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갈의 빛과 침묵_루이스 칸과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대우건설 사보

1999. 5. 01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나라 중의 하나라고 한다. 실제로 이 나라의 수도인 다카( Dhaka) 의 공항에 도착하면 구걸을 위해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이 상징하듯 도시 전체가 빈곤의 그림자에 싸여 있다. 길거리의 풍경도 서구의 문명에 잘 길들여진 눈에는 비위생적이요 불결하게 보인다. 물론 건물도 값싼 재료와 원시적 공법으로 만들어진 게 대부분이며 그것도 잔뜩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어 대단히 볼 품 없어 보일 수 밖에 없다. 마치 60년대 초 서울 변두리의 풍경이 이랬을까.
그러나 그러한 대단히 보잘 것 없는 건물들을 가만히 보노라면 그 가운데서도 범상치 않은 부분들을 언뜻 발견하게 된다. 즉 잘 짜여진 입면과 건실한 평면구조, 벽돌의 정교한 디테일 등, 결코 쉽지 않은 현대건축의 정수 같은 부분들이 이들의 길거리 건축에 일상처럼 박혀져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해서 이 가난한 도시의 건축들이 이처럼 보석 같은 모더니즘의 어휘를 가지고 있을까.
이 의문은 곧 풀렸다. 그것은 바로 루이스 칸이라는 불세출의 건축가가 이 도시에 던진, 시어(詩語)와 영감에 찬 건축,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때문이었다. 인근의 나라에 비해 찬란한 고대 문명의 유적 조차 많지 않은 이 도시에 갈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에도 하루에도 수 많은 이들이 이 건축을 보기 위해 그리고 건축의 본질성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 이 뜨거운 땅을 찾아 오는 것이다.

루이스 칸( Louis Kahn ). 그는 1901년 에스토니아에서 태어 나서 4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 필라델피아에 이민을 간다. 유 펜으로 불리는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폴 크리트( Paul Cret ) 라는 고전주의 건축에 정통한 선생에게 보자르식 건축을 공부하였으나 정작 그가 진정한 건축을 알게 된 것은 학교에서가 아니었다. 에꼴 드 보자르식 건축교육이란 장인정신에 입각하여 고전 건축의 비례나 테크놀러지, 디테일 등을 철저히 전수 받는 방법이다. 따라서 루이스 칸이 그 당시 유럽 건축계를 진동 시킨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치였던 모더니즘의 건축에 접근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1928년 고향을 방문하게 되면서 유럽의 건축 현장들을 보게 되고 드디어 그가 배워온 그의 모든 텍스트를 떠나야 한다고 결심한다. 고전건축에 익숙하여 그것이 건축의 전부로 알았던 그에게는 모더니즘은 대단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특히 꼬르뷔제의 건축은 그에게는 “반역적 사건”이었다고까지 그가 술회하였다.
물론 모더니즘 건축 만이 그에게 새로운 안목을 던져 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되는 여행에서, 이집트의 거대 기념물과 그리스의 신전과 로마의 욕장 특히 카라칼라 욕장의 폐허, 스코틀랜드의 성, 프랑스의 도시마을, 고딕성당, 르네상스 교회, 이탈리아 광장 등을 만나면서, 역사적 건축으로부터도 통시대적으로 건축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본질적 단서를 제공하는 보편성에 대한 발견과 성찰을 통해, 그의 건축을 완성해 나갔다. 그는 동시대의 건축가들에 비해 비교적 늦은 깨달음이었으나 그는 투철한 사색을 통해 그의 건축은 영감 속에 성숙하게 된다. 그는 때때로 시어 같은 단어를 구사하며 건축을 설명한다. 어떤 경우는 읽기조차 이해하기 조차 어려운 그의 말이지만 그의 건축은 항상 원론적이고 본질적 문제를 상기 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심오한 건축의 세계로 이끈다.
‘침묵과 빛’ – 이 말은 그의 건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이다. 비록 간결한 단어이지만 이 단어로 그의 건축이 얼마나 영감적이며 사색적인가를 알 수 있다.

