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풍경’-스톡홀름의 우드랜드 공동묘지

중앙일보 사회

2004. 5. 28

3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건축과 함께 살았으니 세상의 웬만한 건축은 어지간히 다 알고 있음직도 하겠지만 뜻밖의 건축을 만나 내 건축을 다시 쓰게 하는 일이 있다. 여전히 부족하고 편협한 나의 견문과 학식이 부끄럽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또 다른 시작점에 설 수 있는 게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바로 스웨덴의 건축가 시구르트 레베렌츠(1885-1975)를 만난 일이 그러했다.
스칸디나비아 3국 중의 하나인 스웨덴은 한때 발트해역을 지배한 강대국이었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복지정책이 발달한 나라지만 현대 유럽에서는 지리적 문화적 변방이다. 더구나 우리는 서양문명의 주류에 의해 과도하게 경도된 교육을 받았던 까닭에 그 변방의 문물을 잘 알 리가 없는 터에 레베렌츠라는 지방의 건축가는 나에게 너무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다 지난 1999년 런던에서 1년을 살면서, 이 건축가의 회고전에 즈음하여 출판된 ‘고전주의의 딜레마’ 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한 동안을 이 건축가에 빨려 들고 만 것이다.
그 책의 서문은 ‘침묵의 건축가’ 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침묵의 건축가? 그는 90세의 일기를 기록하면서 한 줄의 글조차 남기지 아니하였으며 단 한번도 교육현장에 선 일이 없다. 오로지 북구의 건축 현장을 지킨 옹고집의 건축가였다. 그래서 침묵의 건축가인가?

스웨덴의 건축가 중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사람은 ‘스톡홀름 중앙도서관’을 설계한 군라드 아스플룬트이다. 20세기 건축가를 지칭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아스플룬트는 정치적이고 사교적 성격을 가졌으나 학교 동기생 친구였던 레베렌츠는 비타협적이고 내성적 성격으로 오로지 건축 밖에 몰랐다고 한다.
그들이 활동을 시작한 20세기 초는 이미 모더니즘이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하여 바야흐로 새로운 예술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돋아나고 그로 인해 다소의 긴장이 조성되던 때였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던 때, 정치적 성향이 짙은 젊은 아스플룬트는 스웨덴에서 그 시대가 만든 대표적 건축가가 된다. 레베렌츠를 끌어들여 한 팀을 이룬 그는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고, ‘우드랜드 공동묘지’ 는 1917년 30대 초반의 이들이 공동으로 현상설계에 응모하여 당선된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일본 잡지에 소개된 아스플룬트가 설계한 장제장(葬祭場) 때문이다. 추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단순한 입면과 그 앞의 투박한 십자가가 부드러운 녹색의 구릉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는 광경은 절제한 건축이 갖는 폭발적 힘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도 아스플룬트 찬미자였었다.
그러나 ‘고전주의의 딜레마’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 장제장이 그토록 감동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그 건축 자체보다는 그 공동묘지의 조경 때문이었으며-사실 장제장의 내부공간은 진부하다- 그 조경을 만든 이가 바로 레베렌츠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그 아름다운 구릉이며 나무들이 자연 상태의 것이 아니라 바로 레베렌츠가 만든 인공적인 것이었는데 그에 관한 수 많은 스케치들이 그 책 속에 실려 있었다.
공동묘지의 건설이 한창이던1934년 레베렌츠는 우드랜드 공동묘지의 중앙위원회에 의해 해임된다. 위원회의 부당한 요구에 사사건건 충돌해 온 결과였다.

