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영성적 풍경

생활성서

2022. 10. 01

저는 지난 8월을 비엔나에서 보냈습니다. 일을 핑계 삼아 해외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제가 코로나로 3년 가까이 나가지 못한 걸 보복이라도 하듯 한달이나 떠나 있었지요. 비엔나는 이 생활성서 3월호의 글에 소개한 바와 같이, 마산성당을 지으신 박기홍신부님 권유로 제가 20대 후반을 보낸 곳입니다. 그 글에 담지 못했지만, 저는 그 당시 비엔나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조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1980년 저의 비엔나 유학을 주선하신 박신부님은 숙소까지 마련해 주셨는데, 비엔나 시내에 있는 나사로수도원입니다. 무료 숙식이라 아는 이 한 사람 없는 곳의 가난한 저로서는 감지덕지였지요. 19세기에 만들어진 이 수도원은 은퇴하신 신부님들의 거처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고령으로 어쩌면 소천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분들은 늘 미소를 머금었지만 도무지 말씀이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의 정해진 식사 시간, 검은 옷의 노인들과 함께 긴 테이블에 모여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침묵 속의 식사에 혈기방자했던 저의 20대 후반은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맙니다. 결국 4개월이 지나 결혼을 핑계로 대며 이 침묵의 집을 빠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한국을 떠나오기 직전 약혼한 신부에게, 제 사정을 설명하고 강권하며 비엔나에서 혼례를 치르자고 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박기홍신부님께서 한 분을 소개해 주셨는데, 서기호신부님입니다. 요즘 한국가톨릭교계는 이분을 잊은 듯하여 안타깝지만 꼭 기억해야 할 분으로 압니다. 본명이 크라나비터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교구가 60년대 초에 한국으로 파견한 선교사였습니다. 대구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 가톨릭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사장까지 역임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하시다가 한국을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한국인으로 귀화까지 하십니다. 대구의 한 대학에서도 가르치셨는데 학교에서 정규교수로 임용하는 조건으로 박사학위 받을 것을 권유하자, 비엔나에 한국인 신분으로 70년에 유학을 갑니다. 그 사이에 그라츠 교구의 파견선교사는 프라처신부님으로 바뀌었고 서신부님은 자기가 마련한 기초를 넓히라는 뜻으로 박기홍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박사논문의 주제가 한국 사회에 대한 것이어서 그 당시의 독재정치체제를 언급하는 바람에 이 논문은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인 신분이었으니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가면 유신독재 정부에 의해 체포될 가능성을 전달받고 돌아가지 못해 비엔나에서 상황변화를 기다리며 노심초사하는 시절을 보냅니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컸다고 합니다. 결국 한 한국여성을 만나 결혼하게 되면서 신부직을 버렸고 국적도 회복합니다. 이분이 제 사정을 듣더니 쾌히 결혼식 주례를 맡으시고 비엔나 교외의 천년 된 고성에 딸린 작은 성당을 주선하여 눈이 펄펄 오는 날 제 결혼식을 집전하셨습니다. 게다가 신혼생활에 필요한 각종 가구와 물건들도 마련해 주셨으니, 제가 결코 잊어선 안되는 분입니다.

첫 애까지 비엔나에서 얻었지만 이런 사적 인연으로만 이 도시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20세기를 이끈 사조인 모더니즘이 태동하는 계기를 마련한 비엔나는 건축으로 사회를 혁명할 수 있다는 것도 저에게 확실히 알게 하였고, 바른 건축가는 지식인일 수 밖에 없다는 명제까지 심어주며 제 건축사상을 다지게 한 곳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운명적 도시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 도시를 자주 찾는 이유는 아마도 더 큰 게 있습니다. 뉴욕의 머셔컨설팅이라는 곳에서 매년 세계 2백여 도시를 대상으로 삶의 질에 관한 순위를 발표하는데, 비엔나는 지난 12년간 부동의 1위였습니다. 서울은 대개 70위권에 머뭅니다. 이들의 판단기준이 있습니다. 거주여건이나, 사회문화환경, 의료제도나 교육제도, 자연환경, 정치와 경제환경, 교통과 여가시설 등등인데 그 열 가지 항목에서 비엔나는 늘 선두입니다. 실제로 비엔나는 참 살기 좋은 곳입니다. 이번 여름, 이상고온으로 불타는 8월을 맞았지요. 이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알프스 끝자락의 비엔나 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은 그 더위를 식히는데 충분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러나 별스럽다는 제가 이런 사유로만 이 도시를 좋아할 수 없지요.