1962년 동과 서로 나뉘어있던 파키스탄 정부는 동 파키스탄의 수도 다카에 새로운 국회의사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루이스 칸에게 이를 의뢰하게 된다. 동 파키스탄은 민족구성 상 벵갈인이 다수를 이루고 있어 결국 1971년 동서 분쟁 끝에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됨에 따라, 그 전부터 루이스 칸이 계획해 오던 행정타운은 이 나라의 상징적 중심이 되고 말았다.
루이스 칸은 그 당시 미국에서 존경 받는 건축가임이 틀림 없었지만, 사업적으로는 실패에 가까웠다. 설계기한을 어기기 일쑤이고 알지 못할 소리만 외는 그를 좋아 할 건축주나 개발업자들이 그 당시에도 있기가 힘들었을 게다. 그러한 그에게 이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는 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환상이었을 것임이 틀림 없다.
다소 신비스러워 보이는 그의 건축철학을 미루어 보드라도 그는 동양의 철학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이미 19세기에 벵갈의 르네상스를 만들었다고 칭하는 시성 타고르를 위한 협회에 50년대부터 회원이었으며, 예술은 휴머니티여야 한다는 타고르의 말을 빌려 그의 건축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가 이 벵갈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러나 1963년 처음으로 현장을 방문하면서, 다카의 델타에서 쌀을 경작하는 문화권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수평의 땅과 그 위를 덮는 물, 벼를 비롯한 물과 친근한 식생 그리고 진흙의 토양에서 벵갈인들이 갖는 생활과 종교를 목격하고 이를 건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몰두했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건축에서 같이 모이는 기능에 대해 중시하였다. 즉 같이 모여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를 나누는 건축 즉 공동성이 건축에서 갖은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그와, 모여야 하는 요구가 뜨거운 벵갈인들이 만난 것은 서로에게 행운이었다. 특히 루이스 칸은 국회의사당의 중요한 기능인 ‘법을 만드는 작업’을 종교적 의식으로 여겼으며 이는 모든 일상이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벵갈인들의 의식 혹은 전통적인 인도 미학의 관점에서는 절대적으로 환영 받는 개념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건축이 놓인 위치는, 다카의 구 도시로부터 북쪽에 세-레-방글라나가르( Sher-e-banglanagar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농사를 짓는 곳이었으며, 행정타운을 위한 전체의 부지 면적은 백만 평이 넘는 평원의 땅이었다.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주변에 국회관련 시설들을 두고 북쪽으로 신도시의 여러 시설을 둔 마스터 플랜은 루이스 칸이 오래 전부터 그리던 이상도시에 대한 그림이었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중심 된 시설은 국회의사당이다.
국회의사당은, 주변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서도 필요해진 호수를 파서 그 흙으로 약간의 둔덕을 만들어 그 위에 서게 되었다. 지난 무갈 제국의 영화를 연상하게 만들었을까, 남쪽의 광장에서 보면 회색의 콘크리트로 만든 원통과 육면체들이 서로 모여 성채처럼 우뚝 솟아 벵갈인들의 자부심을 부추긴다. 삼각형과 사각형 그리고 원형의 개구부가 회색면의 콘크리트 속에 파여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이 사이로 내밀한 내부의 풍경을 암시한다. 가까이 가면 주변 수면에 투영된 또 하나의 의사당은 이들의 전생인 듯, 바람 결에 어른 거리며 더욱 신비한 풍경을 만들고 짙게 푸른 나무와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 이들의 탄탄한 배경이다. 루이스 칸이 여기서 만들고자 했던 것은 건축이 아니라 풍경이었다고 한다. 소위 벵갈의 랜드스케이프, 평원에서 그는 집합의 건축을 세워 대비시키고자 하였다. 집합의 건축. 이는 루이스 칸 건축의 중요한 원칙이 된다.
정작 우리를 황홀케 하는 것은 이 건축의 내부에서 가지는 공간과 빛의 경험인데, 그 집합의 건축에 대한 원칙도 내부에 들어가면 더욱 분명해 진다. 내부는 국회의사당 중앙홀을 중심으로 회랑이 돌고 그 회랑의 주위에 사무국이나 회의실, 식당, 라운지 그리고 기도실 등이 둘러져 있다. 소위 만다라적 중심성이 주변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면 확립되어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이런 방들의 집합이 사회’라는 것을 증명하듯 다른 성격의 시설들이 집합되어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이 건축을 단순한 하나의 건축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작은 도시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회랑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길’이다. 이 도시의 ‘중심 도로’인 회랑에는 이들 시설들을 연결하기 위한 ‘작은 길’인 브리지나 계단, 경사로 들이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위에 뚫린 천창과 원형의 개구부를 통해 들어오는 빛의 조화가 마치 우리를 신비의 세계에 초대한 듯 하다. 우리는 석탑의 주위를 돌 듯 명상하며 그 길을 걷는다. 빛은 때로는 벽에 부딪힌 물처럼 떨어져 내려 오기도 하고 때로는 폭포처럼 느닺 없이 벽을 뚫고 들어 오기도 한다.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며 환하기도 하고 은밀하기도 한 이 빛들은 마치 교향곡을 듣는 듯 그 전개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아, 그가 말한 ‘침묵과 빛’.
중심부에 놓인 의사당 중앙홀을 들어가면 그가 이룩하려 한 이상세계를 목격하게 된다. 의사당은 서로가 서로를 보고 있어 아마 때때로 발생할 벵갈인들의 갈등까지 그들에게는 공동의 목표를 같이 하는 것임을 확인시킬 것이다.
천정을 덮은 파라볼릭 지붕 사이를 뚫고 내려오는 빛은 그들이 믿는 신의 그들에 대한 축복이며 아름다운 약속 아닌가.

루이스 칸이 벵갈인들의 기억과 욕망, 고통과 환희 그리고 그들의 찌들린 빈곤까지 얼마나 이해했던 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이 건축이 이 지역의 정쟁적 성격에서 비롯된 프로파간다적인 것이라는 비난에도 귀 기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비난이 있든 칸이 만든 이 건축은 그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존경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더구나 평생을 건축의 본질성을 구현하기 위해 예언자적 삶을 산 그가 다카의 평원을 사랑한 후에 세운 이 건축은 우리에게 보여준 그의 이상세계이며 세월이 지난 이제는 다카인들의 이상세계인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자부하고 있었다.
현대 건축에서 불세출의 업적을 남긴 루이스 칸은 느리게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이 건축의 현장을 방문하고 돌아온 날, 펜실베니아의 기차역에서 숨을 거둔다. 그 사체가 루이스 칸이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였었으며 그의 나이 74세였다.
‘우리 시대의 보석’인 이 건축은 그가 숨을 거둔 지 9년이 지난 후인 1983년에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건축은 앞으로 수 없이 많은 세월동안 벵갈의 평원 위에 버티어 서서 벵갈인들에게 벵갈의 빛과 침묵으로서 루이스 칸과 함께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