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적 풍경

경향신문 '오피니언'

2014. 8. 14

도시에 대한 생각이 특별했던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 특히 아케이드라는 공간으로 나타난 파리의 상업적 가로풍경에 꽂혀 지체하다, 나치의 파리 침공을 듣고서야 미국으로 망명하려 황급히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 그러나 중립적이던 프랑코 정부가 나치의 추적을 받는 그의 입국을 거부하자, 포르트부 마을 여관방에서 목숨을 끊었다. 50년이 지난 1990년, 그를 기념하는 시설이 이스라엘의 조각가 다니 카라반에 의해 포르트부의 해안가 절벽 위에 세워져 ‘통로(passage)’라고 이름하였다. 벤야민의 미완성 원고였던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에서 그 이름을 인용한 이 추념비는, 철로 만들어진 사각의 통로가 땅에 꽂혀 절벽을 관통하여 바다를 향해 떨어지는 충격적 모습으로 벤야민의 절박함을 현현하였다. 바로 곁의 마을묘지에는 벤야민의 묘도 있어 애틋함이 더하지만, 이 공동묘지의 풍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바다를 향한 테라스하우스 같은 묘지들과 그 사이에 놓인 길과 마당들로 이룬 작은 마을의 모습은 그것으로 평화다.
이 포르트부의 해변을 따라 국경을 지나 만나는 항구도시 세뜨는 폴 발레리(1871-1945)의 고향이다. 20세가 되기 전에 이미 주옥 같은 시를 발표하여 각광 받았지만, 스승 말라르메의 죽음 이후 절필하고 철학적 사유에만 탐닉하는 오랜 기간을 거쳐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다시 시인으로 돌아와 쓴 ‘해변의 묘지’. “이 고요한 지붕, 비둘기 노니는 곳/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일렁이는데/ 불꽃으로 이뤄지는 바로 그 한낮/ 바다는, 바다는 늘 다시 시작하고/오, 이 사유의 대가/ 신들의 정적 위에 오래 머무는 시선이여……바람이 인다. 살아야 한다……” 지식인으로서 치열하고도 명징한 삶을 갈망하며 스물 네 연의 시로 서술한 풍경이 세뜨의 마랭묘지이며 바로 해변의 묘지이다. 나는 이 묘역에 누운 발레리의 석관 앞에서 바다를 내려다 본 순간, 그 난해하던 ‘해변의 묘지’가 너무도 쉽게 이해되며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 시는 죽은 자들이 모인 마을에 대한 기록이었고 스스로도 여기에 묻혀야 할 것을 안 발레리가 마주한 남은 삶에 대한 절박한 선언이었던 것이다.
세뜨에서 지중해변의 절경을 동쪽으로 따라가다가 국경 근처에서 만나는 로크브룬의 마을묘지에는 르 코르뷔제(1887-1965)가 있다. 1950년대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거장이 된 그가 마을 밑 카프마르탱 해변에 불과 네 평 크기의 통나무집을 짓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일상의 삶을 지낼 수 있는 모든 시설이 다 있었으며, 수 많은 건축으로 시대를 바꾼 이 위대한 건축가는 지극히 작은 그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유하며 살았다. 그러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로크브룬의 마을묘지 안에 묘를 디자인하고 아내를 묻었는데, 7년 후 그 앞 지중해 바다 속에서 그도 운명하고 만다. 프랑스 정부는 폴 발레리처럼 국장의 의식으로 그의 마지막 행로에 경의를 표했다. 루브르궁전에서 거행된 성대한 장례 후, 그는 다시 로크브룬 묘지의 아내에게 돌아와 곁에 누었다. 그의 건축에는 늘 수평선이 있었다. 묘역 한 켠에 놓인 코르뷔제의 작은 묘 앞에 서면, 지중해 바다의 수평선이 배경으로 펼쳐진다. 묘석은 그 위에 놓여 지중해의 햇살로 빛난다. “건축은 빛 속에 빚어진 매스의 장엄한 유희’라는 그의 명제가 실현된 걸까? 죽은 자들의 도시를 본격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베네치아로 향해야 한다. 지중해변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길에, 제노바에 있는 유럽 최대의 공동묘지인 스타글리에노를 방문하고, 특히 ‘건축가가 된 시인’ 알도 로씨(1931-1997)가 설계한 모데나의 산 카달도 공동묘지를 들르는 게 좋다. 도시적 구성을 하고 있는 이 두 곳의 여기저기서 죽음과 삶이 극적으로 조우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그 감동을 안고 베네치아로 간다. 본 섬과 무라노 사이에 사이프러스 나무 가득한 산 미켈레 섬이 있다. 원래는 수도원이 있었으며 한때는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던 이 섬은 19세기 공동묘지로 조성된 이래 베네치아인들 최후의 거주지가 되었다. 에즈라 파운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도 묻혀 있는 여기에는 도시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망라되어 있다. 무덤이지만 각종 형식의 주거시설들이 있고, 광장과 길들도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다. 심지어 빈자과 부자의 구분된 동네도 있다. 건축의 형식으로는 죽음과 삶이 여기서는 결단코 나뉘어 있지 않다. 망각의 바다를 건너는 듯, 죽은 자는 검은 배를 타고 오늘도 물결을 가르며 영원한 거주를 위해 여기에 당도한다.
묘역은 사실 죽은 자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는데, 살과 뼈로 구성된 몸은 주검이 되어 묘지에 묻히지만 결국은 소멸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나 감정을 좌우하는 혼도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또한 육체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영은 본디 자유로운 존재여서, 거주할 육체가 죽으면 다른 세계로 간다고 하니 영도 묘지에 있지 않다. 그러니 묘역에는 죽은 자가 있는 게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거주할 뿐이다. 결국 묘역은 산 자들이 성찰하는 장소며 풍경이다. 그래서 묘역을 찾는 일, 묘지를 가까이 두는 일은 우리 삶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일이 된다.

내가 아는 한, 아름다운 풍경 속에 우리의 삶과 죽음을 끝없이 사유하게 하는 이 루트는 최고의 여행길이다. 사실, 독자들이 이 칼럼을 읽는 오늘 나는 여러 동학들과 함께 이 성찰적 풍경을 찾아 떠난다. 올 한해 동안 우리 삶의 방식을 탐구할 목적으로 ‘거주’라는 큰 주제를 놓고 건축가들과 여러 학자들이 모여 강의와 토론을 정기적으로 해왔는데, 죽은 자들의 거주방식도 간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모습이어서 이를 현장에서 논의하기로 한 것이다.
오래 전에 기획한 여행이지만, 이 땅이 슬프고 아프며 절박한 지금 여럿이 우르르 떠나는 걸음이 가벼울 수 없다. 다만, “문명의 기록은 야만의 기록 없이 결코 오지 않는다.”라는 벤야민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글을 다시 읽고자, 그래서 이 시린 시대에 사는 험한 꼴을 위로 받고자 간다. 어떻게 사는 게 바른 것인지 성찰하고 오겠다.