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새로운 도시

이상건축

2001. 1. 17

‘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은 우리를 다시 만든다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 윈스턴 처칠 / Time지,1960년 6월)’

지난 98년 내가 북런던대학으로부터 객원교수로 초빙 받아 일년 체류를 예정으로 런던으로 떠나기 앞서 출판조합에서 그들의 뉴스레터에 싣기 위한 원고를 청탁 받은 적이 있었다. 파주에 그들이 오랫동안 꿈꾸어 온 출판의 도시를 건설하는데 있어 건축적 조언을 구하는 청탁이었다. 그때는 이미 완성된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기반시설 건설을 위한 토목공사를 막 시작한 직후이다. 나는 그들이 꿈꾸는 이 도시가 우리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 지 직감했지만, 서울을 떠나 멀리서 이 일을 관조할 수 밖에 없는 나로서는, 글로써나마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그려서 전달해야 했다. 적지 않은 강박관념 속에서 썼던 그 글을 다시 들추어 옮긴다.

‘지혜의 도시’로 태어 나십시오
옛날 우리 선조들이 그린 서울의 옛 지도를 보면 서울이 얼마나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인 지 금방 알게 됩니다.
수려한 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그 안으로 맑은 물들이 흘러 내리며 양지 바른 곳곳에 삶터를 틀고 앉은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풍경화입니다. 건축과 자연이 따로 있지 않으며, 서로를 구분 짓는 경계를 발견하기 힘들고, 산세를 닮은 집들이 서로에 열려져 있는 모습으로 서울의 옛 지도는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현대의 지도 제작자들이 만든 서울의 지도를 보십시오. 여기에는 상업지역, 공업지역, 주거지역 등 용도와 기능으로 구획되고 자본과 물질의 분포가 그려져 있고 그 이익을 따라 잇는 도로들이 미로처럼 나타나 있습니다. 이 현대의 지도는 우리에게 접촉하지 말 것과 침범하지 말 것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구분하게 합니다. 옛 지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양의 정보와 자료가 담겨 있지만 이는 오로지 탈취의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이며, 어쩐지 여기서 나타난 우리의 삶은 불순한 음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지도에서는 도저히 우리의 삶이 편치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저는 어느 세미나에서 도시계획 하는 분이 국토계획에 관해 설명하는 것을 지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박식과 경륜에서 비롯한 훌륭한 이론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강연 내내 저는 짙은 의혹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말들을 키워드들은 토지이용계획 이라든가, 교통계획, 인구밀도계획, 하수처리계획 등 제가 수십 년 전에 듣던 것들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이러한 단어들이 만든 도시가 우리가 지금 질타해 마지 않는 우리의 도시들인 것입니다. 여전히 그 분은 우리의 귀중한 삶이 의탁 되는 도시를 물질과 계량으로만 분석하고 결론 짓고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도 그 분들의 낡은 교과서는 아직도 금과옥조인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고리타분하고 실패한 단어들이 아니라, 예를 들어 ‘도시의 아름다움에 대한 계획’, ‘공동체를 공고히 하기 위한 계획’ 혹은 ‘맑은 하늘 보기 계획’ 등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밀착된 단어와 말들로 된 각종 계획들이 먼저 되도록, 그 분들의 도시계획 교과서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른 바 우리의 도시를 만들기 위한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자는 말씀입니다.

