀌어 반드시 정해진 목적으로만 방들을 사용해야 했으니 거주인 마음대로 방의 용도와 기능을 정하던 우리네 창조적 주거공간의 역사는 그로써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게다가 두부 모 자르듯 반듯하게 도열하고 높은 담장에 유리조각까지 두르며 나타나 이웃은 균열하고 동네는 모여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붙어사는 집단취락지가 된 강남의 주택단지 개발도 그 때부터였다.
공공건축은 더 확실한 특별한 양식을 갖게 된다. 아마도 그 당시가 한국적 민주주의인가 하는 논리를 서슬 퍼렇게 강제하던 때이다. 거의 모든 기념적 건축은 한국적 건축을 하기 위해서 콘크리트로 짓지만 기와를 올려야 했으며 하나같이 노란 계란색으로 칠해야 했다. 광주박물관이며 어린이 회관이며 국기원이며 그 기능과 목적을 가릴 것 없이 기념적 공공건축물은 모두 그런 몰골을 하고 태어났다. 양식 있는 건축가들은 이 우스꽝스런 반문화적 건축을 모두가 조소했으나 이를 대놓고 비판한다는 것은 목숨 거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의하든 않든 이런 건축은 시대의 양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올해 초 안동의 한 마을에 갔더니 지금 짓는 기념관도 그런 꼴로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 건축가 김수근 선생은 이 건축들을 가리켜 박조건축(朴朝建築)이라고 불렀다. 지독한 냉소였다. 박정희대통령의 글씨로 쓰여진 이들 건축의 머릿돌과 현판들은 그 박조건축의 화룡첨정이었던 것이다.
최근 광화문 현판의 교체를 두고 여론이 들끓는다. 광화문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모두들에게 몹시 중요하게 여겨지는 모양이다. 나는 이 논쟁이 정치적으로만 치닫는 것에 대해 몹시 안타깝다. 소위 반박과 친박, 진보와 보수 등으로 나뉘는 이런 유치한 논쟁의 결과는 허무일 뿐이다. 결단코 생산적일 수 없다. 가물에 콩 나듯 역사와 전통에 관한 의견이 개진되기는 하나 이내 욕설과 비방 속에 묻혀버린다.
나는 이 일이 지난 시대 우리의 일그러진 문화형식이었던 ‘박조건축’에 대한 총체적 논쟁의 기회로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가치, 건축과 문화, 시대와 전통 등등 얼마나 좋은 논쟁의 주제가 많은가. 이 문화논쟁들은 아무리 오랫동안 전개되어도 어느 누구도 패배하는 법이 없으며 모든 논거와 주장이 모두 우리의 문화적 자산이 된다. 그 서슬 퍼렇던 시절에도 ‘박조건축’을 놓고 전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논쟁하곤 했는데 오늘날 우리는 너무 반문화적 언행에 젖어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박조건축의 영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