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적 도시, 메타폴리스(Metapolis)

지방신문연합

2011. 11. 14

중세에 지은 이탈리아 시에나 시청사 내부에는 암브로지오 로렌체티가 그린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나타내는 프레스코 벽화가 있다. 그림 속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는 많은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밝은 분위기의 시민들은 상거래에 몰두하고 있다. 반면에 어둡게 그려진 성밖에는 농부들이 죄다 머리를 숙이고 경작에 열중하는 동안, 잘 포장된 도로 위를 성에서 나온 귀족들이 사냥도구를 실은 말을 타고 하인들을 데리고 가고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옛날에도 도시와 농촌의 차이는 빈부와 신분의 차이였던 게다. 사실 도시가 발생하고 나서야 농촌이라는 공동체가 생겼다. 농촌은 도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공급처였으니, 늘 도시에 의해 그 성격이 정해졌고 도시가 요구하면 사라지기까지 했다. 이 특별한 신분의 도시거주민을 성내에 산다고 하여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성벽은 농민에게는 완고한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정신의 자유를 얻고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물질의 자유를 취득하게 된 19세기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포화상태를 견디다 못한 성벽은 마침내 허물어지고 도시는 이제 기회의 땅이 되어 보랏빛 미래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확장일로에 놓이고 만다. 그렇게 커진 도시를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라고 부른다. 이는 mother를 뜻하는 그리스어 meter에 어원을 두는데 원래 식민도시를 거느린 큰 도시를 뜻했다. 현대에서도 주변에 위성도시를 여럿 둔 대도시를 의미하는 말이어서 그 배경은 확장과 성장에 있다. 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메트로폴리스는 오늘날 무려 450개나 되며, 이는 천만 명 인구의 메갈로폴리스를 낳아 현재 세계에 20여 도시에 이르는데, 이 초대형 도시는 도시 상호간의 연합을 촉진하여 에큐메노폴리스라는 이름으로 지구전체의 도시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폭발적이었다. 이대로 가면 2050년에는 인류의 75퍼센트가 도시민이 된다고 한다.
미래를 예견하는 이들은 죄다 비관적이었다. 1927년에 나온 미래도시에 관한 공상영화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도시는 지배자와 노동자 계급으로만 나뉜 갈등의 집단으로 그려졌고, 1982년의 영화 “블레이드런너”가 그린 2019년의 로스앤젤러스는 산성비에 젖은 음울한 풍경으로 나타났다. 온실가스, 지구 온난화, 이상기후, 석유자원의 고갈, 원자력의 공포 등등…온갖 지표와 예측도 불안하다. 과연 우리 인류는 지속할 수 있을까?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 화려한 종착점인 메트로폴리스에 성찰이 필요할 때 아닌가.

미국의 도시학자 리차드 세네트는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도시의 성격을 이렇게 정의했다. “다원적 민주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려 한 시노이키모스(synoikimos), 즉 종족간, 경제적 이해간 혹은 정치적 견해간의 차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중앙집중화 된 권력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차별성이 발전의 주체이다. 이 민주주의적 비전은 거대하고 집중적인 건물들이 표현하는 상징보다는, 뒤범벅된 공동체 속에 여러 언어가 적층된 건축을 선호한다. 궁극적으로 다원적 민주주의의 형상은, 전체로서의 도시를 표현하는 이미지를 철저히 부스러뜨리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가 그렸던 도시는, 단일 중심의 땅을 용도별로 나누며 기능의 최대화를 목표로 통제적 체계를 가지고, 기념비적 건물을 통해 도시의 이미지를 지배하는 메트로폴리스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좋은 조짐이 보인다. 서울과 부산, 광주와 대구 등에서 도시재개발이 아니라 원주민을 정착시키는 도시재생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는 과거를 지워 스펙타클한 광경 만들기에 몰두해온 지난 날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성찰이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이라는 종속적 관계의 공동체가 아닌, 이 둘의 기능이 결합된 공동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위 도시(Urban)과 농촌(Rural)을 합친 러반(Ruban)라이프, 농촌에서 5일을 살고 주말 이틀을 도시에서 머물며 즐기는 삶이다. 물론 IT산업이 가져다 준 스마트환경 때문에 발생한 풍경이다.
도시재생이든 러반라이프든 이들 공동체는 네트워크로 묶여진다. 여기서는 땅을 구역별 용도별 기능별로 나누지도 않을 뿐더러 뒤범벅이며 다중적이고 이질적으로 이뤄져 있다. 이런 도시가 한계에 봉착한 메트로폴리스를 뛰어넘는 도시, “메타폴리스(Metapolis)”라고 프랑스의 도시학자 프랑수아 아쉐가 제안하였다. 나는 이를, 지난 우리의 못난 도시개발을 반성하는 도시라고 풀이하며 “성찰적 도시”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 이제 성장과 팽창은 과거의 유산이며, 개발과 재개발이 아니라 재생과 치유, 그리고 절제를 통한 지속적 삶과 우리의 감성과 지혜를 나누는 연대적 삶이 새 시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게 “성찰적 도시”가 그리는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