출판문화의 메카가 된다는 출판문화단지가 숱한 곡절을 딛고 각고의 노력 끝에 그 시행을 앞 두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단지가 ‘지혜의 도시’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실패한 우리들 도시의 비틀어진 욕망을 결단코 닮지 않기를 빕니다.
‘지혜의 도시’는 어떤 곳일까요.
이곳은 소유하기 보다는 사용하기를 즐기는 이들이 사는 도시이며 그것도 혼자 쓰기 보다는 같이 쓰기를 원하는 이들이 공동의 삶을 구하는 곳입니다. 더함 보다는 나눔이, 나뉨보다는 이움이 더욱 가치 있음을 믿는 그런 곳이지요.
이곳의 건축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도시가 건축 속으로 들어가고 건축이 도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길들은 서로 연결되어 막힘이 없고 건물은 이웃 한 건물과 수평으로도 수직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우리들이 지난 날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베어 있습니다. 다시는 옛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지음으로 옛 자취를 없애는 우매함을 범치 아니하며, 되도록 고쳐 짓고 이어 지어, 지난 우리들의 기억을 미래 속에 연장시켜 읽히게 하는 그런 지혜의 건축이 즐비한 곳입니다.
이 ‘지혜의 도시’는 기능적이지 않습니다. 기능이라는 단편적 도그마에 우리의 삶을 맡기기엔 우리의 삶은 훨씬 미묘하며 측량키 어렵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현대건축의 키워드인 능률과 편리는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순서에 따라 만 살게 하며, 항상 빠르고 높은 곳으로만 인도해 왔습니다. 그런 건축은 결국 우리를 소모 시킬 뿐이지요. 오히려 적당히 불편하여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유케 하는 그런 곳, 즉 반기능적 도시가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하며 의미롭게 할 것입니다.
이 도시의 공간들은 목적을 딱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목적이 있는 공간은 그 정해진 목적이 완성된 후에는 없어져 버리게 되지요. 따라서 긴 생명을 가질 수 없으며, 생명이 없는 공간은 그 공간 속의 삶들을 결국은 피폐하게 합니다. 되도록 이면 적게 채우고 많이 남겨져 있는 도시, 아니 채워지기 전에 비운 공간을 먼저 만든 후에야 채우는 도시, 그런 도시가 생명이 길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네 옛 집의 마당은 비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당에서, 축제도 하며 제의도 하고 생산도 하며 노동도 하고 훈육도 하며 접대도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비워져 있는 이 마당을 보며 우리는 사유하고 우리의 정신으로 그 마당을 채웁니다. 이 비움의 공간은 우리들 공동체의 구체적 형태이며 우리가 귀소해야 할 목적지일 지도 모르지요. 따라서 이런 비움의 장소가 많은 도시에서의 삶은 항상 근거가 있어 부유하지 않게 됩니다.
이 ‘지혜의 도시’에 서 있는 건축은 서로 작으려 합니다. 결단코 뽐내지 않으며 이웃 한 건축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소박하며 정제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건축 속에서의 삶이 그 그릇인 건축 보다 중요함을 아는 까닭으로 이 건축들은 배경으로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더욱 돋보이도록 건축 속에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뿐 아닙니다. 이런 건축의 흰 벽은 태양의 궤적을 느끼게 하며 빗소리 바람소리를 들리게 하고 지나는 구름을 보게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경이에 차 있는가를 깨닫게 하며, 우리 인간의 선하고 진실되며 아름다움을 다시 믿게 합니다.

지식을 만드는 이들이 만드는 도시.
이름하여 ‘지혜의 도시’. 정말 근사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태어나십시오.
성서의 잠언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집들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며,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고,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출판문화단지가 이런 도시와 건축이 되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게 되기를 손 모아 빕니다./1998

이 글을 쓰고 나는 런던으로 떠났다. 그 이후, 아마도 무수한 논란 끝에, 조합에서는 나를 코디네이터로 지명하였고 런던에 체류하는 나는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어 고사하였으나, 조합은 나에게 민현식 선생과 더불어 더블 코디네이터의 역할을 굳이 맡기게 된다.
딱히 이 파주출판도시 때문 만이 아니라, 런던에서 체류하는 동안 나는 도시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나 랜드스케이프라는 단어가 런던의 건축가들이 요즘 가장 빈번히 쓰는 단어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나의 보잘 것 없는 건축 사고를 좀 더 확장할 수 있으리라 믿은 까닭이었다. 이내 나는, 우리가 신도시들을 만들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마스터플랜이라는 단어가 런던의 건축가들에게는 오래 전에 폐기한 용어임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들이 고민하고 끌어 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가 오래 전에 낡은 가치라고 잊어버려야 했던 것들이라는 것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나는 런던에서 돌아 와서 ‘웰콤시티’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 건축에 관한 주제를 ‘Urban Void’라고 밝히고 도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축약해서 기술한 바 있다.(이상건축 2000년6월 호) 그 글 중 도시와 관련된 일부 내용 만 발췌하여 전재한다.

