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항거하는 것은 기념탑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여야 한다’

경향신문 '오피니언'

2014. 6. 19

제주도는 참 아름다운 땅이다. 육지에서 볼 수 없는 검은 색의 토양과 옥빛 바다, 안개방울 맺힌 푸른 숲과 샛노란 유채, 그리고 하도 맑아서 들이키는 것 조차 미안한 공기…… 제주는 정말 아름답다. 옛 지명도 영주(瀛洲)라 했다. 물과 달과 바람 속에 여인이 있어 말조차 잊었다는 글자니 가히 신비경이다. 우리에게 제주가 없었으면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래서 “육지것”들은 육지에서 사는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 비경의 땅으로 간다. 요즘은 중국인들도 떼로 몰려들어 그들의 답답함을 버리고 간다. 육지것들의 답답함을 푸는 곳. 그러니 제주는 그 욕망의 찌꺼기를 받아내야 한다. 골프장, 호텔, 유흥장, 콘도들을 받아들이느라 풍경을 절단하고 고유의 삶터를 짓이겨야 했다. 한라산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수직의 생태계를 사멸시키며 땅을 도려내고 메워 길을 내면서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그럼에도 제주에 남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온통 배설물이다. 이런 수탈의 역사,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제주는 그렇게 빼앗기며 살았다. 삼국시대부터 육지에 조공을 바쳐야 살 수 있었던 이 땅은 조선조 말에 이르러 관의 수탈이 극치에 다다른 곳이며, 권력에서 밀려난 이들이 유배되어 절치부심의 한을 품으며 살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의 군사기지로 거칠게 할퀴었고 도민들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드디어 1948년에 발생한 4.3사건의 비극은 이 땅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새기고 말았다.
특히 모슬포, 바람이 하도 거칠어 못살 포구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관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이들과 살 곳 없는 이들이 모여 화전을 하며 이룬 마을이었다. 이곳은, 1862년 ‘제주도농민항쟁’에 이어 1898년 조선왕조를 반대한 ‘방성칠 항쟁’, 1901년 천주교도들의 폭정에 항거한 ‘신축년 농민항쟁’의 근원지였다. 추사가 부귀영화를 박탈 당하고 유배의 삶을 살며 한을 품게 된 곳도 이곳이니 가히 저항의 뿌리가 깊었다. 이 마을의 한 곳에 ‘백조일손지묘’라는 묘한 이름을 갖는 묘역이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게엄사령부의 지령을 받은 제주 계엄당국은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4.3 사건관련자들을 색출하다가, 1950년 8월 20일 새벽5시 섯알 오름에 민간인 132명을 모아놓고 몰살시켰다. 이 집단학살의 참극은 정부에 의해 은폐되어 시신조차 수습이 안되다가 1957년에야 비로소 유해가 가족들에게 인도 되었는데, 이미 유해들은 서로 뒤섞인 상태여서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유족들은 숨진 모든 이들을 같은 조상으로 모시기로 결의하고 한 자손으로 살기를 맹세한다. 그리하여 학살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사계리라는 곳에 132개의 작은 봉분들을 만들고, 이를 ‘백 할아버지 한 무덤’ 즉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고 이름하였다.
이곳은 서슬 퍼렇던 시절에는 입 밖에도 내지 못하던 이름이었지만, 나는 제주를 갈 때마다 기회만 되면 이곳을 방문하였다. 일행이 있으면 굳이 가자고 강권하여 들러 보곤 했다. 나는 이 슬픈 사건과 일말의 연관이 있는 자도 아니며 이 비극을 잉태한 좌우 이념에 대해 편향적 입장을 강변하는 투사의 삶과도 멀다. 나에게 이곳은, 그저 검은 돌담에 둘러싸여 처연하게 버려져 있는 풍경이 바람결에 움직일 때마다 나의 가슴을 시리디 시리게 만들며 나의 근본을 뒤돌아보게 하는 성스러운 장소였다. 여기에서 나는 ‘장소의 혼(Genius Loci)’을 발견하였으며 제주 풍경의 서사를 읽을 수 있었다. 제주 토양의 검은 색은 그냥 검은 게 아니라 깊어서 생긴 색이었고 옥빛 바다는 꿈결의 빛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제주의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풍광이 아니라 땅에 서린 사연이며 그로써 늘 성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주의 관광은 말 그대로 빛을 보는 일이라고 이야기했으며 제주를 다녀오면 시린 시대를 살며 얻은 상처가 치유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백 할아버지 한 무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관광과 성역화라는 이름 아래 괴기한 기념탑이 솟아 올라 봉건적 풍경으로 바뀌어 나타났다. 잔인한 폭력이었다. 주변을 정화한답시고 조성한 꼴은 더없이 천박하였다. 그리움도 애틋함도 진정함도 간데 없고 좌절만 남아 분노를 치밀게 했다. 나는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이 치사한 봉건적 속성을 저주하며 그 이후로 이곳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1986년 독일 함부르크 남쪽 외곽도시 하르부르그의 작은 광장에 파시즘에 대한 저항을 기념하기 위해 조각가 요헨 게르츠(Jochen Gerz)의 디자인으로 홀로코스트 기념탑이 세워졌다. 사방1m 높이 12m의 단순한 형태로 설계된 이 탑은 놀랍게도 매년 2m씩 땅 속으로 침하하여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시장으로 가는 번잡한 곳에 세운 이 탑 옆에는 작은 게시판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나치시대에 당했던 기억들을 이 탑의 표면에 써줄 것을 하르부르그 시민들에게 당부하는 글이 쓰여 있었다. 지나는 시민들은 파시즘으로부터 받았던 박해와 고통을 낙서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모든 슬픈 기억들이 그 투박한 탑 위에 새겨지면서 탑의 표면은 분노, 슬픔, 고통의 글들로 뒤덮였다. 그리고는 그 고통들이 그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땅 속으로 파묻히는 듯, 탑은 매년 2m씩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 1993년 마침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지는 기념탑. 작가는, 불의에 대항하는 것은 탑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고 했다. 인공의 구조물은 결국은 무너질 수 밖에 없으며, 영원한 것은 우리가 그때 거기에 함께 있었다는 것, 그 기억만이 진실하다는 것이다.

세월호의 참극이 이제 마무리 단계로 나가는 듯하여 나는 불안하다. 마지막 실종자까지 찾고, 몇 사람을 처벌하는 적당한 절차를 거치면 이윽고 기념비를 세울 게다. 그리고 그 탑에다 우리가 안아야 하는 죄의 부채를 모두 던지고 노랑리본을 땔 게다. 그리곤 잊을 게다. 안 된다. 세월호의 비극을 기념하는 인공의 구조물을 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의 가슴에 저마다 세우고 새기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참극이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