제가 비엔나에 머물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도시 전체에 흐르는 영성적 분위기 때문입니다. 유럽을 6백년이나 통치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시지만 그 역사적 무게만큼 큰 영성이 도시를 지배합니다. 예를 들면 도시 전역에 산재해있는 무덤의 풍경. 인구가 2백만명이 채 안되는데도 도시 안에 무려 55곳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그 중 46곳은 시립입니다. 시내에 시립묘지 하나 없는 인구 천만의 서울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등 불멸의 음악가들이 묻혀 있는 중앙묘지는 무려 33만 구의 매장묘가 있을 정도로 거대하지만, 몇 백구의 작은 동네 묘지들도 시 전역에 퍼져 있어 이곳 시민들은 언제나 쉽게 묘역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삶에 절망하여 도나우강을 찾아 목숨을 끊은 이들을 수습하여 조성한 ‘이름없는 이들의 묘역(Friedhof der namenlosen)’도 있습니다. 그 입구에는 ‘먼저 떠나간 이들에게 평화’라는 글귀가 처연하게 서있지만, 저 같이 속절없는 방랑객을 오히려 위로합니다. 그러니 묘역이 없어 마치 죽음을 모르고 사는 서울의 시민(서울만이 아닙니다만)과 달리 비엔나 시민들은 늘 일상 속에 죽음을 목도하고 삽니다. 그런 그들의 삶이 더욱 진지할 것은 너무도 분명하지요.

또 하나는 비엔나의 성당들과 수도원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어 받은 비엔나에는 성당과 수도원이 참 많습니다. 제가 살던 나사로수도원도 시내에 있지만, 직경 2km 남짓한 구시가지 안에도 수도원이 여럿 있는데 특히 카푸친수도원은 합스부르크 제왕들의 묘지를 지하에 두고 지금도 방문객을 받습니다. 성당의 숫자도 천개가 넘는다고 하며, 동네 가운데에 틀림없이 있는 성당은 주일날 미사 때 늘 사람들로 찹니다. 이 성당들이 아침 미사시간에 맞춰 일제히 울리는 종소리, 아 감동입니다. 마치 여기가 축복의 땅이라고 알리는 듯 한없이 맑은 소리를 냅니다. 이런 게 평화의 풍경 아닐까요? 우리에게는 일찍이 사라진 소리입니다. 12세기부터 지은 슈테판대성당이나, 제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건축인 베드로성당같이 건축적으로 중요한 성당도 있지만 그 외의 성당들도 오랜 시간의 적층을 나타내는 진중한 모습들이 대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성당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당처럼 담장 두르고 출입문까지 자물쇠로 닫아, 어쩌면 일생일대의 존재적 위험에 처해 마지막 줄을 붙잡고자 찾아올 수 있는 이들을 배척하여 절망 시키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고단한 삶에서 위로 받고자 찾는 이들은 물론 여행길에 지친 저 같은 이방인에게도 열려있어 어디든 들어가 장의자에 앉아 짧은 휴식도 얻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묵상하게 하는 그 공간 속 시간이 너무도 귀합니다. 그래서 비엔나는, 머셔컨설팅의 삶의 질 평가 이전에 이미 영성의 질에서 으뜸입니다.

제가 지난 한달 머무는 동안,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2년 전에 창단한 소년소녀합창단인 코리아킨더코어가 처음으로 비엔나의 슈테판대성당과 성베드로성당에서 공연을 한 것입니다. 제가 42년전 처음으로 비엔나에 왔을 때, 슈테판대성당에서 빈소년합창단의 합창을 들으며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는데, 우리의 아이들이 바로 그 장소에서 소리를 내어 세상의 평화를 위한 성가를 부르는 걸 보다니…… 지극히 순수한 음성의 다발들이 성당의 구석 곳곳을 두드리고 메우며 울리는 소리, 저나 그곳 사람들이나 우연히 들른 여행객이나 모두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 그로리오 데오, 도나 노비스 파쳄.

42년전 제가 떠났던 수도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노령의 수도사들이 거주했던 그곳은 여전히 침묵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너무도 반갑게 느껴져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제가 이제 철이 든 것일까요? 먼저 떠나간 그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