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풍경( Biblical Landscape )’_시구드 레베렌츠와 우드랜드 공동묘지

중앙일보

2001. 10. 22

스웨덴의 건축가 ‘시구드 레베렌츠( Sigurd Lewerentz 1885-1975 ) ‘ 는 건축하는 우리에게도 생소한 이름이다. 서너 권에 불과한 그에 대한 책 중에서1989년 런던에서 간행된 ‘고전주의의 딜레마( Dilemma of Classicism )’ 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암시 하는 바로는 고전주의 건축을 해온 레베렌츠가 딜레마에 빠진 후 이를 극복하고 전혀 다른 스타일의 건축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이며 실제 이 책은 그러한 추론에 의거한 사례들을 열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 책에 나온 그의 건축 중 ‘우드랜드( Woodland ) 공동묘지’ 가 있는데, ‘부활의 교회’ 라는 이름을 가진 그 공동묘지의 한 교회당의 건축은 일견 그 지붕의 형태며 기둥의 모양들이 고전주의적 형식으로 되어 있어 쉽사리 그의 건축이 19세기를 지배한 고전주의 양식으로 분류됨 직도 하였다. 문제는 그가 말년에 건축한 몇 개의 교회와 작은 꽃 집에서 그가 사용한 건축의 어휘가 몹시도 현대적이라는 것인데 실제로 그렇다면 그 책에 쓰여진 그대로 그는 그의 건축여정에서 대단한 전환을 이루어 낸 것이 틀림없었다.
이 책의 서문은 ‘침묵의 건축가’ 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침묵의 건축가. 왜 그는 침묵의 건축가 인가?
그는 90세의 일기를 기록하면서 한 줄의 글조차 남기지 아니하였으며 단 한번도 교육현장에 선 일이 없다. 오로지 건축작업 현장을 지켰을 뿐이다. 그래서 침묵의 건축가일까?
북구의 나라 스웨덴의 건축가 중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사람은 ‘스톡홀름 중앙도서관’ 을 설계한 군라드 아스플룬드( Gunrad Asplund ) 이다. 이 아스플룬드는 20세기의 건축가를 지칭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아스플룬드는 정치적이라고 할만큼 사교적 성격을 가졌으나 친구였던 레베렌츠는 비타협적이고 내성적 성격으로 오로지 건축을 만드는 일에만 몰두하곤 했다 한다. 레베렌츠와 아스플룬드는 같이 학교를 다닌 동기생으로 학교시절에서도 많은 공동작업을 하였으며 졸업 후에도 줄곧 같이 작업을 한 파트너였다.
그들이 활동을 시작한 20세기 초는 이미 모더니즘이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하여 바야흐로 새로운 예술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돋아나고 그로 인해 다소의 긴장이 조성되던 때였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였을 게다. 야심찬 젊은 아스플룬드는 스웨덴에서 그 시대가 만든 대표적 건축가가 된다. 레베렌츠를 끌어들여 한 팀을 이룬 아스플룬드는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고, ‘우드랜드 공동묘지’ 는 1917년 이들이 공동으로 현상설계에 응모하여 당선된 프로젝트이다.
이 ‘우드랜드 공동묘지’ 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아스플룬드가 설계한 장제장( 葬祭場 ) 때문이다. 거의 모든 모더니즘에 관한 건축 책에 소개되어 있는 이 장제장의 풍경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추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단순한 입면과 그 앞의 투박한 십자가가 부드러운 녹색의 구릉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는 광경은 절제한 건축이 갖는 폭발적 힘을 보여준다. 나도 이런 연유로 아스플룬드의 건축을 경외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전주의의 딜레마’ 를 읽으면서 그 아스플룬드의 장제장이 그토록 감동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그 건축 자체보다는 그 공동묘지의 조경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조경을 만든 이가 바로 레베렌츠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그 구릉이며 나무들이 자연 상태의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며 이 공동묘지에 있는 모든 자연이 레베렌츠가 계획하고 의도한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레베렌츠의 많은 스케치는 그러한 조경에 대한 것이었다.
많은 부분이 완성된 1934년 그는 이 우드랜드 공동묘지의 중앙위원회에 의해 해임된다. 위원회의 부당한 요구에 사사건건 충돌해 온 결과였다. 그 책에는 노년의 레베렌츠의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한평생을 옹고집으로 일관하여 살았었음을 충분히 감지하게 한다.
나는 그의 건축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몇 번의 기회를 노리던 중 작년에 런던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 오기 직전 순전히 그의 건축 만을 보기 위하여 스웨덴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스톡홀름에 있는 ‘우드랜드 공동묘지’ 를 방문하기 전 덴마크와 인접한 말뫼( Malmo )와 클리판( Klippan ) 에 있는 다른 공동묘지와 교회를 먼저 찾았다. 이들은 레베렌츠의 거의 마지막 작업답게 그의 농밀한 건축언어가 유감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말뫼의 공동묘지에 있던 작은 꽃집이 갖는 은유와 해학은 몇 부분에서 그 원형이 현저히 훼손되어 있음에도 보석 같은 귀한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이 건축들의 어느 부분에서도 지난 시대의 고전주의자의 그림자 조차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는 철저히 모더니스트였으며 그것도 우리에게 시심을 가득 부르는 낭만적 모더니스트일 따름이었다. 이것이 그의 후기작이어서 그러할까? 그렇다면 그의 초기작인 우드랜드 공동묘지에서는 그가 변신하기 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자못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스톡홀름으로 향했다.
