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이 가득찬 지혜의 도시_파주출판단지 건축설계지침 작성을 마치고

출판도시뉴스

1999. 8. 20

집을 그리고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은 지 수 십년이 되었음에도 새로운 집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마다 흥분하는 제 자신을 항상 보게 됩니다. 그것은 새 집 만들기에 대한 단순한 즐거움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새 집을 통하여 새 삶을 살려고 하는 이들의 마음을 접촉하고 이해해서 제가 가진 조그만 지혜를 보태어 더욱 나은 삶의 방법을 만들어 나가는 장대한 드라마의 참 중요하고도 설레는 시작점임을 알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조그만 집이 그러할 진대 하물며 새 도시 새 마을을 만드는 일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그것은 어쩌면 대단한 축복입니다. 이 출판도시를 만드는 일에 민 현식 교수님과 함께 코디네이터로 참여하게 되었을 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설레임과 즐거움이 저희로 하여금 모든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일을 하게 하는 원천임을 먼저 말씀 드립니다.

저희에게 부과된 주요한 임무는 이미 만들어진 마스터플랜을 바탕으로 수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고 짓는 일을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수 많은 곡절을 거치며 완성된 마스터플랜은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도시의 미래를 제시 하고 있었고 또한 이에 의거하여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었으나, 지식과 문화의 공동체인 출판도시의 정체성을 더욱 굳게 하고 더욱이 이 도시가 놓이는 장소의 아름다운 자연적 배경을 그대로 건축화 하기 위해서는, 이 도시의 본질적 개념과 목표를 보다 뚜렷이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은 마스터플랜이라는 말이 가지는 허구입니다. 오늘날 서구 건축계에서는 이 마스터플랜이라는 단어는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더 이상 유용한 단어가 아닙니다. 마스터플랜이라는 과정을 거쳐 많은 신도시들이 탄생되었지만 그 도시들은 예측하지 못했던 수 많은 문제를 노정하며 애초에 내걸었던 보랏빛 미래의 청사진이 참으로 찾기 어려운 헛된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느 한 마스터에 의해 조장되고 보호 받기에는 우리의 미묘한 삶은 워낙 깊고 넓으며 측량키 어려운 까닭이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땅에 지어진 신도시들의 모습은 어느 곳이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개발이 최대의 지상과제처럼 강요된 파행적 지난 시대에 급조되었던 그 정체불명의 도시와 건축이 그 천박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 도시들의 교과서처럼 인식되고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본의 축적과 용도의 구분 혹은 소유와 기능에 집착하는 그런 도시가 우리가 이제 만들려 하는 출판도시의 목표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에 문화공동체를 그리는 새로운 도시를 위한 새로운 전범을 저희는 찾아야 했었습니다.