….고대 이집트는 ……각기의 이익관계가 다른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가장 단순한 지휘계통이 필수 불가결하였으며 강력한 위계를 구성하는 중심축이 긴요하였을 것이다. …모든 공간은 이 중심축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중심 부분의 확보 여부가 주공간과 부공간이 되고 ….그런 곳이 중요한 사람과 덜 중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된다. 이 위계적 공간은 그리스와 로마에 까지 전해지고 그 이후 기독교문명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의 건축과 도시를 이루는 중심사상으로 발전 …오늘날까지 이들이 만든 도시계획의 이론들은 죄다, 도심 부도심 등의 세력권에 관한 구분이고 상업지역 주거지역 등의 가치가 다른 용도 등에 관한 언어였으며 모든 땅들은 반드시 이러한 용도로 메워져야 하는 함수로 간주되었고 길들은 이들 자본재를 흐르게 하는 동선일 뿐이다. 이의 기술적 응용으로 만들어진 계획이 소위 마스터플랜이라는 것이다. 이 마스터플랜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에서 부분만으로는 그 존재가치가 없다. 전체 도시의 이미지가 더욱 중요한 문제이며 부분과 전체는 항상 강하게 묶여 있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에 비해 모로코의 도시, 예를 들어 페즈Fez 같은 도시는 이러한 도시와 전혀 다르다. 기본적으로 페즈라는 도시는 미로 같은 도로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향을 잘 알 수 있게 만드는 중심축이라든가 스스로의 위상을 찾게 만드는 위계적 공간이라든가 하는 것을 결코 발견할 수가 없다. 이 도시를 만든 이들은 이슬람 교도들이다. 이들의 종교는 일신교이며 알라 신과 이들 사이에 이들을 다스리거나 분류하는 아무 계층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과 교도는 일대 일의 관계이며 그들 시민끼리는 서로 평등하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각자의 중심을 갖고 있다. 이 도시는 이러한 개별의 중심들이 집합한 결과일 뿐이며 이들을 집합시키는 어떠한 각본 즉 계획이론이 있을 수 없다. 개체들의 크기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두가 동등하다. 전체 도시가 어떻게 되든 그 부분들인 개체의 존재 가치를 훼손하거나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도시를 파악하기 위해 전체를 답사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그냥 한 부분만 보면 된다. 그게 전체 도시이다.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 나에게 ‘유리씨즈’는 어느 페이지에서 읽기를 시작하든지 좋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는 이처럼 어느 곳에서 시작점을 가지든 그곳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 도시를 다 느끼게 하는 곳이다.”
리챠드 세네트 Richard Sennet
” …다원적 민주주의Decentralized Democracy는 중앙집중화 된 권력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서로의 차별성이 발전의 주체라고 여긴다. …다원적 민주주의는 또한 특별한 물리적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이 민주주의적 비전은 거대하고 집중적인 건물들이 표현하는 상징보다는, 뒤범벅된 공동체 속에 여러 가지 언어가 적층된 건축을 선호한다. …궁극적으로 다원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형상은, 전체로서의 도시를 표현하는 이미지를 철저히 부스러뜨리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에드워드 브루 Eduard Bru
” 도시는 부분에서도 그 도시의 본질적 크기를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특징들이 제공되어야 한다….누구도 ‘도시 만들기’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오늘날 알 수 없다. 도시는 변한다…다만 ‘도시의 한 부분’ 만이 있을 뿐이다…… ”
그를 중심으로 하는 바르셀로나의 건축가들이 주장하는 현대건축의 새로운 키워드들은 다음과 같다.
Void / Multi-Readability / Vacant Space, Gaps, Niches / 신체와 공간의 관계 / Landscape.
이 단어들은 우리가 오래 전에 잊어버려야 했던 것들이다. 새마울 노래가 매일 아침 확성기를 타고 골목에 흐르던 때에 비움이나 공백 흐릿한 것 등은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 추방해야 할 구악의 유물이었다. 우리는 채우고 메우는 일에 세뇌되어 선동적으로 내몰렸었으며 오로지 분명하고 뚜렷한 목표 만이 우리가 취해야 할 덕목이었었다. 그러나 우리가 버렸던 구 시대적 습관들이 이제 저들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금과옥조로 취급 받으며 있는데, 우리는 그네들이 폐기한 마스터플랜의 비법을 우리의 도시를 만드는 전가의 보도처럼 아직도 굳건히 붙들고 있는 것이다……../2000