우드랜드 공동묘지를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잡아 탄 택시 속에서 운전수가 그레타 가르보가 최근 이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말을 했다. 그가 죽기 몇 해전 직접 이곳을 와보고 이 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스스로 이곳에 묻히기로 정했다고 한다. 그럴 정도로 입구에서 본 묘역의 광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멀리 눈에 익은 아스플룬드의 장제장과 십자가가 보이고 부드러운 곡선의 구릉들이 뭉게구름들을 가볍게 푸른 하늘로 띄우고 있는데 기괴한 공동묘지의 풍경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는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도 잠시일 뿐 레베렌츠가 만든 도면을 보며 그가 만든 길들을 따라 걷는 동안 나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만든 이 공동묘지는 단순한 묘역이 아니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끊임없이 대화하고 교류하는 도시였으며 스스로의 삶에 대해 자문하는 사유의 공간이자 신의 인간에 대한 축복과 그 징표로 태어난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레베렌츠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언덕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신전인 듯한 경건한 영역을 이루고 그 영역에서 그가 세운 ‘부활의 교회’ 까지 1km에 가까운 길을 일직선으로 만들었다. 이 길은 때로는 긴장하고 때로는 이완하며 산 자로 하여금 어느덧 경건한 의식 속에 걷게 한다. 여기서 걷는다는 것은 한편의 아름다운 서사시였다. 땅의 변화나 나무와 풀들은 그의 유용한 도구였으며 때로는 울창한 나무 사이에 떨어지는 햇살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가르친다. 비석들은 마치 폐허의 주춧돌 마냥 그냥 널브러져 있기도 하여 그로 인해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처절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뒤로 돌아 앉게 하여 그들이 이제는 돌아 올 수 없는 이들임을 알게 하기도 한다. 더러는 한 곳에 모여 앉아 죽은 자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 길의 마지막에는 ‘부활의 교회’ 가 있었다. 언급한대로 소위 고전주의적 지붕과 장식적 기둥을 가진 그 교회에 빨려 들 듯 들어간 순간 짙은 침묵의 무거움이 다시 나를 긴장케 한다. 또 하나의 집 모양을 한 제단을 보며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내부인지 외부인지 그 분간을 어렵게 하여 산 것과 죽은 것에 대한 환상을 낳게 한 것이 나만 가졌던 과민한 반응이 아니리라. 이것이 그 책에서 말한 고전주의 건축이란 말인가. 결단코 아니다. 이것은 고전의 건축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레베렌츠의 고백이며 그의 건축적 본질인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이러한 사실을 되 뇌인 끝에 그 작은 교회를 나왔다. 레베렌츠가 만든 정교한 철제의 문을 디밀고 나온 순간 약간 낮게 깔린 또 다른 묘역에서는 죽은 자들의 묘석이 정갈한 햇살을 받으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아 이것이 부활인 걸까?
‘성서적 풍경(biblical landscape)’. 그렇다. 그 책의 한 구절에서 레베렌츠가 만든 건축은 ‘성서적 풍경’이라고 적혀 있었다. 풍경에 대한 성스러운 교본이라는 뜻이며 새로운 시대에 주는 새로운 복된 메시지이다. 즉 이 메시지는 채움을 목적하는 전통적 서양의 건축이 이 이상 아닌 것이며 비움을 목표로 하는 현대의 새로운 건축이라는 말이 아닐까. 따라서 레베렌츠가 여기서 만든 것은 단순한 조경이 아닌 것이다. 그는 큰 건축으로서의 공동묘지를 그렸고 그 속의 죽은 자와 자연과의 관계를 통해 결국은 산 자인 우리에게 무한한 교훈과 감동을 던져주고 있다. ‘ 이 세상은 얼마나 살만한 가치가 있도록 아름다운 곳인가’
그는 말년이 되어서야 이 비움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게 아니라 이 우드랜드 공동묘지를 설계할 때부터 애초에 비우고 절제하며 침묵을 통해 그의 본질 만을 남겨 놓으려 한 것이다. 쟈코메티나 베케트의 아름다운 비움을 그에게서 발견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서 느끼는 현대적 절망을 레베렌츠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다. 그만큼 그의 비움은 시어에 가득 차 있으며 희망적이다.
그가 비록 한 줄의 문장도 남기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그는 그의 침묵적 건축을 통하여 그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은 어떤 글보다도 더욱 설득력 있는 명문이었다. 나는 그의 큰 건축인 이 우드랜드 공동묘지를 나오면서 아스플룬드가 만든 교회당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레베렌츠가 준 감동의 크기가 조금이라도 잃어질 것을 두려워 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믿는다. 이 건축은 20세기 건축의 지평을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킨 풍경의 기록이며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성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