이 일의 취지를 듣고 기꺼이 같이 작업에 동참하기로 한 영국의 프로리안 교수는 ‘ 특별한 불확정성( Specific Indeterminacy )’ 라는 단어로 이 새로운 도시의 모색을 위한 단서를 제공하여 주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삶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예측하지 못했던 행위가 가능한 한 수용되도록 그 공간과 건축은 바탕으로만 만들어 져야 하며 도시는 이를 위한 건축적 하부구조를 성실하게 제공한다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도된 비움’ 을 만든다는 이야기 입니다. 건축을 하되 채우는 것 보다는 비우는 것을 먼저 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개념은 비단 프로리안 교수 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지난 일년을 런던에서 주로 거처하면서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서양의 건축가들이 요즘 주로 사용하는 단어가 이러한 불확정성, 모호함 혹은 여백 등이라는 것입니다. 몇 해 전 밀란 쿤데라가 ‘느림’ 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을 때 적잖이 씁쓸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이런 용어들은 원래 우리가 즐겨 사용하던 것이었지요. 우리가 지난 시대 이런 용어를 구악으로 간주하여 그 사용을 금지시키고 서구인들이 가르쳐준 사상과 기술에 매달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내맡기고 있을 때 그네들은 우리의 선조들이 지혜롭게 사용하던 그런 용어들을 체득하고 그네들의 새로운 삶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요즈음 그네들 건축의 가장 중요한 키 워드 중의 하나가 ‘건축적 조경( Architectural Landscape )’ 이라는 단어 입니다. 이것은 건축을 하나의 오브제로 보지 않고 환경적 장치로 간주한다는 말이며 그것의 집합으로 나타난 도시가 인공적 자연이 된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자연환경과 건축이 완전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먼 나라의 어려운 얘기가 아니지요. 바로 우리의 선조들이 만든 건축과 도시가 그러하였습니다.
옛 도시를 만든 선조들의 관념은 부정적 태도에서 비롯합니다. 즉 만들지 말아야 할 것, 침범해서는 안될 것 등등을 먼저 정하고, 비운 다음에 채우기를 시작하는 태도라는 말씀입니다. 혹은 그 비움을 위한 경계를 삼고자 집을 지은 경우도 허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여기에서 우리의 출판도시를 위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비움. 여백 만들기. 새로운 삶을 그리는 출판도시의 개념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시범단지에 속한 각 개별 건축들을 위한 설계지침을 지난 봄부터 만들기 시작한 후 이제 완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희가 만든 지침은 개개 건물보다는 주로 이 ‘비움’ 에 대한 규칙입니다.
심학산과 한강은 이 땅만이 가지는 지리적 특징이지요. 자유로로 인해 격리될 수 밖에 없는 심학산과 한강을 시각적으로 연결하기 위하여 집들의 사이들을 비우게 했습니다. 비움으로만 보면 공간적으로도 연결되는 셈입니다. 이 규칙은 이 도시의 가장 큰 건축적 특징을 제공하여 각 건물내부의 공간구성에까지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든 집들에서 한강의 줄기를 보거나 산을 보거나 혹은 샛강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집들 사이의 개별공간마저 때때로 공동의 생활을 위해 비워져 있습니다. 특히 녹색의 복도라 이름지은 공통생활권은 한강과 심학산을 강력히 연결시키는 축이 되지만 역시 비워져 있습니다.
갈대가 무성한 샛강의 보존은 참 중요한 이 도시의 과제입니다. 아마도 이 도시의 상징적 풍경으로 우리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던져 줄 대 자연이지요. 이를 위해 샛강에 면한 땅들의 건축영역을 줄이고 비웠습니다.
건물의 외부 공간만을 비우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 간의 긴밀한 통로나 비밀스런 골목길을 만들기 위해 건물의 내부 마저 때로는 비우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비움이 간혹 개인이 소유한 땅을 다소 침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쾌히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한 비움을 가진 건축이 결국은 그 속에서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대부분의 땅은 쇄석이나 들풀 등과 같은 자연재료로 덮이고 갈대가 샛강 주위를 채워 가능한 한 습지의 생태가 살 수 있도록 만든 까닭으로 대체적으로 야생적 환경이 이 도시의 분위기를 지배합니다. 물론 나무 역시 가로수로서 보다는 군락으로 있습니다.
어떤 건물은 때로는 거대한 암반처럼 갈대 속에 놓여 있게 되며 어떤 건물은 샛강을 따라 춤추듯 배열되고 더러는 하나의 언덕처럼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 오후 늦게, 서가처럼 배열된 건물들 사이로 밀려오는 석양의 아름다운 붉은 빛들이 샛강의 수면에 부딪혀 이 도시를 적실 때 이 도시가 가질 지극한 아름다움을 상상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많은 건축가들이 초대되어 이 규칙을 가지고 개별의 건축을 그리고 만들 일이 시작될 새로운 시작점에 와 있습니다. 모쪼록 이 규칙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건축가들이 초대되길 바랍니다. 혹 저희가 만든 규칙의 우매한 부분은 더욱 지혜로운 건축가들이 보완하고 다듬게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여기에 거주하게 되는 모든 출판인들이 이 도시의 정신을 이해하시길 원합니다. 전에 저희가 유럽여행을 수행했었을 때 슈트트가르트에 있었던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설명 드리면서 그 주거단지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담당했던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명구를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전시회의 오프닝에서 미스는 ‘ 우리는 새 집을 설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설계하였다’고 말했었지요. 똑 같은 말씀을 빌려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저희가 출판조합의 신임을 받고 정한 출판도시의 규칙도 새로운 삶에 대한 규정입니다.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새로운 삶이 기초하는 바가 공동성( Communality )이라는 것입니다. 공동성 – 우리의 도시, 우리의 마을이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이 출판도시가 비움이 가득 찬 지혜의 도시가 되는 정신임을 굳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