런던에서 체류하면서 플로리안 베이겔 교수와 이 도시의 건축 지침을 만드는 작업을 상의하게 된다. 그는 이미 이런 큰 규모의 프로젝트에 괄목할 만한 제안들을 만든 바 있었으며 특히 요즘 유럽의 건축계에 새로운 키워드인 architectural landscape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통한 건축가였다.
그는 이 도시를 위한 개념작업에서 ‘불확정적 공간 Indeterminate Space’라는 말을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건축은 거주자를 위한 인프라이며, 주로 비워진 이 하부구조에 의지하여 거주자가 삶의 풍경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는 중요한 이야기이다. 이는 어떻게 생각하면 건축에서 프로그램이나 건축의 합목적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프로그램은 거주자의 의지나 상황의 변화에 의해서 쉽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건축이 놓이는 장소이며 건축의 형식은 장소성이 결정한다는 것, 따라서 이 장소에 속하게 된 건축은 주변과 더불어 또 다시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도시의 건축지침 작성을 위해 플로리안 베이겔 교수와, 민현식, 김종규, 김영준 등과 같이 팀을 이룬 우리들은 이 개념을 공유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파주의 랜드스케이프 쓰기 Paju Landscape Script’라는 제목의 건축지침서를 6개월 여 만에 작성하게 되었다. 이는 기존의 마스터플랜에서 규정한 도시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고 이미 세분화된 건축내용을 전반적으로 다시 수정하는 작업이었다.
우리는 이 땅에 들어설 건축을 이 장소성과 관련하여 몇 가지 유형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 그림자highway shadow’라는 유형은 자유로에 면하여 자유로 레벨 보다 낮은 부지에 서게 되는 인쇄소 같은 공장들을 위한 유형으로 자유로의 그림자를 수평적으로 덮고 그 지붕은 녹지로 마감하게 된다. 또한 ‘서가book shelf units’ 유형은 단지 내부의 거주인들이 한강과 심학산을 보는 것을 막지 않게끔 동서방향으로 매스를 잘게 자른 것이며, ‘ 암반stone in reed’ 유형은 갈대밭 위에 놓인 거대한 암석처럼 보이게 하여 야생의 상태를 인식하게 한다. ‘ 캐널 로프트canal loft’ 는 수로에 면해 춤추는 듯한 배열로 수변의 낭만적 풍경을 만들며, 14,000평의 유통시설은 그 거대한 스케일이 건물의 형태가 아니라 조경의 형식이 되어 전체의 균형을 부스러뜨리지 않도록 하여 ‘도시의 언덕urban hill’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4면이 도로로 둘러싸인 부분은 가장 도시적인 블록으로 urban island라는 이름으로 밀집된 매스와 그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만들어 비록 남의 땅이지만 서로 관통하며 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외에도 가장 높은 밀도를 갖는 ‘중추부 유형spine’ 등이 있다.
우리가 여기서 의도한 바는 이 도시의 모든 건축물이 오브제나 상징적 가치 보다는 같이 어우러진 풍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건축을 포함한 모든 시설물은 우리들 인간의 정주를 위한 하부구조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게 된다.
그 사이 우리들은 이 도시가 서게 되는 장소- 파주의 습지의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원래 이 땅은 자유로가 생겨나면서 한강 하류변의 갯벌이 육지가 되어 버린 곳이다. 따라서 자유로 보다 낮은 면에 위치한 습지이며, 갈대가 무성한 수로가 수 많은 습지 생물을 생육하며 2km여를 유유히 흐르는 곳이었다. 철새가 날아 들고 저녁에는 아름다운 석양이 갈대를 붉게 물들이는 황홀한 풍경을 갖는 곳이다. 이 장소는 일산이나 분당, 산본 등의 신도시가 입지한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며 그들을 세웠던 방식의 적용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아름다운 장소를 건축화 시키겠다고 마음 먹고 있을 때 이미 이 곳은 분당이나 일산의 신도시를 만든 표준적 토목도면과 같은 도면으로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으며 갈대는 파헤쳐지고 전근대적이고 반환경적인 고수부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조합에 이 실상을 알리고 조합과 더불어 이러한 잘못된 관행에 대해 거세게 반대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족탈불급이고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이의 원인은 우리의 신도시들의 생성원인이 정치와 자본의 논리에 기인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후의 프로세스는 뻔하다. 판에 박은 듯 낡은 교과서에 의존한 마스터플랜과 표준도면에 의한 토목공사 그리고 그 위에 천박한 화장술로 덧칠 하듯 하는 조경 그 다음에 시공회사가 주도한 건축설계 그리고 천한 인테리어 업체의 황칠, 이런 정통적? 수법에 의한 신도시가 이 땅의 방방 곳곳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문화가 정체성을 가지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이래서 우리의 공동체는 집단 이기주의적으로 변하고 우리 삶의 존엄성 마저 흔들리게 되는 것 아닌가. 이 방식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귀중한 삶은 여전히 그들의 탐욕에 볼모로 잡혀 있을 뿐이다.

건축지침을 작성 후에 건축설계를 담당하게 될 건축가들을 초청하고 그들의 건축세계를 이 도시에 입주하게 되는 건축주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그 전시회를 ‘공동성’이라는 주제 아래 묶었으며 이 전시회의 개막에 맞추어 쓴 서문을 다시 옮겨 적는다.