나는 그의 건축을 직접 보고자 기회를 노리던 중 런던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 오기 직전 순전히 그의 건축 만을 보기 위하여 스웨덴으로 올라갔다.
스톡홀름에서 하루를 묵은 후 아침 일찍 탄 택시 속에서 운전수가 그레타 가르보가 최근 이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말을 했다. 그가 죽기 몇 해전 직접 이곳을 와보고 이 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스스로 이곳에 묻히기로 정했다고 한다. 그럴 정도로 입구에서 본 묘역의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멀리 눈에 익은 아스플룬드의 장제장과 십자가가 보이고 부드러운 곡선의 구릉들이 뭉게구름들을 가볍게 푸른 하늘로 띄우고 있는데, 이게 공동묘지인가. 우리네 기괴한 공동묘지의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다.
나를 안내해주기로 한 관리인은 여기서 40년을 근무했다고 하는 노인이었다. 그와 입구에서 만나서 방문루트에 대해 협의하던 중 나는 아스플룬트의 장제장보다는 레베렌츠가 만든 루트를 따라가자고 하자 그는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장제장을 먼저 찾는 것이 순서였으며 특히 일본인이 위주인 동양인 방문객은 전부가 그렇다는 것인데, 어떻게 레베렌츠를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동행하는 동안 신난 표정으로 고집쟁이 레베렌츠가 정치적인 아스풀룬트보다 얼마나 더 위대한지 입이 마르고 닳도록 설명하였고 나는 책에 적혔던 내용을 상기하며 맞장구 쳤다.

레베렌츠의 이 공동묘지는 단순한 묘역이나 조경이 아니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끊임없이 대화하고 교류하는 도시였으며 스스로의 삶에 대해 자문하는 사유의 공간이자 인간에 대한 신의 축복을 주제로 하는 대건축이었다.
‘회상의 숲’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공의 언덕과 12그루의 느릅나무는 그가 만든 경건한 신전이며 여기서 ‘부활의 교회’까지 1km에 이르는 길은 긴장과 이완을 교차시키며 산 자와 죽은 자를 경건한 의식 속에 만나게 하는 여로이다. 걷는다는 것은 여기서 한편의 아름다운 서사시였다. 땅의 변화나 나무와 풀들은 그의 유용한 도구였으며 때로는 울창한 나무 사이에 떨어지는 햇살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가르친다. 비석들은 마치 폐허의 주춧돌 마냥 그냥 널브러져 있기도 하여 그로 인해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처절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뒤로 돌아 앉게 하여 그들이 이제는 돌아 올 수 없는 이들임을 알게 한다. 더러는 한 곳에 모여 앉아 죽은 자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길의 끝은 ‘부활의 교회’ 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교회의 검은 색 문이다. 짙은 침묵이 무겁게 내려 앉아 있는 교회의 내부에는 또 하나의 집 모양을 한 제단이 있어 내가 서 있는 곳이 내부인지 외부인지 그 분간을 어렵게 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있는 듯 죽은 자와 산 자는 여기서 별리의 정을 나누는데, 남쪽의 정교한 철제 문을 디밀고 나온 순간 낮게 깔린 또 다른 묘역에서는 죽은 자들의 묘석과 풀밭이 정갈한 햇살을 받으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며 기다리고 있었다. 부활이었다.

‘성서적 풍경’. 그렇다. 그 책의 한 구절에서 레베렌츠가 만든 건축은 ‘성서적 풍경’이라고 적혀 있었다. 풍경에 대한 이 성스러운 교본이 전하는 메시지는 채움을 목적하는 전통적 서양의 건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비움이 새로운 가치라고 했다.
그는 이 우드랜드 공동묘지를 설계하면서 애초에 비우고 절제하며 침묵을 통해 그의 본질 만을 남겨 놓으려 한 것이다. 그가 만든 비움은 현대의 작가들에게 곧잘 발견되는 절망적 비움이 아니라 희망적 비움이었으며 시어에 가득 찬 미학이었다. 죽은 자와 자연과의 관계를 통해 결국은 산 자인 우리의 가슴을 나직하게 두드리는 메시지, ‘ 이 세상은 얼마나 살만한 가치가 있도록 아름다운 곳인가’
비록 한 줄의 문장도 남기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그는 그의 침묵적 건축을 통하여 그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건축은 어떤 글보다도 더욱 설득력 있는 명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