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살으리렸다.

2004. 8. 15

비교적 여행을 많이 한 건축가라서 내가 흔히 받는 질문이 가장 좋은 도시가 어딘가에 대한 것인데 그 때 마다 나의 대답은 서울이다. 다소 애국적 심정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도 대도시 중에 서울만큼 좋은 곳이 세계에 없다.. 뿐만 아니다. 서울에 처음 오는 외국 건축가들도 서울에 대한 인상이 환상적이라고 말한다. 그들이나 나나 서울을 소개하는 관광책자에 실린 포장된 풍경-고궁이나 현대건축물 혹은 불꽃놀이 하는 한강 등-은 가짜인 것을 안다. 무엇이 그들과 나를 서울광으로 만드는가.
그들은 우선 천만 명이 사는 도시가 이토록 작게 보이는데 놀란다. 그것은 산이 많기 때문이다. 파리나 런던, 뉴욕 혹은 베이징 도쿄 등 거의 모든 대도시들은 평지 위에 세워진 것이라 도시 영역의 감성이 없다. 그러나 서울에는 산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옹기종기한 삶 터를 이룬 까닭에 천만 명이 살아도 고만 고만하여 금새 친근해진다. 녹지를 가까이하기 위해 일부러 센트랄파크 같은 것을 만들 필요도 없다.
북촌이라는 곳을 가면 길을 걷는 맛이 보통이 아니다. 양 팔을 벌리면 양 쪽 집이 닿을 정도로 작은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있어 마치 내 신체와도 같다. 주로 비탈길이라 온통 구부러지고 휘어진 길들을 거닐다 보면 어느덧 시간을 잊는다. 이 보다 더한 묘미를 느끼고 싶으면 아직도 남아 있는 달동네를 슬쩍 가보라. 그 공간적 스릴은 가히 전율인데, 온갖 보물 같은 건축의 지혜가 가득한 이 곳은 이미 내 건축의 교과서가 된 지 오래다.
남대문시장을 들어가 보라. 아니 동대문 쇼핑몰도 괜찮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물자들이 좁은 공간에서 만나고 스치고 하루를 마감하는 이런 다이내믹한 현장에 서면 이념이고 정체성이고가 없다. 오로지 리얼리즘이 만개해 있는 이곳에서는 누구나 리얼리스트가 된다. 그 골목길에 면한 식당에 들어가서 산낙지를 시켜놓고 찾아온 외국인에게 한 점을 건네면 그것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이다.
사실 거리의 간판과 분별없는 건물에 대해 질타를 하지만, 뒤돌아서 생각하면 그게 우리네 악다구니 하는 삶의 현장이며 우리의 진솔한 초상인 바에 오히려 서양적 프레임 속에 갇힌 나의 기준과 안목이 헛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부둥켜 안는 게 솔직하지 않는가. 어떻게 보면 그토록 재미있는 현대적 부호가 어디 있나.
간혹 나는, 흐린 날 아침 내가 사는 대학로를 나와 창경궁에 들어가서 이어지는 종묘까지 산책을 한다. 세상에 이처럼 나를 맑게 해 주는 장소가 여기 서울의 한 복판에 있다니. 한 시간 남짓 그 적막한 공간에 몸과 마음을 한껏 맡기다 보면 나는 어느새 철학자가 되어 내 삶의 찌든 부분을 씻고 있는 자신을 본다.
비 갠 후 저녁 무렵 한강의 어느 어귀라도 가서 지는 해가 빚어 내는 노을을 보라.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갖는 도시를 본 적이 없다. 온갖 발버둥치던 서울의 삶에 대한 신의 은총인 듯, 황홀하기 짝이 없는 하늘은 우리의 삶을 환상적으로 적신다. 아 서울..

그렇다.……서울에 살으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