공동성의 가치에 대한 질문 – 파주출판도시 1차 건축가 그룹 전시회를 열며
지난 20세기는 세기말적 위기를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믿음으로 극복하며 시작한 시대였다. 이 모더니즘은 그 이전 세기에 이루었던 시민혁명이 가져다 준 정신적 토대와 산업혁명이 제공한 기술적 바탕 위에 서서 우리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안겨 주면서 무한한 번영을 꿈꾸게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역사상 어떤 다른 세기보다도 더욱 참혹한 재앙을 기록하며 마감하고 말았다. 양차 세계대전의 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이념으로 인한 분쟁, 종교끼리의 반목, 민족간의 대립, 계층간의 불화는 우리의 앞날을 지극히 회의하게 한 것들이다. 심지어 절제하지 못한 인간의 탐욕이 자연을 착취한 결과 드디어 자연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추방되는 위기를 맞이하여 있는 게 우리의 지금이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전 지구적 경쟁체재에서 이 세계는 바야흐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장소로 변하고 있다. 세계화의 바람은 국가도 개인을 보호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를 살게 하고 있다. 이러한 삶 터에 살아 남기 위해 도구가 목적이 된 물신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사회와 사회의 구성원에 대한 불신과 배타적 습관을 누적케 하여 우리를 더욱 파편화 시키고 단말마적 삶을 살게 한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인식은 집단적 이기주의를 급속도로 잉태하여 우리 사회를 닫게 만들고 그들 사이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고 있다.
우리를 더욱 주목하게 하는 것은 정보화라는 새로운 단어이다. 더욱 빠르고 유용한 정보의 획득이 새로운 삶의 가치라는 과신은 우리를 폐쇄된 공간에 몰아넣어 우리를 현실로부터 이탈시키고 우리를 분열시켜 결국 파편화 할 위험이 혹 있지 않은가. 이미 그 현상은 우리 가까이에서 감지되고 있다. 그것은 함정이다.
파주의 습지 위에서 만들어 지는 도시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새로운 세기의 시작에 태어나는 새로운 공동체이다. 자유로 건설로 메워진 갯벌 위에 다른 곳의 흙을 날라 부어 그 위에 세우는 이 도시의 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적층 된 삶의 흔적은 거의 없다. 따라서 전혀 새로운 도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도시가 낯선 장소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던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도시가 되길 희망한다. 더불어 앞으로도 무한히 지속되어질 가능성이 있는 곳이 되길 바란다. 따라서 이 새로운 도시가 토대로 삼는 가장 큰 장치는 우리의 선한 기억이다. 이 선한 기억이야 말로 우리의 존재를 굳게 할 근거가 된다. 우리를 존재케 하는 근본적인 명제들, 이를 공동성( Communality )이라 하자.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들이 모여 삶을 이루면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확인하는 열린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도시와 건축, 바로 이 공동성이야 말로 우리가 세우는 새로운 도시에서 추구해야 할 첫번째 과제가 되며 이제 우리들 스스로 이 문제에 대답을 하여야 할 때이다./2000

나는 이 도시가 출판인들이 만드는 도시라 하여 출판인들만을 위한 도시가 되는 것을 반대한다. 그런 도시는 폐쇄된 도시이며 갇혀진 공동체gated community가 될 수 밖에 없다. 비록 출판인들이 모여서 사는 특정한 도시지만 그래서 특정한 프로그램을 가지고도 있지만, 그렇다고 집단적 이기주의의 유혹에 곧잘 넘어 가게 마련일 특정한 도시가 되는 것은 이 도시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이 도시는 특정된 사람이 살지만 불특정한 도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공동성은 이 공동체의 이익 만을 위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오히려 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보다 많은 이들을 위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필지를 가로질러 연결하는 ‘녹도green corridor’나 남의 건물 속을 헤집고 다니는 골목길들은 이 공동성을 진작시키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목표로 하는 공동성을 완성하였다고 볼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특별한 도시와 건축이 가져야 하는 보편성이다. ‘특별한 보편성’. 이것이 이 도시가 우리의 이 시대에 가져야 하는 공통된 가치가 되길 희망한다. 이곳의 거주인이건 방문자이건 혹은 외부인이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가치, 우리의 맑은 심성을 가만히 두드리는 그런 보편적 가치로 만든 도시. 그것이 여기서 추구되어야 하는 공동성이며 바로 그런 도시가 우리가 세워야 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도시라고 믿는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